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6화. 은영근(隱靈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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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만보대회 개최일이 다가왔다. 한립은 거처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다가 무언가를 감지하고 만검도를 회수한 다음 밀실을 나섰다.
해대소와 기령자가 공손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해대소는 예를 올리며 소매 속에서 금빛 초청장을 꺼내 건넸다.
“한 선배님, 만보대회 초청장입니다. 이것을 지니고 있으면 각종 경매회에 참석할 수 있고 만보대회 회장 어느 곳이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고 합니다. 첫날에는 비선봉에서 성대한 경매회가 열리는데 관례에 따르면 만보대회에서 가장 중요한 경매로 각종 거대 세력과 개인들이 귀한 보물을 내놓는다고 합니다.”
“만보대회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구나. 며칠간 그냥 놀러 다닌 것만은 아니었어.”
한립은 미소를 지으며 금색 초청장을 받아 살폈다. 앞면에는 간단히 고대 문자로 ‘만보(万寶)’라는 두 자가 적혀 있었고 반대쪽에는 웅장한 필체로 은색 도안이 그려져 있었다.
“내가 폐관에 들어가 있는 동안 칠요왕들은 모두 도착했더냐?”
“칠요왕 중에 천규랑왕과 천호왕을 제외한 다섯 분이 도착하셨습니다.”
해대소가 얼른 대답했다.
“랑왕과 호왕이 아직 이라고? 이상한 일이구나. 칠요왕들도 만보대회를 중시하는 편이라 빠짐없이 참석한다고 하던데.”
“제가 주워들은 바로는 천규랑왕은 강력한 신통을 익히느라 만보대회에 참석하지 못하였고 천호왕은 아예 천호령(天狐領) 내에 없는 듯합니다. 수하를 시켜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하겠다는 소식만 전달했다고 하니까요.”
기령자가 이 일에 대해 소문을 들었는지 재빨리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움직이자꾸나! 만보대회에 수많은 활동이 있다지만 내가 관심이 가는 것은 몇 개 되지 않으니, 첫 번째 경매회는 당연히 놓칠 수 없겠지. 너희도 나를 따라 구경이나 하거라. 초청장이 있으면 문하의 수사 몇을 동행하는 것은 문제없을 것이다.”
“문하의 제자요? 그럼 저희를 제자로 받아 주신다는 뜻이십니까!”
그의 말을 듣자마자 멍해진 기령자와 해대소가 감격한 어조로 소리쳤다.
“너희 수행이 너무 낮지만 원한다면 기명제자로 받아주겠다. 언제든 화신기에 이르면 정식제자로 인정해줄 테니 앞으로 실망시키는 일 없이 수련에 매진하거라.”
한립이 고개를 저으며 진지하게 당부했다.
“기명 제자가 어딥니까! 스승님 절 받으십시오!”
기령자가 주저하지 않고 머리를 조아리며 세 번 절을 하였고 해대소도 들뜬 기색으로 얼른 무릎을 꿇고 사제지간의 예를 올렸다. 진심 어린 그들의 인사에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고 소매를 저어 기령자와 해대소를 일으켰다.
“너희도 내 출신에 대해 어느 정도 알 것이다. 하계에서도 두 명의 제자를 거두어 너희에게 사형과 사저가 있다. 그러나 일심으로 수행을 쌓는 것에만 매진하는 내가 아무 이유도 없이 그들을 거두었을 리 없겠지? 너희도 마찬가지다. 이후 괜한 의심으로 전전긍긍하는 일이 없도록 간단히 그 이유를 설명해 주겠다.”
한립의 마지막 말에 대전이 싸늘해졌다. 수행이 낮은 해대소와 기령자는 온몸에 한기가 들어 ‘아닙니다.’ ‘저희가 감히 그럴 리가요.’ 등의 말을 해댔다.
“하하, 사람 마음인데 의심하지 못할 것도 없지. 내가 축기기 때 나를 제자로 거두겠다는 합체기 수사를 만났다면 가슴이 철렁했을 것이다.”
한립이 웃으며 표정을 풀자 해대소와 기령자가 어색하게 시선을 마주치고는 더 이상 변명하지 않았다.
“솔직히 너희가 정말 평범한 축기기 수사와 연체사였다면 기명제자로도 거두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첫째, 인연이 닿아서이다. 얼마간 살펴보니 성품도 나쁘지 않고 말이지! 하지만 더욱 중요한 이유는 해대소는 은영근(隱靈根)을 타고났고 기령자는 체내에 전승기물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은영근!”
“전승기물이요?”
