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068화 (825/2,000)
  • 1068화. 천규랑왕의 화신(化身)

    *

    “와아, 다들 탐낼 만합니다.”

    기령자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잠시 후 천안자가 경매를 시작하자 정염사의 가격이 미친 듯이 올라 이제 대여섯 명 만이 가격을 부르고 있었다.

    그중에는 흑모 요족인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결국 엄청나게 높은 가격으로 정염사 마저 낚아채 갔다. 그러자 점점 주변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이때 천안자가 무대 위로 올라와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허허, 많은 분들이 만보대회는 처음일 테니 잠시 안내를 드립니다! 본 경매는 뒤로 갈수록 더 진귀한 보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중간중간 최상의 물품이 섞여 등장합니다. 바로 지금 보여드릴 물건이 그중 하나이니 부디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말을 마치고 노인이 손뼉을 짝짝! 하고 치자 무대 아래에서 시녀 하나가 비취색 목함을 들고 올라왔다. 노인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 말을 이었다.

    “들어 본 적은 있어도 직접 본 사람은 손에 꼽힌다는 읍령혈목(泣靈血木)입니다. 쓰임새가 많아 각종 강력한 신통의 보조 재료로도 쓰이고 직접 제2화신이나 겁을 대신할 꼭두각시를 만들 수도 있지요. 아주 유명한 ‘읍령혈주(泣靈血珠)’의 주재료이기도 하고요.”

    천연자의 말에 대부분이 아연한 표정을 지었는데 소수의 몇 사람은 무척 흥분해 눈을 크게 떴다.

    “읍령혈목이라면 영족(靈族)의 성물이 아닌가!”

    “이런 물건이 어찌 인요족 경매회에!”

    읍령혈목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수사들은 놀라 소리를 높였다. 3층의 귀빈실 곳곳에서 의식 파동이 느껴졌고 한립의 표정도 미세하게 달라졌다.

    합체기 수사들도 읍령혈목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허허, 이게 어떻게 경매 물품으로 올랐는지는 노부도 모릅니다. 허나 진품이라는 것은 보장할 수 있습니다!”

    노인은 웃으며 목함을 열었다. 진한 피비린내가 목함 안에서 치솟았고 짙은 안개가 핏빛 뱀처럼 주변을 선회했다.

    천안자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맨손으로 목함 안에서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손가락 굵기의 구불구불한 검붉은 나무토막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자체는 영기의 빛을 내뿜지 않았지만 쉼 없이 핏빛 안개가 흘러나와 주위를 맴돌았다.

    “화겁괴뢰(化劫傀儡)!”

    한립은 읍령혈목을 보고 번뜩 무언가를 떠올렸다. 읍령혈목은 사실 나무 속성의 변이 영족인의 신체 일부였다. 영족인이라 해도 구하기 어려운 재료인 것만은 확실했다.

    이것으로 제련 가능한 제2화신이나 읍령혈주도 명성이 자자했지만 그가 관심이 가는 것은 화겁괴뢰였다. 화겁괴뢰는 인족에서 오래전 실전된 이보로 합체기 수사에게도 효과가 있었다.

    비슷한 신통을 발휘하는 화령부(化靈符)가 있었지만 수행이 높아질수록 부적의 효과가 미미해져 화(禍)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화겁괴뢰는 단 한 번 사용할 수 있고 주인이 적당한 시기에 발동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한립도 읍령혈목에 마음에 동했다.

    여러 이종족의 대형 경매회에 참석했어도 인요족이 내놓은 물건에는 관심이 가지 않았는데 이것은 낙찰받고 싶었다. 화겁괴뢰를 갖고 있으면 절체절명의 순간 목숨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허나 영족만이 구할 수 있는 이런 재료가 어찌……. 이족인이 만보대회에 참가한다는 소식이 정말이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 이족인의 정체는 영족일 가능성이 높았다.

    파앗.

    무대 위의 천안자가 검붉은 괴목(怪木)에 약간의 법력을 불어넣자 원래 가느다란 읍령혈목이 핏빛을 머금고 굵은 나무 몽둥이로 변했다.

    나무 몽둥이는 노인의 손에서 벗어나려 뱀처럼 꿈틀거렸고, 음산한 귀곡성을 발산해 듣는 이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이 같은 광경에 조금이나마 의심을 품고 있던 이들은 마음을 놓았고, 노인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2천만이라는 천문학적인 가격을 불렀다.

    “2천2백만.”

    “2천5백만!”

    “3천만.”

    엄청난 금액에 동요하던 좌중이 조용해졌다.

