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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064화 (821/2,000)
  • 1064화. 언질

    *

    한립도 해대소의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으나 내색하지 않으려 얼굴에 힘을 주었다.

    ‘정말 누가 주워왔는지…….’

    멀리 거대 거북이 경천동지할 괴성을 지르더니 사지와 머리를 등딱지에 감추었다. 이제 겉보기에는 검은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검은 성 상공을 날아다니던 뇌위들이 분분히 하강했고 흑갑 병사들이 품에서 영구를 꺼내 들고 검은 산봉우리 주변을 바삐 뛰어다녔다.

    우웅!

    잠시 후, 검은 산봉우리 주변에 진법 설치가 끝나 검은 안개가 자욱이 피어나 검은 성과 산봉우리를 감추어주었다. 바로 그때 또 다른 봉우리에서 용울음 소리 같은 것이 들리고 금빛이 솟아올라 검은 안개 위로 떠올랐다.

    금빛이 가시고 커다란 금색의 교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위로 미소 짓고 있는 사내는 바로 천원성황이었다.

    “이게 얼마만입니까? 현무 수사! 천원이 잠시 만남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흥, 누군가 했더니 익숙한 늙은이가 찾아왔군. 들어오고 싶으면 그냥 들어오면 될 일이지 왜 저리 말이 많은지. 들어오시지요. 겨우 이런 환전이 성황 대인의 행차를 막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뜻밖에도 검은 안개 속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거리낌 없는 말투로 답했다.

    “허허, 그럼 실례 좀 하겠습니다.”

    천원성황은 상대의 불손한 언사에도 전혀 화를 내지 않고 금색 교룡을 탄 채 검은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천원성황의 등장을 구경하고 있던 수사들도 각자의 거처로 돌아갔다.

    한립도 류청에게 포권을 하고 자리를 뜨려는데 여인이 빙긋 웃으며 예상 밖에 제안을 했다.

    “한 수사께서 괜찮으시다면 제 거처에서 잠시 담소나 나누심이 어떠십니까? 수사가 아실만한 이가 기다리고 있답니다.”

    “제가 알 만한 사람이요?”

    “그 아이는 제 오랜 벗의 여식이기도 합니다. 이곳에 오는 길에 우연히 만나 영선궁에 들였는데 누군지 궁금하시다면 같이 가보시지요.”

    “류 선자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누가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해지기는 하는군요. 그럼 잠시 선자께 폐를 끼치겠습니다.”

    한립은 재빨리 머리를 굴리고 동요 없이 답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저는 한 수사의 위층에 머물고 있으니 어디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입 꼬리를 슬쩍 끌어올리는 여인의 모습은 전혀 꼭두각시 같지 않았다. 인족 괴뢰술의 2인자라는 명성을 공으로 얻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게다가 천묘영황이 겁을 치르다 죽어 저절로 인족 괴뢰술 1인자가 되지 않아던가.

    “알겠습니다. 너희는 금제영패를 들고 먼저 거처로 돌아가 있거라.”

    한립은 은색 영패를 해대소와 기령자에게 던져주고 여인을 따라 먼저 영선궁으로 이동했다.

    일각 후, 영선궁 6층의 비취색 궁전에서 그는 열예닐곱 살의 눈에 익은 백의 소녀를 만났다.

    “엽 수사!”

    한립은 수려한 미모에 반짝이는 눈을 지닌 소녀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엽영이 한 선배님을 뵙습니다. 목족(木族) 영토에서 헤어지고 다시 만날 날을 고대했는데 벌써 합체기 선배님이 되어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백의 소녀가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며 후배로서 예를 올리려 했다.

    “나 역시 이곳에서 엽영 선자를 다시 볼 줄은 몰랐네.”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 무형의 기운으로 그녀가 허리 숙여 인사하는 것을 막고는 의식으로 그녀를 훑었다.

    엽 가 여인은 천봉 혈맥을 타고난 수사답게 수련 속도가 극히 빨랐다. 그녀도 어느새 연허기 고비를 뚫고 연허 초기의 수행을 지니고 있었다.

    당초 그가 손에 넣은 천봉 진혈은 원래 소녀의 것이었기에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어머니께서 류 선배님과 친분이 있으셔서, 이모님 덕에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영이 네 어미와 나는 친자매와 같은 사이가 아니더냐. 오랜만에 벗의 여식을 보아 나도 기분이 좋으니 그 정도 청은 당연히 들어주어야지.”

    곁에 선 류청이 소녀를 보며 자상하게 말했다.

