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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065화 (822/2,000)
  • 1065화. 초혼단과 열반성령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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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겁이 곧 도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립은 오늘을 기점으로 수련 계획을 뒤엎고 새로 짰다. 어떻게든 빨리 경지를 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전해 드릴 소식은 이게 전부입니다. 이제 남은 일은 어머니를 대신해 이모님과 한 선배님을 저희 엽 가의 태상객경장로 초청하는 일 뿐입니다.”

    한립과 류청이 새로운 소식에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소녀가 빙긋 웃으며 제안해왔다.

    “태상객경장로? 영아, 네 어미에게 듣지 못했더냐. 내가 영황의 휘하로 들어간 것은 당시 그 분에게 입은 은혜를 갚기 위해서였다. 이제 겨우 자유의 몸이 되었는데 다른 세력에 귀속될 마음은 전혀 없구나.”

    류청이 생각할 것도 없이 먼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물론 저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어머니께서 따로 전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도 이모님이 거절하신다면 절대 강요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하, 따로 전할 말이라? 오랫동안 못 보았는데 여전히 꾀가 많단 말이지.  어디 무슨 말인지 들어나 보자꾸나.”

    류청의 웃음에 엽영이 입술을 달싹여 전음을 보냈다. 한립은 옆에서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류청의 반응을 지켜보았는데, 젊은 부인의 뺨에 난데없이 옅은 홍조가 돌기 시작했다.

    “정말이더냐? 네 어미가 나를 속이는 것은 아니고?”

    줄곧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던 천령선자가 놀라 소리를 높였고 목소리도 약간 떨리고 있었다.

    “절대 거짓이 아닙니다. 어머니께서도 이모님이 그때의 일을 평생 마음속에 담아두시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약간의 위험이 따르는 일이기는 하지만 이모님께서 엽 가에 몸을 담아 주신다면 가문의 힘을 끌어 모아 도울 거라 하셨습니다.”

    엽영은 확신에 차서 답했다.

    “좋다, 엽 가의 태상객경장로가 되겠다. 어떤 위험이 따르더라도 일말의 기회라도 생긴다면 절대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류청의 얼굴이 어딘가 모르게 창백해 보였다.

    “이모님이 엽 가로 오신다니 정말 잘 되었습니다. 저도 이모님 곁에서 괴뢰술을 배울 수 있을 테고요.”

    류청은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었지만 아직도 전음으로 들은 내용 때문에 마음이 혼란스러운 듯했다.

    “한 선배님의 의향은 어떠십니까?”

    “비슷한 제안을 여러 곳에서 받았지만 한 번도 수락한 적이 없네. 이번에 엽 선자가 헛걸음을 한 것 같군.”

    엽영이 한립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 역시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바로 거절했다.

    “마겁에 대해 들으시고 생각이 바뀌시지는 않았을까 하여 여쭤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머니께서 선배님께 전하라고 하신 조건을 들어보시고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만일 그래도 마음이 변치 않으신다면 제안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오, 어떤 조건인지 들어보세.”

    소녀의 말에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홀로 영계로 승천해 거리낄 것이 없는 그를 어떤 조건으로 설득하려는지 궁금했다.

    “한 선배님께서는 저희 엽가의 초혼단(草魂丹)과 열반성령대법(涅槃聖靈大法)에 대해 들어보셨는지요?”

    “초혼단은 당연히 들어보았네. 인족에 몇 안 되는 합체기 수사의 법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단약이지. 그러나 엽 가에서 내놓지 않아 시장이나 경매회에서도 거래가 되는 것을 본 적은 없다. 다만 열반성령대법은 처음 들어보는군.”

    “아신다니 초혼단의 효과에 대해서는 따로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선배님께서 엽 가로 들어오신다면 어머니께서 바로 서른 알을 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많은 양이면 중기 고비를 넘을 때 꽤 도움이 되겠지요. 음……. 열반성령대법은 저희 엽 가의 천봉 진혈을 지닌 여인과 사내가 함께 익히면 기이한 효과를 볼 수 있는 술법입니다.

    수사 체내의 잠재력을 일깨워 점점 육신의 체질을 개선해 주고 극성에 이르면 불사의 몸에 이른다는 놀라운 술법이지요. 봉황이 불꽃으로 변해 열반했다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엽영이 왠지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라 설명을 마쳤다.