    읍령혈목이 아무리 귀해도 화신기와 연허기 수사들이 보유한 영석에는 한계가 있었다. 가산을 탈탈 털어 겨우 구할 수 있는 물건이라면 누구라도 다시 고민해볼 것이다.

    방어구나 공격용 무기 혹은 수행을 증진해 주는 단약이라면 몰라도 재료로는 너무 높은 가격이었다.

    하지만 이미 마겁이 곧 도래할 것을 알음알음 알고 있는 인요족 고계 수사들의 생각은 또 달랐다. 이에 요족 수사들과 인족 수사들이 앞 다투어 가격을 불러댔다.

    이제 무대 위 빛의 장막에 표시된 숫자가 4천만을 넘어 5천만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합체기 노괴라도 꽤 아까울 만한 금액이었는데 놀랍게도 얼굴을 가린 흑랑족 사내가 포기하지 않고 아직 남아 있었다.

    이렇게 다시금 시선을 끌게 된 그는 3층에서 뻗어 나온 강력한 의식들이 훑어대는 데도 거리낌 없이 가격을 높였다.

    “아, 어쩐지! 이제 보니 랑왕 형의 화신 중 하나가 아닙니까?”

    3층에 있던 누군가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회장 안은 1, 2층은 물론이고 3층까지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천규랑왕의 명성은 그만큼 대단했다.

    “소 수사께서 착각한 것은 아니시고요? 랑왕께서는 폐관 수련을 하느라 참석하지 못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어찌 흑랑화신을 여기까지 보낸다 말입니까. 천규 수사의 화신은 일반적인 화신들과 달리 본체의 수련을 돕는 기이한 신통이 있어 쉽게 떼어놓지 않는다고 들었는데요.”

    또 다른 사내의 낭랑한 목소리가 다른 귀빈실에서 울려 퍼졌다. 한립은 단번에 천원성황의 목소리임을 알아차리고 주의를 기울였다.

    “본 왕이 화신을 보내는 것까지 성황과 소 수사에게 고하기라도 해야 한단 말입니까? 읍령혈목을 얻고 싶다면 가격을 부르세요. 막지 않을 것이니.”

    천규랑왕의 흑랑화신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한번 들으면 잊기 힘든 냉랭한 목소리였다.

    “허허, 그럴 리가요! 천규 수사의 일에 참견할 생각은 없습니다. 읍령혈목도 랑왕께서 원하신다니 저는 더 이상 경쟁에 참여치 않겠습니다.”

    천원성황은 그의 냉랭한 말투에도 화내는 기색 없이 이렇게 말하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규랑왕의 화신을 가장 먼저 알아본 흑봉왕도 가볍게 미소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이로써 그들이 천규랑왕을 꽤나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갑작스런 사태에 장내가 고요해졌다.

    “더 이상 아무도 가격을 제시할 생각이 없다면 읍령혈목의 주인을 선포할 때인 듯한데?”

    천규랑왕이 서늘하게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혼잣말이었지만 바로 옆에서 하는 말처럼 똑똑히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한 천안자는 시간을 끌려는 생각을 버리고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읍령혈목, 5천만 영석까지 나왔습니다. 셋을 셀 때까지 가격을 올리는 분이 없다면 이번 물품은 천규 선배님께로 돌아갑니다! 하나! 두…….”

    “6천만 영석!”

    천안자가 숫자를 세고 끝내버리려는데 3층에서 노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로 인해 회장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6천2백만.”

    “6천5백만.”

    천규랑왕이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가격을 부르자마자 노쇠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동천 수사, 나와 꼭 읍령혈목을 두고 다퉈야겠습니까? 일전에 내 천랑조(天狼爪)에 당한 상처가 아직 쑤실 법도 한데요.”

    “흥, 겨우 천랑조 따위에 큰일을 치르려고요. 그보다는 수사께서 내 동천첩(洞天鉆)에 쓴맛을 보았던 것 같은데 기억은 하실까 모르겠습니다.”

    흑랑화신의 도발에 노쇠한 목소리도 거침없이 쏘아붙였다. 뜻밖에도 목소리의 주인은 칠요왕 중 동천서왕이었다!

    대화를 듣고 있자니 천규랑왕과 불화가 있어 이전에 손속을 겨룬 적도 있는 듯했다. 천규랑왕의 흑랑화신이 눈을 번득였다.

    “6천5백만이면 이미 읍령혈목의 가치를 넘어선 가격입니다. 양보할 테니 동천 수사가 가져가시오. 이렇게 영석을 허비하고 나중에 다른 물건들은 어찌 낙찰받으려는지 모르겠지만요.”