    “허나 엽 선자가 류 수사에게 나를 데려와 달라 청한 이유가 그저 얼굴을 보고 인사를 나누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 같군.”

    “선배님이 이리 직접 물어보시는데 제가 어찌 시간을 끌고 용건을 숨기겠습니까.”

    엽영이 움찔하며 조금 망설이는 얼굴로 답했다.

    “영이 네가 한 수사와 따로 상의할 일이 있는 모양이니 나는 그만 자리를 비켜주마.”

    “잠시만요! 이모님과도 관련이 있는 일입니다.”

    류청이 분별 있게 먼저 자리를 비켜주려는데 엽영이 말렸다.

    “음? 나와도 관련이 있는 일이라니, 어서 말해 보거라.”

    “제가 두 선배님들을 찾아 이곳에 온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그 중 한 가지는 한 수사님과도 관계가 있지만 이모님에게 더욱 직접적인 도움이 될 소식이고요.”

    “내게 말이냐?”

    “예, 이모님께서는 영황 선배님이 명을 다하신후로 줄곧 폐관수련을 해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미 영황위를 쟁취하시기로 마음을 굳히신 것이겠지요.”

    엽영이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녀의 말에 류청은 안색이 달라졌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전대 영황 대인의 괴뢰술을 전수받았고 따로 강력한 꼭두각시 몇 마리를 제련하는데 성공해 다른 합체 후기 수사들과도 겨뤄볼만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운이 좋다면 영황위를 계승할 수 있을 테지.”

    여인은 조용조용 말했지만 꽤나 자신이 있어 보였다.

    “역시 그러셨군요. 허나 어머니께서 이모님께 꼭 전하라는 말이 있으셨습니다. 백년 후에 있을 영황위 쟁투에 절대 참가하지 말라는 말씀이셨죠. 지금 영황의 자리에 오른다면 복이 아니라 화를 부를 거라 하셨습니다.”

    “정말 그렇게 말했다고? 내 네 어미가 지략이 뛰어나고 미래를 예측하는데 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어찌 그리 확신한단 말이더냐. 아마 따로 들은 정보가 있는 것이겠지?”

    “과연 이모님은 남다르세요. 제가 아직 말씀을 다 드리지도 않았는데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을 하시는군요. 한 선배님, 앞으로 제가 알려드리는 정보에 대해서 잠시 비밀을 유지해 주실 수 있으세요?”

    머뭇거리던 엽영이 고개를 돌려 한립을 향해 물었다. 그녀의 신중한 태도에 한립도 고개를 끄덕였다.

    “수사에게 듣게 될 이야기를 쉬이 남에게 전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네.”

    그의 말에는 여지가 남아 있었지만 엽영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해했다.

    “두 번째로 드릴 말씀은 첫 번째 소식과 관련이 큽니다. 한 선배님은 몰라도 이모님은 들은 바가 있으시겠죠. 천년 내로 영계에 마겁이 도래할 거란 소식 말입니다.”

    “마겁!”

    두려운 표정으로 엽영이 털어놓은 정보에 류청은 아무렇지 않았지만 한립은 크게 놀랐다.

    류청처럼 합체기에 이른지 오래된 수사들은 주변에 지인도 많았고 소식을 얻는 통로도 다양했다. 하지만 인족으로 돌아온 지 겨우 몇 해밖에 되지 않았고 깊이 교류하는 동급 수사도 없는 한립은 마겁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겁에 관한 사항은 합체기 수사들끼리만 공유하는 비밀로 철통같은 보안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마(古魔)들이 쳐들어오기도 전에 인요족에 혼란이 야기 될까 우려해서였다.

    한립도 몇몇 경전을 통해 마겁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천 년 내로 닥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운도 없지. 천연성에 있을 때는 수만 년에 한 번 벌어지는 이종족 침공이 있더니 이번에는 마겁이란 말인가!’

    이제야 그가 합체기에 이르자마자 수많은 세력에서 유혹적인 조건을 내걸고 자신을 데려가려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엽 수사의 말은 영황위가 마겁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인가?”

    한립이 깊게 숨을 내쉬며 엽영을 바라보았다.

    “선배님 말씀대로입니다. 사실 이번에 누가 영황위를 계승하든 마겁에서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고 들었습니다. 이모님도 아시다시피 어머니께서는 예전에 막간리 선배님 문하의 기명제자셨고 나중에 일가의 가주가 되시고도 막 선배님을 스승의 예우를 다해 모셨지요. 그 인연으로 몇 해 전 막 선배님이 부상을 입은 채 엽 가로 와 어머니와 밤새 중요한 문제를 상의하고 조용히 떠나신 일이 있습니다.”

