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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063화 (820/2,000)
  • 1063화. 참령(驂靈)

    *

    한립이 찾으려는 호음한백산은 무척 거대해서 한백 신통을 대성하기만 하면 수만 리 내에서도 산을 감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인요족 구역 내에 이 산이 없을 수도 있었기에 정말 호음한백산을 찾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앞으로 닥쳐올 대천겁을 생각하면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백과아가 빙수한백의 체질을 지닌 것을 알고 주저 없이 그녀를 구한 것이다.

    대량의 단약을 지녀 다른 동급 수사들보다 백과아를 돕는 일이 쉽다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백여 년 수행을 지체해가며 낯선 여자아이를 구할 이유가 없었다.

    한백극산을 제련하는데 성공하면 그는 분신의 수행을 봉인해 인계로 보낼 방법을 찾을 생각이었다. 인계에서 두 곳에서나 북극원광의 흔적을 보았으니 북극원산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았다.

    ‘전부 순조롭게 성공한다면 마지막 극산을 제외하고 총 네 개의 극산을 모으게 된다.’

    그 긴 시간 동안 나머지 극산의 재료를 찾아 원합오극산을 제련할 수도 있고 아니면 대승기를 돌파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시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편전으로 향했다. 이틀간 기운을 북돋고 천원성황에게 가서 홍라선주를 빚는데 필요한 보조 재료를 받아올 생각이었다.

    흑역교환회에 참가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미리 홍라선주를 제련해 두는 것이 좋았다. 혹시 좋은 술을 목숨처럼 여기는 애주가라도 만나 높은 값에 물물교환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보물과 영약이 많긴 했지만 당장 거래할 때 쓸 만한 것이 많지 않았다. 귀한 만년영약들도 합체기 수사들에게는 이전처럼 진귀하지 않을 것이고 강력한 보물들은 그도 써야 해서 내놓을 수 없었다.

    * * *

    석양이 질 무렵, 해대소와 기령자가 잔뜩 상기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1층 전송진이 오른 것을 감지한 한립은 금제영패를 이용해 그들을 안으로 들였다.

    하고 싶은 말이 엄청 많은 얼굴이었지만 한립은 그들을 조용히 거처로 돌려보냈다.

    이틀 후, 한립은 홀로 또 다른 영선궁에 기거하는 천원성황을 찾아가 홍라선주를 빚기 위한 대량의 보조 재료들을 받아왔다. 아쉽게도 성황이 소개해 주기로 했던 흑봉왕(黑鳳王)과 이화교왕(离火蛟王)은 다른 일이 있어 구선산에 없을 때였다.

    아마 만보대회가 정식으로 개최하는 날 돌아올 듯싶었다.

    조금 아쉬웠지만 재료를 구한 한립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는 천원성황의 거처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얼른 영선궁으로 돌아와 밀실에서 상고경전을 참고해 대량의 홍라과로 홍라선주를 빚기 시작했다.

    그는 밀실에 들어간 후로 보름이 넘게 두문불출했다.

    그 많은 홍라과를 한 번에 다 쓸 수는 없었고, 천원성황에게 약속한 두 항아리를 제외하고 여덟 항아리 정도만 더 만들어두었다.

    아무리 영계에서 구할 수 없는 홍라선과라지만 한 번에 너무 많은 수량이 풀리면 그 가치가 떨어질 것이다.

    또한 홍라선주는 체질을 개선하고 수명을 늘리는 데 효과가 있어 그도 두고두고 즐길 생각이었다.

    한립은 홍라선주 제련을 마치고 남은 시간 동안 대전에서 가부좌를 틀고 수련하다 수시로 다른 동급 수사들을 찾아 접촉했다. 그중 두세 명은 꽤 말이 잘 통해 약간의 교분을 쌓기도 했다.

    특히 만골진인은 시종일관 그에게 호의적이었고 연허급 이상 수사들의 소규모 교류회에 그를 초대해 몇 가지 필요한 재료를 얻는데 도움을 주었다. 만골진인에 대한 인상이 날로 괜찮아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영선궁의 합체기 노괴들도 수가 늘어갔고 만보대회가 개최되기 한 달 전에는 대부분의 영선궁들이 가득 찼다.