    말을 마친 흑랑화신은 눈을 감아 버렸고, 동천서왕도 코웃음을 치고 더는 대화를 이어나가지 않았다. 다른 합체기 수사들도 두 요왕의 분쟁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지 조용했다.

    천안자가 주저 없이 마지막 가격을 부르고 읍령혈목의 귀속을 정하려는데, 경매회 내내 조용하던 한립이 탁자 위의 진법 원반을 가리켰다.

    그러자 무대 위 빛의 장막의 숫자가 6천5백만에서 한번에 7천만으로 치솟았다!

    “6천……. 7, 7천만 나왔습니다. 셋을 셀 때까지 가격을 부르는 분이 없다면 이번 물품은 낙찰됩니다.”

    이미 동천서왕에게 읍령혈목이 낙찰될 거라 믿고 있던 천안자가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이로 인해 대전 안의 수사들은 또 한 번 크게 놀라고 말았다. 누가 눈치 없이 천규랑왕과 동천서왕의 손에서 귀한 재료를 빼앗으려 든단 말인가.

    마지막으로 가격을 부른 사람이 목소리를 내지 않아 누군지 알 수는 없지만 이런 공개적인 경매에 참가한 수사의 정체가 영원히 비밀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모두의 예상을 깨고 동천서왕도 더는 경쟁하지 않고 읍령혈목을 얌전히 내주었다. 7천만 영석이라면 이미 읍령혈목의 적정 가격을 훨씬 넘어서일지도 몰랐다.

    천안자가 셋을 세자 결국 읍령혈목은 한립에게 넘어갔다.

    한립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천규랑왕의 화신이 아까 한 말을 들어보면 이곳에 참가한 삼황칠요왕급 존재들은 따로 노리는 귀한 물품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재료를 낙찰받느라 거액을 쓰는 것은 결코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젊은 병사가 읍령혈목을 호송해 귀빈실로 가져왔다.

    한립은 물건을 자세히 살피고 영석을 지불했는데 저물탁이 가벼워지자 어쩔 수 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지니고 있던 영석의 절반을 써버렸으니 앞으로 어떤 보물이 나오든 낙찰받지 못할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읍령혈목처럼 딱 필요로 하는 것이 나올 확률은 극히 낮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른 합체기 수사들이 가산을 싸들고 와 호시탐탐 노리는 물건은 그가 낙찰받을 수도 없었다. 삼황이나 칠요왕 등 한 지역의 패자가 지닌 재물은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천안자가 여러 물건들을 소개했지만 한립은 등을 기대고 시종일관 평온한 얼굴을 했다.

    이번에 천안자가 내놓은 것은 평소 보기 드문 영약 재료와 단약이었다. 이런 것들은 귀하긴 했지만 한립의 눈에 차지 않았다.

    마지막에 나온 몇몇 영족 영초나 영화는 흥미로웠지만 오직 영족 본체의 원기를 통해서만 배양할 수 있다는 소리에 마음이 식었다.

    아무리 뛰어난 효과를 지녔어도 신비한 병의 녹색 액체로 대량으로 배양할 수 없다면 그 가치는 훨씬 떨어지기 때문이다.

    영약과 단약들이 지나고 대량의 법결과 공법이, 그다음에는 법기와 보물들이 경매품으로 무대에 올랐다. 이런 물건들은 화신기와 연허기 수사들에게 인기가 좋아 경매회장은 다시 한 번 떠들썩해졌다.

    그중에 합체기 수사들도 법력을 증진하는데 쓸 수 있는 욱일단(旭日丹), 수만 년 전 목숨을 잃은 합체기 수사의 공법이 담긴 옥간 그리고 영보급 보물들도 있었다.

    이상한 일은 아직까지도 3층 수사들의 반응이 미적지근하다는 것이다. 가끔 한두 명이 원하는 물건을 낙찰받아 갔지만 수사들이 경쟁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열댓 마리의 전투 꼭두각시를 누군가 수천만 영석을 지불하고 가져간 후, 드디어 경매가 막바지로 치달았다. 천안자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관중을 향해 포권을 했다.

    “이어서 나올 마지막 경매품은 이번 경매회에서 거래되는 것들 중 가장 귀한 보물일 것입니다. 노부의 능력으로는 경매를 진행할 수가 없군요. 이에 마지막 두 물품의 경매를 위해 이화교왕 선배님과 물품의 원주인께서 나와 주시겠습니다!”

    말을 마친 천안자는 관중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이곳에 참석한 이들 중 적잖은 이들이 이번 대회에 이족인이 참가할 거라는 소문을 들었는지 사방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