    엽영이 이번에는 류청 마저 놀라 숨을 들이킬 말을 늘어놓았다.

    “뭐라, 막간리 선배님이 부상을 당하셨다고? 그럴 리가! 역천의 신통을 지닌 선배님을 다치게 할 자가 영계에 있단 말이더냐? 설마…….”

    영민한 류청은 금방 무언가를 떠올린 듯했다. 한립도 인족의 대승기 수사인 막간리에대해 들은바가 있었기에 역시 안색이 급변했다.

    “몇 년 전, 막 선배님은 성반(聖盤)의 힘을 빌려 강제로 계면통로를 열고 마계로 진입하셨습니다. 마겁이 도래하기 전, 마족의 동정을 살피기 위함이었지요. 생각지 못하게 마계의 고마 성조 두 명에게 걸려 싸움에 휘말리셨고요. 신중한 분이시라 출발 전 요족의 노조(老祖)께 목숨을 부지할 만한 강력한 보물을 빌려 가신 덕에 약간의 부상만 입고 영계로 돌아오실 수 있었지만요.”

    “막 선배님이 마계에 직접 가셨다고? 이전 마겁 때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어찌 그러신 것이더냐.”

    소녀의 설명에 류청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저희 엽 가도 아는 바가 많지 않습니다만 추측컨대 다른 종족의 수사에게서 어떤 언질을 받으신 듯합니다. 이번 마겁은 이전과 달리 훨씬 더 버티기 어려울 것이고 인요족이 멸족을 당할 위기가 될지도 모른다고 하셨으니까요.

    막 선배님은 위험을 무릅쓰고 마계로 가 정보에 부합하는 조짐들을 발견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계로 돌아오자마자 엽 가를 찾아 약간의 천봉 진혈을 얻어가셨지요. 진혈을 이용해 마겁을 대비할 강력한 보물을 제련하시기 위해서요. 막 선배님과 같은 대승기 수사마저 근심할 정도라면 이번 마겁이 얼마나 흉흉할지 예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엽영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 들은 한립과 류청은 가슴이 철렁했다.

    “막 선배님께서 마계에서 무엇을 보고 오셨는지 말씀해 주시지는 않았는가?”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집안 어른들과만 상의를 하시고 제게는 자세한 사정은 설명해 주시지 않으셨어요.

    어쨌든 이번에 저를 보내신 것은 이모님을 비롯해 엽 가와 친분이 깊은 몇몇 선배님들에게 절대 백년 후의 영황위 쟁탈전에 참가하지 말라는 언질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아마 이번에 마계와 영계가 천령경(天靈境)의 경천통령수(擎天通靈樹) 인근에서 가장 먼저 접촉할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천령성이 마족의 최우선 공격 목표가 되겠지요.

    게다가 일단 마겁이 도래하면 삼황은 절대 황성을 버리고 달아나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막간리 선배님과 성도(聖島)의 인물들은 천령성을 마족들의 주의를 끌기위한 미끼로 사용할 거라 합니다. 경천통령수의 신묘한 역량과 천령성의 다양한 금제를 이용해 마족 대군의 힘을 최대한 빼놓겠다는 전략이지요.

    이렇게 되면 새로 부임하는 영황은 반드시 고마족과 최전방에서 싸워야 하고 천령성을 목숨을 걸고 지키며 퇴각할 수도 없게 됩니다. 얼마나 위험한 일이 될지는 제가 더 강조하지 않아도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엽영이 쓴웃음을 지었고 류청과 한립은 시선을 교환했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니! 그나마 막 선배님께서 마계에 직접 가셔서 정탐을 해주신 덕에 충분한 대비를 할 수 있겠어. 정말 어르신이 우리 인족을 위해 큰 공덕을 쌓으셨구나. 그럼 나도 방금 했던 말을 거두어들이마. 네가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면 영황위를 얻고 얼마 되지 않아 천령성에 뼈를 묻을 뻔했어.”

    어두운 얼굴로 고민하던 류청이 생각을 정리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한립도 내심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엽 가 수사들은 막 합체기에 이른 수사가 감히 영황의 자리를 엿보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천령선자만을 위해 이 소식을 전했을 것이다.

    엽영이 그도 이런 정보를 같이 들을 수 있게 한 것은 목족 원정에서 입은 은혜를 약간이나마 갚기 위해서였고 이참에 약간의 호의를 베풀어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심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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