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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067화 (824/2,000)
  • 1067화. 대아

    *

    한립 일행을 제외하고도 사방팔방에서 비선봉 정상을 향해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립처럼 날아서 직접 정상으로 향하는 대신 산 아래에 도착해 비차를 타고 산을 올랐고, 합체기 수사들만이 번득이며 구름 속으로 날아들었다.

    뇌위의 안내로 어떤 궁전 상공에 도착한 한립은 한적한 입구를 내려다보았다. 입구 앞에는 금포 중년인과 검은 치마를 입은 부인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흑의 여인은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알 수 없는 위엄이 느껴졌고, 그 뒤에 서 있는 보라색 장삼을 걸친 소녀는 동그란 얼굴이 단아하면서도 예쁘장했다.

    청아한 분위기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주변의 병사들과 시종들도 상대가 귀한 신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수시로 자삼(紫衫) 소녀를 힐끔거렸다. 한립의 시선이 소녀를 스쳐 금포인과 흑의 여인에 닿았다.

    ‘저들은…….’

    그가 바로 입구 가까이에 내려서자 병사들은 물론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도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흑의 여인의 얼굴도 보였다. 짙은 눈썹에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봉목(鳳目), 반듯한 코와 살굿빛 입술을 지닌 절세가인이었다.

    그녀도 한립의 얼굴을 확인하고 묘한 표정을 지었고, 자삼 소녀도 한립을 본 순간 반가운 기색이 스쳤다 사라졌다.

    “호오, 처음 보는 분 같습니다. 혹시 최근 합체기에 이르렀다는 한립 수사가 아니십니까?”

    금포 중년인이 한립의 수행을 훑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수사께서는…….”

    한립도 상대가 합체 초기 수사라는 것을 알고 포권을 했다.

    “허허, 저는 현무성(玄武城) 부성주 팽궐이라 합니다! 이번 대회에서 인족  수사들을 관리하고 있지요. 인족에 새로운 합체기 수사가 탄생했으니 경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합체기에 이른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이 부족합니다. 앞으로 팽 성주께서 많은 가르침을 주십시오.”

    팽궐의 호의적인 태도에 한립도 겸손히 답했다.

    “수사께서 겨우 수백 년 만에 화신기에서 합체기에 이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자질이라면 앞길이 창창할 텐데 저 같은 늙다리에게 가르침이라니요!”

    “하하, 아닙니다. 그런데 이쪽 선자 분은…….”

    한립은 고개를 돌려 흑의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놀랍게도 아주 정순한 법력을 지닌 합체 후기의 성계 수사였다.

    “본 궁은 소관이라 합니다. 한 수사께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군요.”

    “흑봉왕(黑鳳王)!”

    어느 정도 예측은 하고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안색이 달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 수사께서도 저를 아시는군요. 본 족의 소홍이라는 아이가 수사를 꽤 귀찮게 해드렸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당시의 일은…….”

    한립이 미간을 좁히며 무어라 말하려는데 흑의 여인이 손을 저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소홍 그 아이는 독단적으로 엽 가의 천봉진혈을 노린 벌로 이미 흑봉궁(黑鳳宮)에서 천 년 간 면벽 수련을 하고 있으니까요. 당시 한 수사께서 말려주셨으니 다행이지 저희 흑봉족과 엽 가의 사이가 그 일로 틀어질 뻔했습니다. 수사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엽 가의 태상장로와 제가 오랜 벗입니다.”

    “소 수사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저도 더는 그 일을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상대의 말에 진위는 알 수 없었으나 한립은 빙긋 웃으며 답했다.

    곁에서 듣고 있던 팽궐은 한립과 흑봉족 간의 은원(恩怨)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일이 잘 풀리자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경매가 곧 시작될 예정이니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두 분이 먼저 들어가 계시면 저는 다른 수사들을 마저 모시고 들어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대아야, 들어가자꾸나.”

    흑의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삼 소녀를 불러들여 시녀들과 함께 걸어갔다.

    ‘대아?’

    흑의 여인의 말에 한립은 움찔하며 자삼 소녀를 살폈다. 그러나 소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그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흑의 여인을 따라 걸어갔다. 한립은 소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떼지 못했다.

    ‘대아라면, 소홍이 데리고 떠난 그 여자아이가 아닌가!’

