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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061화 (818/2,000)

1061화. 만골진인(万骨眞人)

*

거한과 나머지 뇌위들이 거대 늑대를 타고 날아오르자마자 궁전 문 안쪽에서 두 명이 걸어 나왔다.

한 명은 방금 뛰어 들어간 청갑 병사였고, 나머지 한 명은 회색 장포를 걸친 얼굴이 하얀 노인이었다. 옅은 녹색 눈을 지닌 노인은 뜻밖에도 연허 중기 수사였다.

“한 선배님이시군요! 저는 종면이라 합니다. 선배님께서 오시는 줄도 모르고 먼저 맞이하지 못했으니 제 실책입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노인은 한립에게 다가와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종 수사는 일어나게. 먼 길을 오느라 조금 고단하니 어서 거처를 안배해 주었으면 좋겠군.”

한립은 상대를 훑고는 담담하게 명을 내렸다.

“영선궁은 항시 선배님들을 모실 준비를 해두었기에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10층은 만골 선배님께서 계시고 1층은 공용 공간이라 나머지 8개 층이 남아 있습니다. 어디로 모시면 좋을지요?”

“5층으로 하지. 높지도 낮지도 않은 것이 내가 머물기에 적절할 듯싶군.”

“예, 바로 모시겠습니다. 살펴보시고 만족스럽지 않으시면 다른 층으로 옮기셔도 됩니다.”

노인의 말에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영선궁 1층 대청으로 들어섰다. 대청은 네 벽에 주먹 크기의 야명주가 잔뜩 박혀있어 내부가 아름다운 빛으로 가득했다.

백옥으로 만든 탁자와 의자들을 제외하면 별다른 집기는 없었고 중앙의 은빛 전송진들이 여러 개 설치되어 있어 눈길을 끌었다.

노인이 먼저 전송진 하나에 올랐고 한립이 무표정하게 그 뒤를 따랐다. 해대소와 기령자도 시선을 마주치고 한립의 뒤를 바짝 쫓았다. 그들은 처음 전송진을 이용하는 것이었지만 겁먹은 눈치는 아니었다.

웅!

노인이 법결을 던져 넣자 전송진이 하얀빛을 머금고 진동했다. 이때 종면의 손에 정교하게 세공된 은색 영패가 들려있었다.

한립이 슬쩍 보니 복잡한 주술 문자들과 금색으로 ‘오(五)’ 자가 새겨져 있었다. 영패에서 빛이 뻗어 나가 전송진 속으로 스며들고 네 사람은 종적을 감추었다.

그들은 곧 어지럼증을 느끼며 어느 뜰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오솔길이 난 뜰 안에는 이름 모를 풀들이 가득했고 한쪽의 작은 연못 안을 오색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또 산들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그윽한 영기가 밀려들었다. 멍하니 서있던 해대소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쪽빛 하늘에 하얀 구름이 떠다니는 모습은 평범했지만 영계에 존재하는 몇 개의 태양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거대한 빛이 고공에 떠서 따사로운 햇살을 비출 뿐이었다.

해대소와 기령자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

“이곳의 하늘은 환술로 만들어낸 것이니 그리 볼 것 없다.”

한립의 목소리가 두 사람의 귓가에 울렸다. 그제야 화들짝 놀란 그들은 한립이 어느새 전송진에서 걸어 나와 그들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종면이라는 노인도 웃음기 어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해대소와 기령자는 얼굴이 조금 붉어진 채 민망한 얼굴로 전송진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 후로도 그들은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오솔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니 연두색 대전이 나타났다. 크지는 않지만 화려한 문양을 공들여 새겨 넣어 무척 아름다웠다.

대전 양측에는 뜰이 딸린 저택들과 작은 편전이 갖추어져 있었다. 아마 주변 건물들은 합체기 수사들이 데려오는 문하의 제자들을 위한 공간일 것이다.

푸른 대나무 숲속에 아름다운 건물들이 조화롭게 서있으니 경치가 그만이었다. 이런 선경(仙境)과 같은 공간이 궁전의 한 층에 불과하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영선궁의 모든 층이 이렇게 꾸며져 있는가?”

한립이 대전 주위를 둘러보며 노인을 향해 물었다.

“허허, 그럴 리가요. 영선궁의 각 층은 전부 다르게 꾸며져 있으니 선배님께서 이곳이 흡족하지 않으시다면 다른 곳으로 옮겨드리겠습니다.”

“아닐세, 그럭저럭 나쁘지 않아. 이곳에 머무는 것으로 하지.”

“그러시다면 금제영패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각 층의 금제가 다르고 금제영패를 하나씩 밖에 제련해 두지 않았으니 대회가 끝난 후에 돌려주시면 됩니다.”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두 손으로 은색 영패를 건넸다. 이에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영패를 받자 노인은 분별 있게 물러났다. 이제 그곳에는 한립과 해대소, 기령자만 남았다.