해대소와 기령자는 그저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웬만한 고계수사들도 보기 힘든 은영근과 전승기물에 대해 그들이 알 턱이 없었다.
“기령자의 전승기물은 아주 단순하다. 제대로 된 무해관의 공법과 비술을 품고 있는 법기로 네가 일정 경지에 이르면 봉인이 풀리도록 되어있지. 때가되면 그 안에 담긴 공법과 비술을 익힐 수 있을 뿐 아니라 전승기물 자체도 보기 드문 보물이라 공법과 상성이 잘 맞을 것이다.”
“어떤지 예전부터 몸이 찜찜하다 했습니다. 가끔 이상한 꿈을 꾸기도 하고요!”
눈을 부릅뜬 기령자가 놀라 중얼거렸고 한립이 슬쩍 웃고 말을 이었다.
“네가 큰 복을 안고 타고난 셈이다. 무해관의 명성은 드높지 않지만 내 보기에 관련 신통과 비술에 담긴 이치는 깊은 편이었다. 주법으로 따로 무언가를 전수할 필요 없이 간단한 지도만 해주면 되겠지.
네가 공법을 대성해 무해관의 진정한 관주로 명성을 드높이더라도 나는 일절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너를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도 수련에 방해를 받지 않는 선에서 약간의 지도만 해주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자질이 뛰어나도 거두지 않았겠지. 물론 수련을 위한 자원은 아낌없이 베풀 것이다. 이에 대해 불만이 있다면 나를 사부로 모시지 않아도 된다.”
“그럴 리가요! 선배님 문하의 기명 제자로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천하에 다시없을 행운입니다. 어떤 공법을 익힐지는 전부 선배님의 명에 따를 것이고 절대 원망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기령자가 고개를 조아리며 큰 소리로 답했다.
“네가 받아들일 수 있다면 되었다. 그럼 해대소는…….”
“스승님 저는 ‘해월천’이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해대소는 친우들이 장난삼아 부르는 호칭인데 어찌 스승님께 그리 불릴 수 있겠습니까.”
한립이 고개를 돌리자 해대소가 오랜만에 듬직한 어투로 말했다.
“네 본명이 해월천이었구나. 좋다 앞으로 월천이라 부르마.”
“예, 스승님.”
“너와 기령자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처음 보았을 때는 정확한 상태를 몰랐지만 요 며칠 동급 수사들에게 의견을 구한 결과 네가 용금체(熔金體)를 타고난 데다 체내에 은영근(隱靈根)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은뇌영근(隱雷靈根)이라고 불러야 더욱 정확할 것이다.”
“은뇌영근!”
해대소는 입으로 되뇌면서도 어딘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희귀한 체질이지만 수많은 인족 중에서 일정 확률로 용금체를 지닌 아이가 태어나고는 한다. 너는 그 때문에 연체술을 그렇게 빨리 익힐 수 있었던 게지. 다만 은영근이 설명하기 까다로운 것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영근을 지녔다는 자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은영근을 타고 나도 발견하는 자체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지.”
“어째서 그렇습니까?”
“이런 영근은 원래 특수한 체질과 특수한 혈맥을 이어받은 사람에게서만 나타나고, 바로 그 특수한 체질과 혈맥의 힘 때문에 은영근이라는 사실이 가려지곤 했다.
더욱이 은영근자로 밝혀져도 별 쓸모가 없어 평범한 수도종문에서는 제자로 거두지 않는 경우가 많았지. 타고난 체질이 아주 뛰어나거나 뇌영근이나 몇몇 희귀한 영근을 지녔을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런 경우에도 영근이 사라지는 시간이 너무 길면 수행을 쌓기가 어려워 양성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졌지. 은영근자는 영근이 나타나는 때에만 법력 수행이 가능하니 말이다.”
한립은 기명제자들에게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해대소는 자신이 지닌 영근에 대해 듣자 눈을 반짝였다.
“이제 은영근이 무엇인지 왜 수행을 쌓기 어려운지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은뇌영근 등 몇몇 은영근을 더 중시하는 까닭은 무엇인지요?”
“한 번에 요점을 짚어 내다니 총명하구나. 은암영근은 은뇌영근보다 더욱 희귀하고 기록에도 단 한 사람밖에는 적혀 있지 않으니 귀할 수밖에. 네가 지닌 은뇌영근은 일반 수사보다 수행을 쌓기는 어렵지만 뇌전의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다른 사람의 뇌겁을 도울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뇌겁을 대신 막아 줄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한립의 말에 기령자가 먼저 소리를 높였다. 수사인 그가 연체사 출신의 해대소보다는 그의 말뜻을 더 잘 알아들었다.