    화신 초기 흑봉족 수사인 소홍이 직접 인족 영토에 잠입해 데려간 것을 보면 인요족 혼혈인 대아는 대단한 출신내력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보면 대아가 흑봉왕 곁에 머무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지만 겨우 몇 백 년 사이에 허약하던 범인이 화신 초기 수사가 되어 나타난 것은 더욱 신기한 일이었다.

    아무리 흑봉혈맥과 관련이 있다하더라도 이렇게 빠른 수련 속도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때와 닮은 구석이 한 군데도 없었고 그에게 아는 척을 하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팽궐은 한립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자리를 뜨지 않자 왜 그러나 싶었지만 미소를 머금고 조용히 기다렸다.

    “팽 형, 대아라는 수사도 흑봉족인가 봅니다. 소 수사와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허허, 제가 알기로 대아는 소 수사의 직계 후인입니다! 젊은 요족 수사들 사이에서는 명성이 자자하지요. 자질이 굉장히 뛰어나고 실제 얼굴은 가히 절색이라 대외적으로 ‘봉령 선자’라 불린다고 들었습니다. 수많은 요족 젊은이들이 그녀를 흠모해 구애를 한다고도 하고요.”

    “실제 얼굴이라면…….”

    “한 수사께서 눈치채지 못 하실 만합니다. 현재 대아의 얼굴은 소 수사가 자신의 본명 진령(眞翎)으로 만들어낸 것이니까요. 흑봉 수사의 말에 따르면 만보대회에서 귀찮은 일이 생길까봐 그리했다고 합니다. 어찌, 한 수사께서도 봉령 선자에게 관심이 가시는 것입니까? 듣자니 대아 그 아이도 완전한 요족이 아니라 인요족 혼혈이라더군요.”

    “하하, 그럴 리가요. 그저 기질이 남다른 것 같아 물어본 것뿐입니다. 그럼 저도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한립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시녀가 나와 한립 일행을 안내했고 그들은 기나긴 회랑을 지나 관중석이 마련된 거대한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원형 무대 위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지만 구석구석에 희미하게 영기의 빛이 반짝이고 그 안에 기다란 은색 비검이 떠있었다. 그리고 무대 밑은 금색 갑옷을 걸친 병사들이 은색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서있었다.

    “…….”

    명청령안으로 네 개의 비검과 8명의 금갑 병사를 본 한립은 눈을 가늘게 떴다. 비검은 서로 기운이 연결된 영보급 보물로 보였고, 8명의 병사들은 법력 파동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주위의 검은 기운만으로도 위압감이 대단했다.

    한립은 가장 고층인 3층의 독실로 안내를 받았다. 크기는 작았지만 탁자와 의자 그리고 영기를 내뿜은 화분까지 섬세하게 준비되어 있었고, 네모난 창이 달려 있었다.

    창문에는 하얀 안개가 어려 있어 바깥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선배님, 귀빈실이 마음에 드시는지요? 만족스럽지 않으시면 다른 곳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길을 안내한 시녀가 공손히 물었다.

    “되었다. 이곳으로 하겠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분부가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담담한 한립의 대답에 시녀가 고개를 조아리고 물러났다.

    한립은 창가에 앉아 탁자 위에 놓인 경매용 진법 법기를 확인했고, 해대소와 기령자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방 구석구석을 살피며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립도 창밖을 보니 거대한 대전 안이 수만 명의 인요족 수사들로 가득 차있었다. 1, 2층을 채운 수사들은 대부분이 화신기나 연허기 수사들이었고 한립과 같은 합체기 노괴들은 귀빈실로 안내를 받아 자리를 잡았다.

    한립은 오래지 않아 두 눈을 감았고 해대소와 기령자는 얌전히 그의 뒤에 서서 대기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웅성거리던 소리가 갑자기 뚝 그치고 한립도 조용히 눈을 떴다.

    이제 무대 위에는 색다른 모습을 지닌 두 사내가 서있었다.

    하나는 전신에 검은 빛이 흐르는 거한으로 얼굴을 뒤덮은 구불구불한 수염 때문에 정확한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옆의 사내는 거한보다 한 뼘은 더 컸고 뺨에는 빛나는 비늘이 돋아 있어 화형기의 요족으로 보였다.

    한립이 그들을 살피고 있을 때 검은 기운 속에서 거한이 입을 열었다.

    “여기 모인 수사들은 대부분 패황과 이화 수사를 알 테니, 소개는 건너뛰고 바로 만보대회의 개최를 선포하겠습니다.”

