1071화. 일장(一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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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화력이 좋은 해대소는 인근 시장에서 영선궁 9층에 사는 인물의 신분을 금방 알아내고는 바삐 자리를 떠났다.
“뭐라, 농 가!”
바위에서 좌선을 하던 한립이 눈을 떴다.
“예, 확실합니다. 9층에 농 가 노조와 객경장로 한 분 그리고 농 가에서 데려온 다른 자제들과 연허기 수사들도 함께 머문다고 합니다.”
해대소가 걱정스런 얼굴로 알아 온 소식을 전했다.
“성가시게 되었구나. 허나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무슨 뜻인지요?”
“내가 농 가와 사이가 그리 좋지 못해서 말이다! 다른 가문이었다면 내가 직접 찾아가 요구하면 상대도 어느 정도 체면을 봐주었을 것이다.”
한립의 말에 해대소의 안색이 나빠졌다.
“그리 근심 말거라. 허허, 어차피 틀어진 사이 한 번 더 밉보인다고 뭐 크게 달라질 것 있겠느냐? 게다가 꼭 들킨다는 법도 없고. 월천 너는 먼저 돌아가 기다리고 있거라.”
한립은 푸른 둔광을 일으켜 순식간에 사라졌다. 해대소가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희색을 보이고는 곧바로 산 아래로 내려갔다.
단숨에 영선궁 근처에 이른 한립은 거대 궁전의 9층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거대한 금제진법도를 떠올렸다.
그간 살펴본 결과 아홉 개의 영선궁에 설치된 금제가 근본적으로 비슷비슷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아무리 삼엄하게 금제를 펼쳐 놓았어도 강력한 신통을 지닌 그가 은밀하게 숨어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한립은 궁리를 마치고 얇은 은색 가죽을 꺼내 들었다. 광한계에 있을 때 류수아에게서 얻은 천변환면(千變換面)이었다. 그는 가면을 띄우고 저물탁에서 금색 짐승 가죽을 불러냈다.
잠시 후 천변환면이 은색 빛으로 변해 요수 가죽으로 스며들더니 빙글빙글 돌아 한립을 덮쳐왔다. 그러자 순식간에 변신이 이루어져 매끄러운 그의 피부에 금색 털이 자라나고 눈동자가 짙은 남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금비원(金臂猿) 가죽이 쓸 만하구나. 이만하면 농 가 수사들의 눈을 속일 수 있겠지.”
한립의 몸에서 검은빛이 반짝이고 새까만 천 두 장이 떠올랐다. 천들이 그를 감싸 검은 기운으로 가리자 눈 깜짝할 사이에 한립의 신형이 검은빛 속에서 사라졌다.
그는 투명해진 자신의 몸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태일화청부를 쓰면 더욱 완벽하겠지만 그 상태로는 다른 술법을 부릴 수 없어 차선책을 택한 것이다.
한립은 소리 없이 9층으로 다가갔다.
어느 순간 하얀 빛의 장막이 앞을 막아섰고 표면에 뇌전이 번뜩였으나 그의 손에서도 금색 뇌전이 번뜩여 천둥소리가 울리기 전에 뇌전을 제거했다.
몸에서 회색 기운이 흘러나온 한립은 아무렇지 않게 하얀빛의 장막을 통과했고, 그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작은 구멍도 빠른 속도로 복구되어 사라졌다.
잠시 후 영선궁 1층에서 화신기 병사 두 명이 날아올랐다.
“분명 금제 파동이 있었는데 아무런 이상도 없어 보이는데요?”
젊은 청년이 빛의 장막을 살피고는 불퉁거렸다.
“지나가던 새가 금제를 건드리기라도 했나 봅니다.”
머리에 뿔이 솟은 노인이 작은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그는 요족 수사였다.
“공손 형, 농담도 잘하십니다. 영선궁 금제가 평범한 새에게도 반응을 한다면 이곳에 진법을 설치한 진법대사들은 다 머저리란 소립니까.”
청년이 얼굴을 찌푸리고 반박했다.
“허허, 날아가는 새가 그랬던 침입자가 그랬던 우리에게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합체기 선배님들이 잔뜩 머무는 영선궁에 침입한 고계 수사를 수사께서 막으실 수 있겠습니까?”
요족 노인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얼굴이었다.
“공손 수사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금제가 망가진 것도 아닌데 굳이 일을 만들 것 없지요. 에이, 이곳이 현무성 내전이라도 되는 줄 잠시 착각했습니다.”
“현명한 생각이십니다. 가십시다. 노부에게 좋은 술이 있는데 같이 맛이나 보시지요.”