“대회가 개최되지 전까지 너희도 이곳에 머물면 된다. 원하는 곳을 골라 짐을 풀거라. 나도 쉬어야겠으니 내일 다시 이야기 하자꾸나.”

“예, 선배님!”

한립의 말에 해대소와 기령자는 신이 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뛰어갔다. 멀리서 재잘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들이 사라지자 한립은 전방의 대전 안으로 들어가 조용한 방을 찾아 가부좌를 틀었다. 이튿날 아침 가부좌를 하고 있던 한립이 눈을 번쩍 떴다.

휙!

다음 순간 하얀 불덩이가 괴이하게 나무로 만든 방문을 지나 그의 앞에 날아들었다.

한립이 두 손가락으로 화염을 건드리자 펑! 하고 터져 무수히 많은 불똥으로 변해 사라졌고, 동시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노부 만골, 한 수사를 뵙습니다. 수사께서 어제 영선궁에 들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노부의 거처에서 잠시 이야기나 나누시지요!”

노쇠한 목소리는 짧게 몇 마디 남기고 사라졌다.

“만골 진인!”

한립이 턱을 쓸어내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대전을 막 나서려는데 그곳에 해대소와 기령자가 서있었다.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구석에서 둘이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들은 한립을 보자마자 즉시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올렸다.

“일어나거라. 거처에서 쉬지 않고 여기서 뭐하는 것이냐?”

“한 선배님, 바깥 시장을 돌아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저희가 곁에서 선배님을 모시겠습니다.”

“저희가 대단한 일은 못 해도 간단한 심부름은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

기령자와 해대소가 눈을 반짝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하하, 내가 오늘 시장에 나간다고 누가 그러더냐?”

“그럼 오늘은…….”

해대소와 기령자가 조금 실망하며 중얼거렸다.

“너희 마음은 잘 안다. 이곳까지 왔으니 시장을 구경하며 견문을 넓히고 싶겠지! 하지만 그곳의 물건 중에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있을지 모르겠구나. 나는 지금 백골문의 만골진인을 뵈러 가야 하니 영패로 너희를 우선 내보내 주마. 구경하다 저녁쯤에 돌아오면 될 것이야.”

한립이 미소 지으며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그들은 조금 실망스럽기는 했지만 한립의 말에 거스를 수 없어 그러겠다고 답했다.

그들을 데리고 전송진으로 간 한립은 영패를 이용해 해대소와 기령자를 1층으로 보내주고 자신도 전송진에 올랐다. 영기의 빛이 반짝이고 그도 곧 사라졌다.

* * *

일다경 후, 한립은 붉은 산호를 깎아 만든 궁전 안에서 절색의 미녀를 껴안은 늙은 도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매부리코에 음흉한 눈빛을 지닌 노도사는 회색 장포에 하얀 백골이 18개나 새겨져 있었고,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여인은 매끄럽고 풍만한 몸을 얇은 하얀 면사로 가리고 있었다.

여인은 노도사의 품에 안겨 아양을 떨며 그와 한립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 노도사가 바로 이곳의 주인이자 백골문 창립조사 만골진인이었다.

품 속 여인이나 대전 양측에서 대기하는 여인들이나 명의상으로는 모두 시녀였지만 여인의 자태가 다른 시녀들을 압도하는 것으로 보아 노도사의 총애를 받는 것 같았다.

한립은 상대와 만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속으로 만골진인과 관련된 소문을 되뇌었다.

만골진인은 마도 공법을 수련하고 여색을 아주 밝히는데다 타인의 정기를 취해 기운을 보하는 채보술(采補術)을 익혀 매일 밤 여인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했다. 오늘 직접 만나보니 소문이 거짓은 아닌 듯 했다.

“허허, 이렇게 젊은 나이에 견문이 이리 넓으실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당초 노부가 합체 초기에 이렀을 때는 겨우 인족 주변이나 배회하다 돌아왔는데 말이지요. 이 나이가 되니 더더욱 멀리 떠돌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고 말입니다.”

노도사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저도 만골 형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어쩌다 보니 만황을 오래 떠돌게 된 것이지 제가 원해서 그리 된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나마 운이 좋아 대륙 절반을 돌아보고도 온전히 살아 돌아왔습니다.”

“허허허, 어찌 되었든 천운을 타고난 분입니다. 게다가 만황세계에서 여러 차례 기연을 얻어 연달아 고비를 넘기고 합체기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수만 년 내로 이렇게 빨리 합체기에 이르는 경우는 없을 겁니다. 저도 합체기 고비를 뚫느라 족히 수천 년을 허비했으니까요. 한 수사의 자질과 젊음이면 대승기도 머지않았겠습니다.”

