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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069화 (826/2,000)
  • 1069화. 만골의 제안

    *

    붉은 장포를 입은 이화교왕이 노란 장포의 여인을 데리고 무대로 오르자 수군거리던 소리가 잦아들었다.

    전부 이화교왕이 아니라 그와 나란히 선 여인을 훑느라 바빴다. 동그란 얼굴에 부드러운 피부를 지닌 소녀는 귀여운 미소를 머금고 있어 인상이 아주 좋았다.

    한립이 눈동자에 남색빛을 일렁여 황포(黃袍) 여인의 모습에서 다른 점을 발견했을 때 이화교왕이 입을 열었다.

    “본 왕의 소개는 되었고, 곁에 계신 분은 기령족(器靈族) ‘천추성녀’입니다! 성녀의 위명이야 들어본 분들이 많으실 테지요. 이번 경매의 마지막 두 물품은 천추 수사께서 멀리 기령족에서 애써 가져와 주신 것들입니다.”

    이화교왕의 목소리는 약간 이상했지만 위엄이 어려 있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령족 성녀직을 맡고 있는 천추라 합니다. 이렇게 여러분을 뵙게 되어 무척 반갑습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이종족에게 둘러싸여 있는 셈인데도 미소를 머금은 모습이 무척 태연자약했다.

    “기령족의 천추성녀! 인족 합체기 수사와 동급 존재라는 기령족의 사대성령(四大聖靈) 중 한 명이 아닌가!”

    “과연 이종족이 참석했군. 떠돌던 소문이 참말이었어!”

    이화교왕과 황포 여인이 말을 마치자마자 대전 안이 굉장히 시끄러워졌다. 그 모습에 이화교왕이 얼굴을 찡그렸다.

    “모두 조용히 하십시오. 천추 수사가 이곳까지 오신 것은 삼황과 칠요왕의 동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경매회가 끝나는 대로 설명이 있을 것입니다. 천추 수사는 이번 경매에 귀한 보물을 내놓으며 인요족에게 진심 어린 호의를 표했습니다. 물품이 낙찰되면 얻게 될 영석은 전부 인요족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그의 말에 인요족 수사들이 조용해지자 천추성녀가 손을 뻗어 동그란 원반과 하얀 옥간을 꺼내들었다.

    “이 만삼륜반(万森輪盤)은 만령방에 이름을 올린 통천령보입니다. 기령족의 보물이지만 저희의 진심을 표하기 위해 이번 경매에 내놓는 것입니다. 세상 만물을 환술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뜻으로 실제 71가지의 환술을 펼칠 수 있지요.

    법력만 충분하다면 한 번에 71가지 환술을 겹겹이 방출해 합체기 수사라도 붙들어 둘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렇게 하려면 합체기 수사도 법력을 전부 소모해야 하니 주의를 요합니다.

    두 번째 보물은 저희 기령족도 다른 이족인에게 고가에 사들인 상고시대 경천전주(擎天戰舟) 설계도입니다. 천 명 이상을 태울 수 있고 강력한 진법이 새겨져 있어 공격과 방어에 능한 전함(戰艦)입니다. 비행 속도도 무척 빨라 특수한 상황에서 더없이 유용한 보물이지요.”

    천추성녀는 마지막 말을 하며 빙긋 웃었다. 특별히 의미하는 바가 있는 듯했다.

    여인은 원반에 법력을 불어 넣은 다음 관중석을 향해 흔들었고 분홍색 기운이 금은색 원반에서 꿀렁꿀렁 흘러나와 인요족을 덮쳤다.

    흠칫 놀란 수사들 중 다수가 얼른 보호막을 펼쳤으나 코를 찌르는 향기가 밀려들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분홍색 기운이 지난 자리에는 다채로운 꽃이 피어나 분분히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법력이 정순한 이들은 이 모든 것이 환술이라는 것을 알고 감탄을 터트렸다.

    “직접 만삼륜반을 제련하지 않았기에 진정한 위력의 10분의 1밖에 보여드리지 못했습니다. 조금 전 보여드린 환술은 71가지 중 하나이고요.”

    천추성녀는 3층 합체기 수사들조차 마음이 동할 말을 늘어놓았다.

    “다만 경천전주 설계도에 담긴 거대 전함은 수십만 년 전 천원대륙을 횡단했다고 알려진 철륵족(鐵勒族)의 최상급 전함으로 추측됩니다. 이렇게 거대한 전함을 제작하려면 당연히 막대한 비용과 인력이 필요하겠지만 그로 인해 얻게 될 이익도 막대하겠지요.