    불사의 몸에 이른다는 소리에 한립도 마음이 동했다. 범성진마공을 대성해 육신의 강도를 최상으로 끌어올리고 열반성령대법으로 불사체가 되면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말을 하는 소녀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했다. 류청이 엽영의 말을 듣다 그와 소녀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는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영아, 한 수사께서 엽 가에 들어가게 되면 열반대법을 함께 수련할 이가 바로 너로구나! 하긴 합체기 수사에게 일반 제자의 천봉 진혈은 부족함이 있겠지. 듣기로 이번 엽 가 제자들 중 진정으로 천봉 진혈을 계승한 이가 몇 안 된다고 하던데 너만큼 조건에 부합하는 여인이 없을 게야.”

    류청이 잠시 번뇌에서 벗어나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건……. 저도 모릅니다. 한 선배님께서 엽 가로 와주신다면 어머니께서 결정하실 일이니까요.”

    이제 소녀는 얼굴이 완전히 붉게 달아올라 말도 더듬었고, 류청의 얼굴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한립도 아둔한 사내는 아니었기에 열반성령대법이라는 것이 남녀가 같이 익히는 일종의 쌍수(雙修) 공법이라는 것을 알아 차렸다.

    부끄러워하는 소녀의 모습을 보아하니 그가 엽 가의 태상객경장로가 된다면 그와 같이 술법을 수련할 이는 분명 엽영일 것이다. 한립은 묘한 마음이 드는 것을 억누르고 고개를 저었다.

    “엽 가의 호의는 감사하나 이번 제안은 거절해야겠네. 구속을 싫어하는 성품이라 어느 세력에도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네.”

    그의 거절에 엽영은 한시름을 놓으면서도 희미하게 실망했다.

    “선배님께서 답을 주셨으니 태상객경장로 직에 대해 더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헌데 10년 후에 딱 한 번만 엽 가를 도와주는 조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10년 후라면 혹시 진령대전을 이르는 것인가?”

    소녀의 말에 한립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 설마 벌써……!”

    엽영도 영민한 소녀라 그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금방 깨달았다.

    “선자가 한 발 늦었군. 난 이미 곡 가의 효풍선자에게 진령대회에서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네.”

    “곡 가라니 다행입니다. 저희 엽 가와 우호적인 관계라 한 선배님께서 진령대회에 나오셔도 엽 가와 대적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한립이 미안한 기색으로 답하자 엽영이 긴장을 풀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도 안심일세.”

    이렇게 소녀가 전달할 말은 모두 끝이 났다. 한립은 천령선자의 거처에 오래 머물지 않고 곧 자리에서 일어났고 젊은 부인과 소녀가 그를 전송진까지 직접 배웅했다.

    그의 모습이 전송진에서 사라지고 류청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깝게 되었구나.”

    “이모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당연히 네 어미가 한 수사를 회유하는데 실패한 것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저렇게 젊은 나이에 합체 초기이니 이번 마겁에서만 살아남는다면 앞길이 창창하다고 할 수 있겠지.”

    의아하다는 엽영의 눈빛에 류청이 따뜻한 미소를 보였다.

    “합체기 수사가 인족에서는 최정상의 존재라지만 저희 조모께서도 합체 중기 수사시고 천봉 진혈을 발동하면 합체 후기와도 겨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이모님까지 엽 가에 들어오셨으니 금상첨화(錦上添花)지요. 한 선배님이 없어도 엽 가는 얼마 후의 진령대전과 이후의 마겁에서 무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면 다른 합체기 산수를 포섭할 기회가 또 올 테고요.”

    엽영도 내심 속상하긴 했지만 겉으로는 당차게 말했다.

    “그럴 지도 모르겠구나. 아마 네 어미가 한 수사를 중시하는 이유는 그저 앞으로의 잠재력을 높이 사서겠지. 하지만 내 눈에는 왠지 한 수사가 엽 가에서 제시하는 조건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으로 보였다. 특별한 무언가가 있을 지도 모르지. 꼭두각시 화신 상태가 아니라 직접 만나 볼 수 있었다면 비무를 해 상대의 진정한 실력을 알아볼 수도 있었을 텐데…….”

    “에이, 시험해 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모님의 실력에 이제 막 합체기에 이른 수사가 얼마나 버틸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천묘영황 대인께서 돌아가시기 전 공들여 제련한 꼭두각시들을 이모님께 주셨다는 소리를 어머니께 들었습니다. 이제 이모님은 삼황칠요왕과 맞먹는 신통을 지니신 거죠.”