노도사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은근슬쩍 한립의 기분을 맞춰주었다.

“어찌 벌써 대승기를 논하겠습니까. 앞으로 몇 차례 대천겁을 이겨낼 수만 있어도 다행이지요.”

한립은 노도사가 추켜세워도 여전히 겸손하게 답했다.

“그도 그렇습니다. 대승기는 우리 인족에게 하늘에 떠있는 달을 따는 것만큼 어려운 경지지요. 오랜 세월 영계에서 버텨왔지만 대승기 존재는 겨우 십여 명뿐이니까요. 심지어 대승기 존재가 없던 시기에는 인족 전체가 전멸할 뻔했습니다.”

만골진인이 옛일을 떠올리곤 안타깝게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한립도 답하지 않고 미소만 머금었다. 인족이 몇 차례 고난을 겪었던 일은 그도 대충 들어 알고 있었다.

여러 이종족이 연합해 쳐들어왔을 때도 있었고, 요족에서 우연히 두 명의 대승기 수사가 탄생해 인족을 아예 삼키려 든 적도 있었다.

“막 합체기에 이른 한 수사께서 만보대회에 참가한 것은 따로 구하는 물건이 있어서겠지요?”

만골진인이 표정을 달리하며 화제를 돌렸다.

“연단을 위한 재료를 찾고 있습니다. 만보대회는 평소에 구하기 어려운 재료들을 구할 수 있는 곳이니까요.”

한립은 굳이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빈도가 제안을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어떤 제안인지 들어보겠습니다.”

“너희는 물러가 있거라.”

만골진인은 곧바로 한립에게 답하지 않고 품속의 여인은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다른 시녀들을 전부 물렸다. 한립과 둘만 남자 노도사가 진지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처음 합체기 수사의 신분으로 만보대회에 참석한 것일 테니 한 수사께서는 흑역교환대회(黑域交換大會)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겠습니다.”

“흑역교환대회라! 처음 듣습니다. 혹시 암시장과 비슷한 곳입니까?”

한립은 눈을 반짝이면서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만보대회와 같은 대규모 대회에 몇몇 비공식 교역회가 없는 것이 더 이상했다.

“흐흐, 역시 바로 알아들으시는 군요. 우리 합체기 수사들이 원하는 물건은 구하기 쉽지가 않은 법이지요! 만보대회의 경매회가 아무리 대단해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영석으로 자신의 보물을 교환하고 싶지 않은 수사들도 있을 것이고, 정체를 몰라 정식으로 경매회에 올리지 못하는 보물을 지닌 수사들도 있을 텐데요.

혹은 너무 진귀한 보물이라 합체기 수사라 해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소문이 나면 큰 화를 입는 경우도 있지요. 그래서 언제부터인지 만보대회가 개최되는 동안 암암리에 흑역교환대회가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정체모를 수사들이 주최하는데 오직 합체기 수사들을 위한 교환대회라 만보대회에 참석하는 합체기 수사라면 참가하지 않는 분이 거의 없지요.”

노인이 잠시 한립의 표정을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주최 측 수사들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뿐 아니라 실력이 대단해서 일전에 교환대회에서 소란을 피우던 합체 중기 수사를 격살한 적도 있습니다. 그 후로는 흑역교환대회에서 소란을 피우는 수사들은 사라졌죠. 바로 흑역교환대회도 매우 안전하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은 물건으로만 교환하고 딱 하루 동안 이루어지는 데다 참가자의 신분을 일절 묻지 않습니다. 우리 합체기 수사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지요. 참석자 중에는 우리와 같은 합체기 외에도 귀한 보물을 지닌 다른 수사들도 있습니다. 당연히 평범한 보물은 거래가 되지 않고요.

요족 중에서도 많은 수사들이 참가해 공식적으로는 거래가 금지된 요족의 재료나 영수의 알 같은 것도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심지어 화형계 요족 여인들도 경매에 오르는데……. 크흠, 특히 절색의 천호족(天狐族) 여인들은 쌍수(雙修)를 하기에 안성맞춤이라 적잖은 인족 수사들이 탐을 내지요.

물론 그런 여인들을 낙찰받는 이들은 동부에 꽁꽁 숨겨두고 절대 티를 내지 않습니다. 칠요왕에게 알려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큰일이니까요. 물론 인족의 자색이 뛰어난 여인들도 거래가 되고 요족 수사들 중에 낙찰을 원하는 이가 꽤 많답니다.”

여기까지 들은 한립은 흑역교환대회가 인계 대진에서 벌어진 지하교역회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참가자가 합체기 수사들이고 경매에 오르는 물품이 훨씬 진귀하다는 것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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