    천여 명의 전력을 몇 배로 높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재난이 닥쳤을 때 문하의 자제들을 데리고 퇴각하기에도 이보다 더 좋은 수단은 없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은 이 전함을 제작하는데 필요한 자원이 워낙 희귀한 것들이라 대량생산이 어렵다는 점이고요.”

    “천추 수사께서 경매품의 내력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주셨습니다. 만삼륜반의 위력은 수사께서 직접 시연을 해보이셨고, 경천전주도(擎天戰舟圖)는 본 왕이 사람을 불러 감정을 해 진품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오늘 많은 분들이 경천전주도를 구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전함을 제작하는데 소모되는 자원이 상상을 초월하니 자신이 없는 분들은 경매에 참가하지 않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그럼 만삼륜반의 경매를 시작하지요. 최저가 영석 8천만입니다!”

    이화교왕은 바로 만삼륜반의 경매를 시작했다.

    화신기와 연허기 수사들 중에는 통천령보를 직접 보지 못한 이들도 많았지만 8천만이란 가격에 바로 욕심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둔광과 요수마차 그리고 비차들이 운해 속에서 떠올라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마지막 두 물품의 등장으로 경매는 절정에 이르렀고 수십 명의 합체기 수사들이 치열하게 경쟁한 끝에 만삼륜반은 흑봉왕 소관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리고 철륵족 경천전주도는 진령제일세가라 불리는 농 가가 낙찰을 받았다.

    ‘농 가…….’

    한립은 얼굴에 은은한 금빛을 띠고 있던 중년 수사를 떠올렸다. 경천전주도를 가져간 농 가의 노조는 합체 후기의 수사로 법력의 심후함이나 그 기세가 대단했다.

    농 가 노조가 삼황이나 칠요왕에 필적하는 수행을 지녔으니 농 가가 제일진령세가라 불릴 만했고, 인요족 고계 수사들을 제치고 경천전주도를 낙찰받은 것으로 보아 재력으로도 밀리지 않는 듯했다.

    그런 세력과 척을 지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부담이 되었지만 곡 가와 엽 가의 만남으로 다른 진령세가들과 농 가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에 안심이 되었다.

    다른 진령세가 두 곳과 인연이 있는 합체기 수사를 농 가라 한들 함부로 적대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농 가의 모든 장로들을 이끌고 그를 공격하지 않는 한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는가?

    “한 수사,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한립이 푸른 둔광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누구신가 했더니 만골 도형이셨습니다. 경매에서는 좋은 결과를 얻으셨는지요?”

    빠른 속도로 날아든 회색 구름 위에 백골문의 만골 진인이 서 있었다.

    “이런 곳에서 좋은 물건 구하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입니까. 마지막 두 물건은 탐이 났지만 괜한 욕심은 부리지 않았습니다.”

    “하하, 저도 퍽 공감이 되는 말씀입니다! 만삼륜반이나 경천전주도는 처음부터 우리 같은 산수들이 낙찰받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지요. 특히 전함 설계도는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화를 부를 겁니다.”

    “허허허, 과연 영민하십니다. 오랜 세월 수련만해서 물정을 모르는 몇몇 수사들과는 확연히 달라요. 안 될 일에 눈이 벌게져서 달려드는 이들 말입니다.”

    “헌데 특별히 저를 불러 세우신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물론입니다. 흑역교역회가 3일 후에 열릴 거라는 소식을 들어 인사도 나눌 겸 견인령(牽引令)을 드리려고요. 이것을 들고 흑역교역회에 참가하시면 됩니다.”

    만골 진인이 웃음기를 지우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한립은 물건을 받고는 의아한 기색이 스쳤다. 새까만 삼각형 영패는 간단한 문양이 들어간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표식이 없어서 그냥 새까만 고철 같았다.

    “이게 견인령이란 말입니까?”

    “이상하게 여기실 것 없습니다. 지난번 흑역교역회 견인령은 나무방망이였던 적도 있으니까요. 주최 측이 무슨 수작을 부려 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흑역교역회가 열리는 장소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신물이니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흑역교역회 배후의 수사들은 참으로 흥미롭군요! 진인, 직접 견인령을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허, 별 것 아닙니다. 솔직히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소식에는 밝은 편이라 서요. 혹시 한 수사께서는 인요족이 천 년 내로 겪게 될 고난에대해 들은 바가 있으십니까?”

    “천 년 내로 겪게 될 고난이라면 마겁에 대한 것입니까?”

    “알고 계셨군요. 그 소식에 대해 얼마나 상세하게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만골 진인은 그다지 놀라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만보대회 전후로 동급 수사들끼리 교류하며 마겁에 대해 모르는 합체기 수사는 얼마 되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 경매에서 수사들이 가산을 탕진할 위험을 무릅쓰고 경천전주도를 얻으려 한 것도 마겁이 도래했을 때를 대비함이었을 것이다.