청년의 태도에 노인이 활짝 웃으며 나란히 날아 어딘가로 떠났다.
* * *
은색 화염이 날아가 빼곡하게 앞을 가로막은 빛의 실들을 없앴다. 한립은 이제 영선궁 9층의 어느 담에 있었다. 새하얀 담에 은색 주술문자들이 반짝였는데 자세히 살피니 일종의 공간금제였다.
‘공간신통이 있으니 망정이지. 이곳에서 시간을 끌 뻔했구나.’
그는 수결을 맺어 미간 사이에서 요목을 불러내 검은 빛을 쏘아 보냈다. 그러자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검은 빛이 하얀 담에 스며든 순간, 은색 주술문자들이 빛을 잃고 소실된 것이다.
한립이 낮게 기합을 넣자 가느다란 검은 빛이 몇 배로 굵어져 하얀 담에 팔뚝만한 구멍을 뚫어놓았다. 이에 담 속으로 뛰어든 한립은 갑자기 눈앞이 밝아지고 자신이 거목 아래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어떤 중년 사내와 여인이 황당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곧장 팔을 휘둘렀다.
빠각! 퍽!
그들은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거대한 주먹에 맞아 그대로 기절했다. 한립은 사내와 여인을 차례대로 끌어와 다섯 손가락으로 머리를 쥐고 추혼술을 펼쳤다.
“기령자는 농 가에서 데려간 것이 확실하구나. 노부인이 농 가 가주의 여동생이었다니! 중요한 정보는 봉인이 있으니 아쉽구나.”
농 가 남녀의 의식에 금제가 걸려있는 것은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제자들이 적에게 노출되어 가문이나 종문의 비밀이 새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흔히들 쓰는 수법이었다.
이들의 기억에 따르면 노부인은 다른 세 명의 수사를 데리고 농 가주와 이야기를 나누고는 휴식을 취하러 물러났다.
그 셋 중에 기령자가 있는 것이 분명했는데 그들이 어디 있는지는 그들도 모두 몰랐다.
한립은 미간을 좁히고 노란빛을 방출해 커다란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 푸른빛으로 기절해 쓰러져 있는 남녀를 감싸 가볍게 그 안에 눕히고 다시 노란빛을 방출해 흔적을 가렸다.
그제야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핀 그는 주변의 풍경을 살폈다. 하얀 안개로 가득 찬 숲 밖으로 높이 솟은 성벽이 보였다. 금색 성벽 위에 수사들 뒤로 높은 누각들이 있었다.
한립은 그 중 금색 거대 탑을 주시했다. 추혼술을 통해 합체 후기의 농 가 노조와 다른 연허기 장로들은 금색 거대 탑에 머문다는 것을 알아냈다.
현재 농 가 노조는 경매에서 낙찰 받은 경천전주도를 가지고 가문의 여러 진법대사들과 연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다른 합체기 태상장로 역시 마침 일이 있어 출타 중이라고 하니 들킬 걱정은 더욱 줄어들었다.
한립은 뜸들이지 않고 바람처럼 성벽을 지나쳤다.
성벽 위를 지키던 백의 수사들은 순간 미약한 바람이 이는 것을 느꼈지만 의식으로 주변을 훑어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침입자가 벌써 성벽을 지나 성 안의 하얀 돌길에 내려섰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한립은 눈을 감고 잠시 길에 서 있다가 어두운 얼굴로 눈을 떴다.
“감응을 차단했어?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것이로구나. 그렇다면 일일이 찾아다녀야겠지만 연허급 수사들이 그리 많지 않으니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곧장 가까운 건물로 뛰어들었다.
같은 시각, 한립과 멀리 떨어진 누각 안에는 노부인 일행과 자색 장포 노인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색 장포 노인은 막 빛을 거둔 옥패를 누워있는 어린 도사의 목에서 떼고 몸을 일으켰다.
“월결심옥(月結心玉)은 의식을 차단해주는 효과가 있어 지척에 있지 않는 한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 안심하고 쉬거라.”
“고맙습니다, 오라버니!”
노부인이 예를 갖춰 자색 장포 노인에게 인사를 했다.
“감히 합체기 수사를 건드리고, 너희 부부가 담도 크구나! 진룡의 피를 발동한 명준이 때문에 너희를 받아들인 것이다. 또한 부친께서 경천전주도 연구를 마치시고 나오기 전까지는 절대 이 어린 도사를 죽여서는 안 된다.
합체기 노괴와 악연을 맺는 일인데 반드시 부친의 허락을 얻어야겠지. 딴 마음을 품었다가는 아무리 친 동생이라 해도 손속에 정을 두지 않을 것이다.”