    합체기 노괴들 중에는 거대 세력의 태상장로도 있었고 한 지역을 주름잡는 패왕 등도 있었지만 한립처럼 산수인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거물급 수사들은 천원성황을 제외하면 칠요왕 중 동천서왕(洞天鼠王) 만이 도착해 있었다. 이 서왕(鼠王)은 구선산에 도착한 이래 대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는 칠요왕 중 가장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 평소에도 본 모습을 감추고 다녀 그의 진면목을 보았다는 자가 손에 꼽혔다. 게다가 그가 어떤 신통을 지녔는지도 아는 이가 드물었다.

    그저 그에게 밉보인 고계 수사들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곤 했다는 것으로 보아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자임은 분명했다.

    동천서왕은 요족 중 영향력이 강한 경서족(瓊鼠族) 출신이었다. 요족은 인족과 달리 요왕이 되기 위해 본인의 실력뿐 아니라 배후 세력도 중요했다. 오직 실력을 기준으로 전승되는 삼황 자리와는 차이가 있었다.

    한립은 이 서왕이 궁금해 찾아가 보고 싶었지만 만남을 원치 않는데 연연할 마음은 없었다.

    남은 시간 동안 그는 합체기 수사들과 교류하며 해대소의 괴이하게 사라지는 영근을 연구했다. 수많은 경전을 뒤지고 해대소에게 약간의 피를 뽑게 해 살펴본 결과 두세 가지 정도로 가능성이 압축되었다.

    며칠만 더 관찰해보면 괴이한 영근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간 한립은 해대소와 기령자를 잘 보살펴주었고, 그가 간간이 수련 상의 문제점을 지적해 주어 수련에 큰 도움을 주었다.

    어느 날, 대전에서 해대소와 기령자에게 공법에 대해 몇 가지 설명해주다 갑자기 한립의 표정이 달라졌다.

    “선배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눈치 빠른 기령자가 물어왔다.

    “잠시 후면 너희도 알게 될 것이다.”

    쿠르릉.

    장장 일다경이 지나서야 대전 밖에서 희미하게 무슨 소리가 들려왔고 땅이 울리고 영선궁이 진동을 했다. 깜짝 놀란 해대소와 기령자가 대전 밖을 쳐다보는데 한립은 신중한 기색으로 자리를 지켰다.

    진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져 무언가 방대한 물체가 점점 영선궁 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한 선배님, 이건…….”

    “여기에 앉아있어 봐야 너희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으니 밖으로 나가 구경이나 하자꾸나.”

    참다못한 해대소가 입을 열자 한립이 짧게 한숨을 쉬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한립은 푸른 기운을 내뿜어 그들을 휘감고는 푸른 빛줄기로 변해 전송진으로 사라졌다.

    1층의 전송진에서 나타난 한립은 기령자와 해대소를 데리고 그대로 솟구쳐 산 정상에 올랐다. 영선궁의 금제로 인해 한층 미약하게 들리던 굉음이 크게 울려 하늘이 곧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헉! 땅이 살아 움직입니다.”

    멀리 구선산 산맥 가장자리에서 방대한 물체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기령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에 해대소도 놀라 눈을 부릅떴다.

    울퉁불퉁한 검은 땅이 그들이 있는 산봉우리를 향해 한 발자국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동은 검은 땅 밑에서 전해졌고, 울퉁불퉁한 육지는 가뭄이 든 것처럼 갈라져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한가운데에 검은 성이 우뚝 서 있었고 그 주위를 검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빼곡하게 포진해 있다는 것이었다. 흑갑 병사들은 창이나 도끼 등의 병장기를 들고 서늘한 표정으로 주위를 경계했다.

    그리고 성 위로는 천여 명의 병사들이 남색 거대 늑대를 타고 주위를 선회했다. 한립이 이미 만난 바 있는 뇌위였다.

    그는 더욱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고 눈동자 깊은 곳에서 남색빛을 번득였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순간 이상해졌다.

    “어느 수사께서 이곳에 계신지요?”

    “한 수사의 신통이 대단하십니다. 제 보잘 것 없는 재주로는 수사의 눈을 속일 수가 없군요. 그런데 저 패황이 타고 온 영수도 대단하지 않습니까? 십중팔구 전설 속의 참령(驂靈)과 연관이 있을 겁니다.”

    낯선 여인의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한립은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놀라는 중이었다. 강대한 그의 의식으로도 상대가 지척에 접근할 때까지 몰랐다는 것이 무척 의아했다.

    그가 몸을 돌리자 오색 궁장을 걸친 아름다운 젊은 부인이 있었다. 한립은 의식으로 그녀를 훑고는 눈썹을 끌어올렸다.