    “그리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전보다 훨씬 살아남기 힘들 거라는 것은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흑역교역회 후에 빈도와 같이 다른 산수 분들을 만나 이 일에 대해 상의를 해볼 마음이 있으십니까? 산수들이 무사히 마겁을 견디기 위해 어찌해야 할지에 대해 말입니다.”

    “산수라면 인족 수사들을 일컫는 것입니까?”

    “합체기 인족 수사라고 해봐야 몇 되지도 않는데 따로 모여 상의할 것도 없지요. 이번에는 요족 수사들도 많이 참석할 것입니다.”

    만골 진인이 변명하는 투로 뜸을 들이며 말했다.

    “저는 요족 수사들에 대해 편견이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왕 인요족 합체기 산수들이 모인 자리라니 저도 얼굴은 비추어야겠지요. 흑역교역회가 끝나는 대로 수사를 따라가지요.”

    무슨 생각인지 한립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답을 주었다.

    “현명한 결정이십니다!”

    노도사는 자신의 요청이 순조롭게 받아들여지자 퍽 기뻐했다. 그들은 오래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만골 진인이 먼저 회색 구름을 움직여 떠나갔다.

    한립은 만골 진인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눈을 빛냈다.

    “스승님, 저희도 이제 돌아가는 것입니까?”

    “기령자와 월천은 거처로 돌아가지 않고 할 일이 있다. 나를 도와 요족 여인을 하나 찾아 주어야겠어.”

    기령자의 재촉에 한립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명을 내렸다.

    “예, 스승님!”

    갑작스런 분부에 놀랐지만 기령자와 해대소는 머뭇거리지 않고 답했다.

    “이게 신물이고, 구체적인 연락 방식은…….”

    한립은 반절짜리 옥패를 꺼내 던져주고는 입술을 달싹여 전음으로 연락 방법을 전달했다. 이에 두 명의 기명제자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여 댔다.

    “여인을 찾으면 돌아와 고하면 된다.”

    말을 마친 한립은 푸른 기운으로 해대소와 기령자를 감싸 지면에 내려준 다음 푸른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영선궁으로 돌아간 그는 밀실로 들어가지 않고 대청에서 읍령혈목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그는 오래전 시장에서 화겁괴뢰 제련법을 구매해 두었는데 오늘이 그것을 써먹을 날이었다.

    제련할 때 다량의 정혈(精血)을 첨가해야 했고 완성한 이후에도 일정 주기마다 피로써 배양해야 한다는 것이 유일한 단점이었다. 물론 그 정도 정혈의 손실이야 본체를 대신해 화를 입어주는 화겁괴뢰의 쓸모에 비하면 거론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화겁괴뢰 제련법과 필요한 보조 재료를 점검하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필요한 것들을 전부 보유하고 있어서였다. 그동안 온갖 재료를 모으느라 공을 들인 보람이 있었다.

    한립은 읍령혈목을 넣어 두고 화겁괴뢰 제련법을 차근차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꼬박 밤을 새고 이튿날 아침, 해대소가 바삐 대전 안으로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큰일 났습니다, 스승님! 기령자 사제가 잡혀갔습니다!”

    “허둥거리지 말고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소상히 말해 보거라.”

    “저와 사제가 스승님이 찾으시는 요족 선배님을 발견해 돌아오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어떤 노부인이 기령자 사제를 훑고는 괴풍을 방출해 납치해 갔습니다.”

    한립의 차분한 모습에 겨우 안정을 찾은 해대소는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어떻게 생긴 부인이었더냐? 특징적인 것 말이다.”

    그의 말에 한립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키가 크고 마른 몸에 길게 머리를 풀어헤친 할망구였는데……. 아, 이마에 커다란 점이 있었고 음산한 기운을 풍겼습니다! 노부인이 일장을 날려 저를 기절시켰기 때문에 인근을 지나던 다른 수사들의 도움을 받아 이제야 깨어나 달려온 것입니다.”

    “일장을 날렸는데 네가 이리 멀쩡하다고? 이리 가까이 오너라.”

    “존명!”

    그 말에 흠칫 놀란 한립이 해대소를 가까이 불러들여 훑었다.

    “과연 악랄한 수를 써놓았구나!”

    그가 노기를 드러내며 해대소의 팔뚝을 잡아 푸른빛을 흡수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푸른빛에 감싸인 검은 실 같은 것이 해대소의 몸에서 빠져나왔는데 꿈틀거리는 것이 괴상한 애벌레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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