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062화 (819/2,000)
  • 1062화. 천호족 여인

    *

    한립은 노도사의 말을 들으며 조금 놀랐다. 인요족은 평소 상대편 수사를 납치해 강제로 시첩이나 쌍수를 위한 노정으로 삼는 것을 엄히 금했다. 오랜 세월 이런 규정을 언급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이런 일이 발각되면 큰 곤란에 처할 것이다.

    ‘흑역교환대회를 주최한다는 수사들의 담이 너무 크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다는 것은 평소에 보기 힘든 귀한 물건이 어둠의 경로를 통해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도 되었다. 게다가 지금 그가 가장 관심 있는 요수의 재료들도 나온다고 했으니 어쩌면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진인의 말씀을 들으니 확실히 관심이 갑니다. 교환회의 장소와 시간을 알 수 있겠습니까?”

    “흑역교환대회는 개최되는 장소도 아주 신비롭습니다. 고정된 장소가 아니라 스스로 이동이 가능한 수미공간(須彌空間)이거든요. 시간과 참가 방법은 때가 되면 다양한 방식으로 주최 측에서 알려옵니다. 제가 알기로 수사들마다 참가 방법이 다 다르다고 하더군요. 빈도는 여러 차례 교환회에 참석한 터라 먼저 소식을 접할 방법이 있으니 원한다면 수사를 데리고 함께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정말 감사드리겠습니다.”

    만골진인의 말에 한립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허허, 별말씀을요! 빈도가 아니라도 조만간 다른 수사에게서도 들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후 빈도가 아주 사소한 일로 수사에게 도움을 청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제가 도움이 될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하시지요.”

    그의 말에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 답했고 이후 그들은 더욱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시간이 흐르고 교류를 마친 만골진인은 특별히 아름다운 제자를 불러 한립에게 천마염무(天魔艶舞)라는 춤을 선보이게 한 후 친히 전송진까지 그를 배웅했다.

    한립이 전송진으로 사라지자 노도사는 웃음을 거두고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때 허공에 공간파동이 일고 낭창낭창한 몸매의 여인이 나타나 교태를 부리며 웃음을 흘렸다.

    “어떻습니까? 회유가 가능하겠습니까. 괜히 시간만 낭비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온몸이 훤히 비치는 얇은 면사를 입은 여인은 활짝 피어난 꽃처럼 아름다웠다. 그런데 그녀는 노도사가 품에 안고 있던 시첩과 상당히 닮아 있었다.

    그러나 여인은 눈빛과 움직임에서 사내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매혹적인 기운을 발산했다. 만골진인은 그녀의 말을 들고 몸을 돌렸다.

    “성공여부는 지금 판단할 수 없습니다. 저렇게 어린 나이에 합체기에 올랐다는 것은 절대 평범한 자는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공들이지 않고서는 회유할 길이 없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게다가 상대의 잠재력으로 보아 몇 백 년이 지나 또 한 번 경지가 올라간다면 다른 늙은이들 여럿을 끌어들이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몇 백 년 만에 합체 중기로요? 한 수사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이 아니십니까? 짧은 시간 안에 합체 초기에 이른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앞으로의 길은 더더욱 험난할 겁니다. 우리도 합체기에 이른지 수만 년 동안 겨우 초기 최고봉을 배회하고 있는데요.

    아무리 자질이 뛰어나도 수천 년은 있어야 중기에 이를 수 있을 겁니다. 만일 마겁(魔劫) 강림 전에 한 수사가 정말 중기에 이르고 본 선자를 비호해줄 용의가 있다면 당장 혼인이라도 치르고 싶을 정도입니다.”

    여인의 말 중 마겁이라는 말에 만골진인도 안색이 달라졌다.

    “지난번 마겁을 겪어본 우리만큼 고마족(古魔族)의 두려움을 잘 아는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인요족 합체기 산수들은 지난 번 마겁 중 대부분이 죽임을 당해 겨우 네다섯이 살아남았습니다. 거대 세력에 의탁한 합체기 수사들은 훨씬 많이 생존했고요.

    그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각자 흩어져 대항하다 고마족 고계 수사들에게 포위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이번만은 마겁이 도래하기 전에 더 많은 합체기 산수들을 모아 힘을 합쳐야 할 것입니다.”

    “그 말도 일리가 있지만 꼭 이렇게 공을 들여 산수들을 불러 모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만골 형은 백골문을 이끌고 삼황의 수하로 들어가고 저는 따로 방법을 찾아 요왕 중 하나에게 의탁하면 될 일인데요. 원래 큰 나무 아래 좋은 그늘이 있는 법이라지 않습니까.”