    “엽 가가 모르는 소식이 없구나! 그 일에 대해 아는 자는 손에 꼽히는데 네 어미에게까지 이야기가 흘러들어가다니.”

    류청은 순간 안색이 달라지며 고개를 저었다.

    같은 시각, 거처로 돌아온 한립은 대전에서 기다리고 있던 해대소와 기령자에게 몇 마디 분부를 내리고 밀실로 들어가 가부좌를 틀었다.

    합체기에 이르러 점진적으로 법력을 쌓으려던 계획은 마겁의 임박으로 취소된 지 오래였다. 수백 년 수련 계획을 다시 세워 마겁이 도래하기 전에 어서 실력을 높여야 했다.

    지난번 마겁에서 삼황칠요왕 중 사망자가 다수 나왔으니 이번에는 얼마나 흉흉한 일이 벌어질 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더욱 찔리는 것은 인계에 있을 때 벌써 마계의 원살성조와 악연을 맺어 놓았다는 점이다. 한 줄기 의식으로 인계에 강림한 원살성조의 화신은 그 때문에 은월에게 잡아먹히고 말았다.

    마계의 성조는 인족의 대승기 수사와 맞먹는 거물이었다. 상대의 신통에 마겁이 도래해 마계와 영계가 겹쳐지면 수하를 풀어 자신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겁이 오기 전 최소한 합체 후기까지는 경지를 끌어올려 놓아야 했다. 그래야 다양한 신통과 보물을 이용해 고마성조에게 대항이라도 해볼 테니 말이다.

    그러나 최근 여러 합체기 수사들과 교류하다보니 이후의 수련이 얼마나 어려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일반적인 합체 수사들은 수천 년, 수 만 년 혹은 천겁에 목숨을 잃는 그날 까지 수련을 해도 중기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다행스럽게도 광한계에서 구한 선계 영약들을 이용해 대량의 합체급 단약을 제련하면 법력을 쌓는 고생은 훨씬 줄일 수 있을 것이었다.

    문제는 고비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아무리 체질을 개선하는 영약을 먹어도 정상적으로 합체기에 이른 다른 수사들에 비해 자질이 부족했다. 그러니 강제로 고비를 뚫을 방법을 최대한 많이 확보해야 했다.

    일단은 지금 보유한 허령단 한 알과 청원자에서 받을 명하신유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흠…….’

    한립이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영수환을 꺼내들었다. 그는 의식으로 안을 훑고는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검은 안개 속에 새까만 작은 원숭이가 쿨쿨 자고 있었다. 바로 제혼이었다.

    변신한 몸으로 천외마두를 격살한 이후 아직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보여준 놀라운 능력을 생각하면 강적을 만났을 때 큰 도움이 될 영수였다.

    다행히 마겁이 한참 남았으니 천년 내로는 깨어날 것이다. 그는 영수환을 회수하고 이번에는 금빛의 만검도를 꺼내 허공에 펴놓고 조용히 그림을 응시했다.

    검결에 관한 막대한 신통이 담겨 있어 이것에서 얻은 깨달음 일부를 청반검진에 접목시키는 것만으로 위력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었다. 만검도를 완전히 깨우치면 빠른 시간 내로 실력을 높일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제껏 만보대회 개최를 기다리며 상당히 많은 합체기 수사와 교류했으니 이제는 수련에 힘쓸 생각이었다. 대부분이 산수이거나 종문 세가에 속한 수사들이었으나 어차피 삼황이나 칠요왕 급의 수사를 만나려면 인연이 따라줘야 했다.

    특히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천규랑왕을 떠올릴 때면 은월이 생각나 마음이 아주 불편해졌다. 천규랑왕의 비(妃)로 응당 그의 곁에 있을 테니 어쩌면 만보대회에서 마주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인계에서 헤어지기 직전 그녀가 남겼던 눈빛을 떠올리면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도 어린 소년은 아니었으니 그녀의 눈빛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던 것이다.

    오랜 세월 그의 곁에서 머물며 생사고락을 함께 했으니 서로에게 특별한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겨우 원영기 수사라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합체기 신분으로 영계에 와있었다.

    한립은 일부러 은월에 대한 생각을 지워냈다. 괜히 마음의 안정을 방해해 심마가 될 것을 우려해서였다. 그는 감정을 다스리며 다시 평온한 마음으로 만검도를 보며 연구에 몰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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