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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060화 (817/2,000)
  • 1060화. 영선궁(迎仙宮)

    *

    노부인이 막 한립에게 무어라 하려는데 느닷없이 옆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한 선배님. 저희도 문하로 들여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놀란 노부인이 고개를 돌리니 옆에 서있던 해대소라는 연체사였다. 눈이 빠져라 한립을 응시하고 있는 해대소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기대감을 드러냈다.

    “하하하, 내 문하로 들어오고 싶다라!”

    그런 해대소를 보고 웃음을 터트린 한립은 바로 거절하지도 그렇다고 청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헤헤, 그럼 선배님 반쯤 허락해 주신 거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그 모습에 기령자도 담이 커져 웃음을 흘리며 끼어들었다. 어린 도사도 지금이 자신과 해대소에게 일생에 다시없을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합체기 수사의 문하에 들어간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었다.

    게다가 자신들이 한립과 훨씬 더 친하니 기회를 놓칠 수 없어 낯짝에 철판을 깔고서라도 시도를 해본 것이다.

    “나를 스승으로 모시는 일은 급하지 않으니 차차 이야기하고. 만보대회 기간 동안 나를 따라다니거라.”

    “선배님이 고려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다른 능력은 없어도 충심만은 가득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해대소가 실망한 기색 없이 오히려 신나하며 답했다.

    “저도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기령자도 한립을 향해 고개를 세 번 숙이고 웃음 가득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한립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었다 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과아 체내의 한독을 제거했으니 1년 내로는 발작하지 않을 걸세. 천천히 준비를 하고 있으면 만보대회가 끝나는 대로 데리러 오겠네. 그렇지, 이 염양옥(炎陽玉)을 아이가 항시 지니고 있게 하게. 한독을 없앨 수는 없어도 아이의 몸을 보호해주고, 위험에 처했을 때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네. 또한 이 양정단(養精丹)을 하루에 두 알씩 먹이고.”

    말을 마친 한립이 소매에서 붉은 옥패와 비취색 약병을 꺼내 탁자에 올려두었다.

    옥패는 굉장한 영기가 느껴졌고 양정단은 영계 수사라면 누구나 알만한 요상을 위한 귀한 성약(聖藥)이었다. 악화 부인이 과아를 대신해 연신 감사를 표하고 조심스럽게 물건을 챙겼다.

    해대소와 기령자는 한립이 기명 제자를 들이자마자 후하게 베푸는 것을 보고 티 나게 부러워했다. 그것을 본 한립은 내심 웃으며 약병을 두 개 더 꺼내 그들에게도 던져 주었다.

    “앞으로 내 문하에 들어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그간 동행을 하며 인연을 쌓았으니 이것을 주마. 근골을 튼튼하게 해주는 단약과 법력을 증진시켜주는 단약이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해대소와 기령자는 입이 찢어져라 자신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아직 정식 제자가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귀한 영단을 얻지 않았는가!

    한립은 이곳에 오래 남아 있지 않고 할 일을 마치자마자 해대소와 기령자를 데리고 떠났다. 세 명을 태운 비차가 천천히 구선산 방향으로 날아갔다.

    “한 선배님, 이제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어디 적당한 곳을 찾아 임시로 동부를 만들까요?”

    멀리 구선산을 보고 기령자가 물었다.

    “그럴 것 없다. 구선산이 외부인들을 금하고 있다지만 내가 들어가겠다면 자연히 환대할 것이니.”

    “하긴 한 선배님께서 평범한 수사들처럼 변두리에 거처를 마련하실 리 없지요!”

    “그렇지. 선배님께는 분명 웅장하고 화려한 거처가 배정되지 않겠어? 자네와 내가 선배님 덕에 견문을 넓히는구먼.”

    해대소와 기령자는 싱글벙글 웃으며 아첨을 해댔고, 한립은 그들이 일부러 그러는 것을 알았지만 피식 웃고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차가 구선산과 가까워지자 남색 운해가 그들의 앞길을 막아섰다. 최상급 비행법기를 타고 이동했기에 꽤 먼 거리를 금방 지나왔다.

    한립은 비차를 한 발로 지그시 밟아 멈춘 다음 두 손을 교차해 운해 쪽으로 펼쳤다.

    콰릉-!

    금색 뇌전 두 줄기가 튀어나가 운해 속으로 사라졌다.

    쾅! 쾅!

    남색 운해 속에서 폭음이 두 번 울리고 짙게 깔린 구름이 요동쳤다. 잠시 후 운해 속에서 괴이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한 사내가 허둥지둥 소리를 질렀다.

    “누가 감히 이곳의 금제를 공격하는 것인가! 석 달 전부터 이곳이 금지(禁地)로 지정된 것을 모르는가!”

    남색 운해가 둘로 갈라지고 커다란 통로가 열리더니 그 안에서 거대한 괴수를 탄 병사들이 나타났다.

    기골이 장대한 사내들이 상반신에는 하얀색 뼈 갑옷을 입고 하반신은 다채로운 색깔의 가죽 바지를 걸친 채 네모난 거대 뼈 방패와 검은 창을 들고 있었다.