    요염한 여인이 입을 비죽이며 반박했다. 뜻밖에도 여인은 요족이었던 것이다.

    “흥, 산수로 오랜 세월 살아온 우리가 온갖 구속과 제약 속에서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게 가능했다면 수사는 천호족에서 뛰쳐나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저도 삼황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겠지요.

    게다가 지금까지 아무 도움도 주지 않다가 마겁이 임박해 찾아가면 누가 달갑게 여기겠습니까? 겉으로만 환대를 하다 전쟁이 벌어지면 희생양으로 삼을 지도 모릅니다. 그럴 바에야 홀로 싸우는 것만 못하지요.

    게다가 삼황칠지라 해서 안전한 것도 아닙니다. 지난번 마겁 때 요왕 셋과 인황(人皇) 하나가 전사한 것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요?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미리 대비하는 일입니다. 합체기 수사를 하나라도 더 끌어들여야 마겁에서 생존할 가능성이 높아질 테니까요.”

    “그렇다면 만보대회만큼 좋은 기회가 없겠네요. 산수들은 대부분 다른 수사들과 교류가 적은 편이니까요. 인족 수사들은 진인에게 맡길게요. 요족은 제가 설득해 보죠. 산수들 중에도 천 년 내로 반드시 마겁이 도래할 거란 정보를 접한 자는 많지 않을 거예요. 아, 흑랑(黑狼)과도 이야기를 해보았는데 관심이 있어 보였어요. 물론 완전히 설득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요.”

    요염한 여인은 노도사의 말에 어느 정도 설득을 당한 듯했다.

    “아주 잘 되었습니다. 천곤흑랑(天坤黑狼) 수사라면 천규랑왕(天奎狼王)과 요왕 자리를 놓고 하루밤낮을 싸우다 아쉽게 패배한 수사가 아닙니까. 실력으로는 평범한 산수와 비교할 수조차 없지요. 인족에서는 천음산(天陰山)의 천음 노조와 얼마간 교분이 있으니 만보대회에서 만나는 대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 둘만 순조롭게 회유해도 마겁에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겁니다.”

    기뻐하는 만골진인을 보고 여인이 빙긋 웃음 지었다. 그러자 요염한 기운이 몇 배로 강해져 음기로 양기를 보하는 채보술에 정통한 만골진인도 한순간 넋을 잃었다.

    “왜 그러십니까, 만골 형? 저와 쌍수의 도에 깊은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은 눈빛입니다. 정말 그럴 생각이 있으시다면 저도 진인을 거절할 마음은 없는데요?”

    여인은 만골진인의 표정에 미소가 짙어졌다. 그러자 순간 노도사의 가슴이 서늘해져 정신을 차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농담도 잘하십니다. 천호의 몸을 지닌 선자를 어찌 빈도가 함부로 건드리겠습니다. 제 나이가 적지 않지만 아직 몇 해는 더 살다 가고 싶습니다.”

    “그럼 아쉽게 되었네요! 수사께서 이 방면에 탁월하시다기에 깨달음을 나누려 했는데요. 이리 배짱이 없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여인의 말에 노도사는 더는 상대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시선을 회피한 채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화 선자의 만환현묘술(万幻玄妙術)이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아까 선자께서 제 시첩의 모습으로 분장한 것을 알고 있던 빈도조차 전혀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으니까요. 한 수사도 아마 눈치채지 못했을 것입니다. 천호족의 은닉술과 환술은 요족을 통틀어도 세 손가락에 꼽힐 겁니다.”

    “하! 만골 수사, 상대가 정말 아무 것도 모른 채 돌아갔다고 여기시는 겁니까?”

    “그게 무슨 뜻입니까?”

    “만골 수사가 모르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제가 시첩으로 분장하고 있는데 상대의 의식에서 기이한 파동이 느껴지더군요. 온전히 저를 향해 말입니다. 저도 따로 감응술을 펼치고 상대를 주시하고 있지 않았다면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을 겁니다. 한 수사의 의식은 정말 강대하더군요. 굳이 비교를 하자면 삼황이나 칠왕과도 맞먹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입니까!”

    만골 진인이 놀라 얼굴이 어두워졌다.