자색 장포 노인이 엄중히 경고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저도 오랫동안 아버지를 찾아뵙지 못해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요. 저나 부군이나 다음번 대천겁을 넘기지 못할 듯하니 명준이는 오라버니께 맡기겠습니다. 병만 치료하면 자질은 빠지지 않는 아이라 농 가의 명성에 누를 끼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노부인은 표정이 조금 굳었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내 알아서 할 것이니 명준이 일은 걱정할 것 없다. 다만 부친을 뵐 생각이라면 포기하거라. 너도 가문 밖으로 시집간 여인은 농 가 수사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않느냐. 명성이 자자한 무정도(無情道) 신통을 익히신 부친에게 혈육의 정을 따질 것도 아니고 말이다.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명준이만 남고 너희는 바로 떠나야 한다.”
자색 장포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실망한 노부인이 사정을 해보려고 했지만 자색 장포 노인은 곧바로 방을 나가버렸다.
“아무래도 지금은 오라버니가 시키는 대로 따라야겠어요! 부군, 도사를 1층 밀실에 숨겨두죠.”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하던 노부인이 노기를 담아 말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부인. 예상한 일이지 않소. 당신 오라비가 합체기 노괴가 두려워 우리를 문전박대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오.”
“뭘 안다고 그러는 거예요! 됐으니 어서 도사나 옮기자고요!”
“알겠소, 그렇게 하리다.”
노인은 노부인의 화풀이에 조용히 기령자를 향해 걸어갔다.
“며칠만 더 전승법기를 지니고 있게 해주마. 며칠만 지나면 누구도 우리 명준이에게 전승법기를 옮기는 것을 방해할 수 없을 것이야.”
노인이 중얼거리며 청동 방울을 꺼내 흔들었다. 방울소리에 금제에 걸린 기령자가 멍하니 걸음을 떼려는데 허공에서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방해하겠다면 어쩌겠느냐?”
“이런, 그자가 왔소!”
노인이 소리를 치며 기령자를 향해 청동방울을 던졌다. 순식간에 거대해진 청동방울이 기령자를 가두려 했다.
노부인도 빠르게 검은빛 두 줄기를 뿜었다. 한 줄기는 병약한 청년을 그녀 곁으로 끌어왔고 나머지는 뿔이 달린 검은 구렁이로 변해 입에서 검은 연꽃을 내뿜어 노부인과 그 아들을 감쌌다.
대비를 마친 노부인은 귀청이 떨어지게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나 홀연히 나타난 털이 복슬복슬한 금색 주먹이 거대 청동방울을 때렸다.
쾅!
주술문자들이 요동치고 거대 청동방울이 일격에 깨져 버렸다.
퍽!
허공의 금색 손은 곧바로 짙은 눈썹 노인도 한 대 후려쳤다. 그러자 노인은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고, 또 다른 금색 손이 노부인을 노렸다.
츠츠츳.
노부인을 보호하던 검은 연꽃 보호막은 종잇장처럼 찢겨져 나갔고 거대 손은 그녀의 목을 사정없이 틀어쥐었다. 엄청난 힘에 눈이 뒤집힌 노부인은 컥컥거리며 발버둥을 쳐댔다.
그 모습에 병약한 청년이 화들짝 놀라 수정 칼날을 꺼내 들고 금색 거대 손을 공격했다.
챙!
칼날은 거대 손을 가르지 못해 폭발했고 그 반동으로 청년은 피를 토했다. 힘없이 바닥에 쓰러진 청년은 다시 일어날 기력도 없어 보였다.
“금제를 쳐놓아서 소리를 질러도 소용없다. 저 녀석 배후에 합체기 수사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짓을 벌이다니 겁이 없구나. 농 가에 숨어 있으면 못 찾아올 줄 알았더냐.”
허공에 울리는 사내의 목소리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공간 파동이 일고 전신을 드러낸 것은 은백색 갑옷을 걸친 거구의 금색 원숭이였다.
푸른 눈에 송곳니가 입 밖으로 튀어나온 원숭이 요수는 새까만 기운으로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요수(妖修)! 어찌 이럴 수가!”
거대 원숭이를 맞닥뜨린 노인이 놀라 소리를 높였고 노부인도 놀란 기색이었다.
“스스로 죽을 길에 들어섰으니 나를 잔인하다 탓하지 말거라!”
흉흉하게 눈을 번득인 금털 원숭이가 노부인의 목을 틀어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당장이라도 노부인의 목이 비틀려 떨어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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