    “류청이 한 수사를 뵙습니다. 이미 알아보셨겠지만 본체가 아니라 꼭두각시 화신에 불과하지만요!”

    젊은 부인은 한립을 향해 예를 올리고 시원시원하게 정체를 밝혔다.

    “류청이라는 이름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전대 천묘영황 휘하에 가장 유능한 두 명의 수사가 있었다고 하지요. 한 명은 괴뢰술에 정통하고 다른 한 명은 환술에 능하다고요. 그중 괴뢰술에 능한 분을 천령선자라 칭하며 본명이 류청이라 알고 있습니다.”

    한립은 인사를 하며 그녀와 관련한 기억을 떠올렸다.

    “제 이름을 다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천년에 한 번 있는 만보대회에 직접 오고 싶었지만 최근 익히고 있는 비술 때문에 밀실에서 나설 수가 없어서 말이지요. 다행히 제 꼭두각시 화신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어 이곳을 지키는 수사가 알아보고 들여보내 주었답니다.”

    여인은 굉장히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천령선자는 천묘영황의 수하 중 하나로 원래 괴뢰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고 한다. 천묘영황의 휘하로 들어간 후 더욱 괴뢰술이 늘어 인족 괴뢰술의 2인자로 불릴 만큼 성장했다고 한다.

    물론 인족 괴뢰술의 1인자는 천묘영황 본인이었다. 오래전 천묘영황의 괴뢰술과 환술에 탄복해 합체기 신분이었던 천령선자와 또 다른 수사가 그의 곁에 머물게 된 것은 유명한 일화였다.

    한립은 꼭두각시 화신이 연허 후기의 실력을 지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천령선자께서 오신 줄도 모르고 제가 실례를 할 뻔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 말씀하신 ‘참령’은 현무성의 상고신구(上古神龜)를 일컫는 것입니까?”

    “예, 바로 진령 현무(玄武)의 혈맥을 계승한 바로 그 참령 말입니다. 예전에 운이 좋아 직접 볼 기회가 있었는데 얼마나 크기가 크던지 상상을 초월하더군요. 게다가 물과 흙 속성의 강력한 신통을 부리고 방어력이 워낙 막강해 평범한 통천령보로도 상처를 낼 수 없었습니다. 오늘 현무패황이 태고 온 거북은 아마 참령의 직계 혈통이지 않을까 합니다.”

    “참령의 직계 혈통이요?”

    류청이 가볍게 웃으며 답하자 멀리 보이는 거대 영수를 보고 한립의 입 꼬리가 꿈틀했다.

    “진정한 참령에 비하면 눈앞의 영수는 만분의 일도 되지 않을 겁니다.”

    “류 선자의 말씀을 들으니 참령이라는 거대 거북을 직접 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수사께서 참령을 직접 보시기는 어려우실 겁니다. 저도 영황을 따라 현무성에 머물며 우연히 한 번 본 게 전부니까요. 그때가 마침 3천 년에 한 번 참령이 해와 달의 정화(精華)를 삼키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었거든요. 평소 그 거대 거북은 몸을 흙속에 묻고 사지를 등딱지에 숨긴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답니다.”

    “그랬군요. 오늘 좋은 가르침을 얻어 갑니다.”

    한립이 아쉽다는 얼굴로 젊은 부인을 향해 포권을 했다. 곁에 있던 해대소와 기령자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신기한 소리에 넋을 잃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멀리 검은 대륙이 산봉우리에서 수십 리 떨어진 곳까지 와 드디어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때 대륙의 아래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솟아올라 음산한 눈빛으로 주변의 수사들을 훑어보았다.

    한립과 류청도 그 안에 속해 있었다.

    거대 짐승의 머리는 험악하게 생겨서 머리 위로 굽은 뿔이 열댓 개는 되었고 목에는 두꺼운 검은 비늘이 돋아 급소를 단단히 보호하고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에서는 음산한 입김이 불어나왔고 거대하고 뾰족한 이빨들이 가득 차 있어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대충 가늠해 보아도 평범한 수사 백여 명은 한입에 씹어 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령자는 거대한 영수의 흉악한 인상에 조금 겁을 먹었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해대소는 손가락을 들고 이리저리 휘저으며 자신의 몸과 대중을 해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기령자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대소, 지금 뭐하는 겐가?”

    “잠시 크기를 재보고 있었네! 내 몸이 큰지 아니면 저 괴물의 이빨이 큰지 말이야.”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충 답하는 해대소에 기령자는 어이없어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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