    검은 기운 속 거한은 현무패황이었고, 그 옆의 요족 수사는 이화교왕이었다.

    수사들은 의외의 인물들이 등장하자 웅성거렸지만 그들이 내려가고 하얀 장포를 걸친 은발 노인이 올라오자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그 뒤로 청수한 얼굴을 지닌 아이들이 금색 천으로 덮인 쟁반을 들고 연이어 따라 나왔다.

    “노부 천안자가 이번 경매의 진행을 맡게 되었습니다. 모쪼록 수사분들의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노인은 대중을 향해 포권을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천안 수사께서 진행을 해주신다면 저희야 안심이지요!”

    “맞는 말씀입니다! 천안 도형의 안목은 인요양족에 유명하니까요.”

    꽤 많은 수사들이 호응하는 것이 천안자라는 노인이 꽤 명성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모두 바쁜 와중에 자리해 주셨으니 바로 경매로 들어가지요! 아이야, 첫 번째 물품을 가져 오거라!”

    천안자의 말에 무대 뒤편에 한 줄로 서 있던 사내아이 하나가 쟁반을 들고나왔다. 노인이 금색 천을 벗기자 쟁반 위의 은색 수정이 공개되었다. 광석에 문양이 새겨져 있는 아름다운 수정이었다.

    “금속 속성 보물을 제련하는데 제격인 ‘은사정(銀絲晶)’입니다. 인족 극동(極東) 지역의 백벽협곡에서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연간 생산량이 눈앞의 은사정 절반밖에 되지 않습니다.

    비검류 보물에 약간만 첨가해도 공격력이 세지고 이것을 제련하면 영보급 보물도 만들 수 있습니다. 최저가 영석 3백 만 개에 10만 단위로 가격을 올리실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천안자는 쟁반 위 보물을 간단히 소개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은사정은 합체기 수사들의 눈에 들 물건은 아니었지만 화신기나 연허기 수사들에게는 충분히 매력적인 재료였다.

    “4백만!”

    “4백오십!”

    “5백만.”

    잇달아 가격이 올라가고 무대 위의 빛의 장막에 숫자가 계속 바뀌어갔다. 그러나 결국 전신에 검은 털이 난 요족인이 730만이라는 높은 가격에 낙찰을 받아 인족 수사들을 울적하게 만들었다.

    요족 수사들은 보통 연기술에 능하지 않아 이렇게 높은 가격에 은사정을 낙찰받아 갈 거라 예상치 못한 것이다.

    경매 초반에는 연달아 연기 재료들이 출품되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대전에 모인 수사들의 안색이 달라졌다. 은사정을 낙찰해간 흑모(黑毛) 요족인이 일곱 번째 물품까지 전부 고가에 사들였기 때문이다.

    흑모 요족인은 노랑 흑풍위로 온몸을 가리고 있었지만 화신기 존재들은 몰라도 한립과 같은 합체기 수사가 그의 얼굴을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흑랑요(黑狼妖)! 이제 막 연허 초기에 이른 것 같은데 씀씀이가 대범하구나. 흑랑족에서 특수한 신분을 지닌 자일지도.”

    한립은 눈에서 남색빛을 거두고 중얼거렸다. 이때 새로운 물품으로 마치 화염을 엮어 짠 것 같은 새빨간 천이 등장했다.

    “저건 정염사(晶炎絲)가 아닌가? 저런 귀한 실로 천을 짜다니.”

    “사치스러운 일이로다.”

    “허허, 대단합니다.”

    새빨간 천의 등장에 아래층이 떠들썩했고 많은 이들이 숨길 수 없는 욕망을 드러냈다.

    “스승님, 정염사가 어떤 물건이기에 다들 저리 원하는 것입니까?”

    그것을 본 해대소가 궁금한지 물었다.

    “정염사는 우리 인족에서 생산되는 재료가 아니라 요족 흑봉족의 고유 재료이다. 용암에서 서식하는 화충(火蟲)이 평생 단 한번 실을 내뿜는데 그 용암을 흑봉족이 관리하기 때문이지. 정염사로 불 속성 법기를 제련해 같은 계열의 공법을 수련하는 수사가 지니고 다니면 수련 속도를 높일 수 있다. 또한 이것으로 제련한 보물은 불 속성 공법을 증폭해 주니 다들 저리 탐을 내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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