    “괜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리 젊은 나이에 합체기에 이른 데는 그만한 자질이 있어서겠지요. 강대한 의식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닙니다. 게다가 상대가 제 환술은 꿰뚫어 보았어도 천호족 비술을 이용해 봉인해 놓은 합체기 수행은 알아차리지 못했을 겁니다. 게다가 줄곧 별 다른 일을 벌이지 않았으니 자신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고요. 그렇지 않고서야 만골 수사와 그리 오래 환담을 나누다 떠났을 리 있겠습니까.”

    “선자의 말씀이 맞습니다. 나중에 이 일에 대해 물으면 대충 변명이라도 해둬야겠습니다.”

    노도사가 찬찬히 생각을 정리하며 얼굴을 풀었다.

    “사실 제 신분에 대해 안다고 해도 상관없잖아요? 떳떳하게 밝히죠, 뭐.”

    “…….”

    여인의 말에 노도사가 얼굴을 꿈틀거리고 입을 다물었다.

    사실 천호족의 화 선자는 일족에서 쫓겨난 천호족의 골칫거리였다. 수백 명의 ‘어리고 영준한’ 사내들의 양기를 흡수하고 달아나는 바람에 천호왕(天狐王)이 직접 그녀를 추살하러 뛰어다닌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살아 있었다.

    이는 노도사가 남들에게 그녀와의 친분을 밝히기 꺼려할 충분한 이유였다.

    “한 수사와 접촉을 해두었으니 빈도는 며칠간 폐관수련을 하려합니다. 최근 깨달음을 얻은 바가 있어 자세히 연구해보려고요. 이곳은 선자께서 지내시기 불편할 테니 그만 배웅을 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진인의 제자나 손자들에게 손길을 뻗을까 일부러 그렇게 말하시는 것 압니다. 이렇게 넓은 거처에 어디 제 한 몸 뉘일 곳이 없을까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진인께서 이번에 데려온 제자들 중에 자질이 썩 괜찮은 아이들이 몇 있더군요. 그중에 만골 수사께서 가장 아끼시는 손자도 있다지요? 만골 수사, 단단히 지키셔야겠습니다.”

    여인은 간드러지게 웃으며 홀연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다음 순간 그녀가 전송진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는데 다시 만골 진인의 시첩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에 안색이 창백해진 만골 진인은 서둘러 은색 영패를 꺼내 전송진에 비추었다.

    웅!

    전송진이 빛을 내뿜고 여인이 사라진 후에도 만골 진인은 쓴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 * *

    같은 시간, 자신의 거처로 돌아와 한립은 대전에 혼자 앉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만골진인은 무슨 생각인 걸까?’

    그저 친분이나 나누자는 말은 절대 믿을 수 없었다. 게다가 품에 안고 있던 시첩은 한립이 보기에도 퍽 고명한 환술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더욱 의심스러웠다.

    단지 상대가 악의를 품은 것 같지 않았기에 노도사와 이야기를 주고받다 거처로 돌아온 것이다. 상대가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또 흑역교환대회라는 곳도 한번 참석해 볼만 했다. 어차피 정식으로 개최되는 만보대회에서 큰 수확을 얻을 거라고 생각하고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다.

    절반쯤은 천연성에서 정체 모를 요족 여인과 한 약속 때문이었고 나머지는 동급 수사들과 친분을 쌓고 인족의 삼황과 요족의 칠왕이 어떤 인물들인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이전에 이종족에서 만났던 성계 존재들과 비교도 해보고 말이다.

    정말 요족 여인이 이곳에 나타나 필요한 요족 재료를 구해주고 흑역교환회라는 곳에서 쓸 만한 재료들을 건지면 두 번째 극산을 제련할 보조 재료들을 전부 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두 개의 극산으로 몸을 보호한다면 앞으로 몇 차례의 대천겁은 쉽게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세 번째 극산도 찾을 기회가 생겼으니 인내심을 가지고 새로 거둔 기명 제자가 한백 신통을 대성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원합오극산(元合五極山)중 하나가 극한의 성질을 지닌 호음한백산(昊陰寒魄山)이었기 때문이다.

    이 산을 이루는 호음석(昊陰石)은 현옥과 달리 평소에는 한기를 내뿜지 않다가 누군가 촉발해주어야 기이한 한백의 기운을 내뿜었다.

    보통 빙하 수만 장 아래 위치한 호음석은 인근의 한기에 가려져 의식으로는 찾을 수 없었고 유일하게 한백 신통을 익힌 수사만이 체내의 기운을 일으켜 호음석을 감응할 수 있었다.

    감응 범위는 호음석의 크기 그리고 한백 신통을 익힌 수사의 실력에 따라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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