“그래! 일부 고계 수사나 수도종문에서 은뇌영근을 지닌 수사를 양성하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허나 고계 수사가 될 잠재력이 없다면 아무리 은암영근이나 은뇌영근을 지녔다고 해도 아무 쓸모가 없지.
내가 너를 거둔 것은 첫째로 체질과 영근이 내 법체쌍수공법을 전승하기에 걸맞기 때문이다. 영근이 사라졌을 때는 연체술을 익히면 되니까. 그럼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겠지. 둘째는 나 역시 뇌전에 관한 술법을 익혔으니 네게 전수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네가 정말 대성해 내가 겁을 치를 때 약간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내 생사(生死)가 갈릴지도 모르지.”
한립은 자신의 생각을 숨김없이 말해주었다.
“월천이 수행을 대성한다면 반드시 전력을 다해 스승님이 천겁을 치르시는 것을 도울 것입니다!”
해대소가 바로 한립에게 고개를 숙이고 엄숙하게 맹세했다.
“하하, 지금부터 그리 신경 쓸 것은 없다. 나도 만에 하나를 생각해 너를 양성하는 것이니까. 네가 천겁을 치르는 것을 도울 정도로 성장하려면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을 제자로 거둔 가장 큰 이유는 품성이 마음에 들고, 나와 인연이 닿아서이다. 네 녀석들에게 한동안 ‘한 형’으로 불렸으니 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지 않더냐.”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표정을 풀고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말에 해대소와 기령자는 한동안 헛웃음을 지었다.
“됐으니 이제 출발하자꾸나. 아직 만나보지 못한 동급 수사들의 얼굴도 익히고 이번 경매에는 이족인도 나타날 거라니 확인도 해봐야겠지. 어느 이족인이 멀리까지 왔는지 말이야.”
“예, 스승님!”
이렇게 그들은 영선궁을 빠져나왔다.
멀리 병사들이 무리를 이루어 저공을 순찰하고 있었고 누구든 함부로 영선궁에 접근하려하면 길을 막고 신분을 확인했다. 외부인에게도 구선산이 개방되었기 때문이었다.
한립은 푸른 기운을 일으켜 해대소와 기령자를 휘감은 다음 떠올랐다. 구선산에도 금공령(禁空令)이 내려져 있었지만 한립과 같은 합체기 수사들은 예외였다.
순찰을 도는 병사들도 영선궁에서 날아오른 그를 보고도 못 본 척했다.
한립 일행은 비선봉으로 날아가며 인산인해를 이룬 산맥을 내려다보았다. 인족과 요족 수사들이 넘쳐나서 산골짜기 구석구석까지 사람이 없는 곳이 없었다.
특히 건물들이 들어선 곳에는 수사들이 바글바글했고 아홉 개의 산봉우리 정상은 인파로 가득 찼다.
해대소와 기령자는 흥미진진하게 수사들을 구경했지만 한립은 별 감흥이 없었다.
일각이 흘러 눈앞에 험준한 거대 산봉우리가 등장했다. 구선산에서 가장 높은 비선봉이었다. 이곳에는 순찰을 도는 병사들도 더욱 많았고 간혹 남색 늑대를 탄 뇌위들도 섞여 있었다.
한립의 둔광이 가까워지자 몇몇 뇌위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선배님, 초청장을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대장으로 보이는 거구의 노인이 포권을 하고 예의 바르게 물었다.
휙!
한립은 상대를 훑으며 말없이 금빛 초청장을 쏘아 보냈다. 노인은 분명 연체사였는데 무슨 수를 쓴 것인지 초청장에 숨겨진 정보를 읽어내었다.
“한 선배님이셨군요. 경매회에 참가하시려는 것이면 제가 직접 만보대전(万寶大殿)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것도 좋겠지. 안내하거라!”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히 명을 내렸다. 노인은 부대의 나머지 연체사들에게 계속 순찰을 돌도록 명하고 자신은 늑대 영수를 돌려 산봉우리 쪽으로 날아갔다.
비선봉은 이름 그대로 산봉우리가 수직으로 서있어 법력이 없는 사람은 정상으로 올라갈 수 없었다. 그러니 범인이 그곳에 건물을 세우는 일은 불가능했다.
이에 흙 속성 법술에 정통한 수사들이 비선봉 절벽을 따라 오채색의 구름다리와 회랑을 연결해 만보대전이 있는 산 정상까지 길이 나있었다.
만보대전이 있는 산 정상은 구름 속에 전당들이 솟아 있고 언뜻언뜻 보이는 푸르른 녹음 속에서 물소리와 새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이 선경(仙境)이 따로 없었다. 비선봉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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