    그들이 탄 괴수들은 커다란 날개가 달린 늑대로 전신의 털에서 뇌전이 번득여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신기한 것은 이곳을 지키는 수비병들의 법력 파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흔히 보기 어려운 결단기 수준의 고계 연체사들로 이루어진 병사들이었다.

    한립이 비차 위에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자 네 명의 병사들이 움찔했다. 그중에 가장 키가 큰 거한이 그를 보고 괴수를 운해 가장자리에 멈춰 세웠다.

    “너희가 현무경에서 명성이 자자하다는 뇌위(雷衛)들이겠구나! 역시 명불허전(名不虛傳)이로군. 헌데 뇌위들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패황 수사가 이미 구선산에 들었다는 뜻인가?”

    그의 대담한 어투에 병사들이 놀라 더는 거만하게 굴지 못했다. 선두에 선 거한이 정중한 태도로 포권을 하며 입을 열었다.

    “저희는 패황 대인의 뇌위들이 맞습니다만 대인께서는 아직 이곳에 도착하시지 않았습니다. 저희 부대가 먼저 구선산으로 와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지요. 실례가 안 된다면 선배님의 존성대명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하하, 내 이름을 들어보았을지 모르겠구나! 다만 지난번 패황께서 사람을 보내 패황궁(覇皇宮)으로 나를 청하신 적이 있다. 사정이 있어 거절했지만.”

    “예? 그럼 선배님께서 바로 얼마 전 합체기에 이르신 한립 선배님이시란 말입니까?”

    “호오, 나를 알더냐?”

    한립의 예상과 달리 거한은 그의 이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제야 한립은 거한을 살피며 상대의 몸에서 희미하게 보물의 광채를 감지했다. 쓸 만한 보물들을 몇 개나 지닌 것이 다른 연체사와는 격이 다른 듯했다.

    “제 조부께서 패황 대인의 측근 역사(力士) 중 한 분이십니다. 그분을 통해 선배님의 존함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의아하다는 듯 한립의 눈빛을 받은 거한이 서둘러 해명했다.

    “패황의 측근 역사! 나 역시 들어본 일이 있다. 최상급 연체사 출신들로 한명 한명이 육신의 강도는 최상급 보물에 맞먹고 하늘을 떠받칠 정도의 괴력을 자랑한다지.”

    “저희 조부님께서 약간 명성이 있으신 것은 사실이지만 어찌 선배님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먼 길 오시느라 피로하실 텐데 제가 어서 안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우선 영선궁(迎仙宮)으로 가셔서 잠시 휴식을 취하심이 어떨지요?”

    거한은 생긴 것은 우락부락했지만 꽤 세심한 구석이 있어 보였다. 그는 미소를 머금고 정중하게 물었다.

    “그 말을 들으니 어쩐지 피곤한 것 같기도 하구나. 안내하거라!”

    “예, 선배님!”

    네 명의 병사들이 공손히 예를 올리며 양옆으로 물러났고 한립이 비차를 끌고 당당하게 운해로 진입했다. 운해는 그리 깊지 않아 연체사 병사들의 안내를 받아 가다보니 곧 거대한 산봉우리가 나타났다.

    “구선산의 9개 산봉우리 중 8개는 저희와 요족이 각각 4개씩 관리하고 있습니다. 가장 높은 비선봉(飛仙峰)은 자유지대로 평소에는 두 종족 모두 병사를 주둔시키지 않지요. 이번 만보대회가 개최되는 장소가 바로 비선봉입니다.

    현재 인요족의 흙 속성 공법에 정통한 수사들이 차출되어 밤낮없이 비선봉을 단장 중이고요. 물론 산봉우리 하나에 수많은 양족 수사들을 전부 수용할 수 없기에 만보대회 기간 중에는 나머지 8개의 봉우리들도 개방하고 부속 회장(會場)을 열어 모두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때가 되면 구선산이 수사들로 넘쳐나겠지만요. 만보대회가 열릴 때마다 백만 명 이상의 수도자들이 모여 들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듣기로 이번 대회는 지난 만보대회들과는 조금 다를 거라 합니다.”

    거한은 한립을 안내하며 구선산과 만보대회의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어떻게 다르다는 것이지?”

    “우연히 접한 소식이라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잘못된 정보라 해도 나중에 저를 나무라지는 말아주십시오.”

    “걱정 말거라. 정보란 것이 원래 알아서 진위를 판단해야 하는 것이니.”

    한립이 머뭇거리는 상대를 훑고 담담히 말했다.

    “이번 만보대회에는 이족인이 참가해 이종족의 보물을 경매회에 내놓는다고 합니다.”

    “이족인? 설마 인근의 목족(木族)이나 영족(靈族) 아니면 만족(蠻族)이나 야차족(夜叉族)을 이르는 것인가?”

    “그건 저도 알지 못합니다. 평범한 뇌위가 알 수 있는 정보가 어디 많겠습니까.”

    “그도 그렇구나. 자, 이건 보원단(補元丹)이다. 가져가 며칠에 한 알씩 복용하면 너희의 수명을 늘려줄 것이야. 다른 유용한 소식을 알게 되거든 나를 찾아 오거라. 결코 섭섭지 않게 보상할 것이니.”

    “감사합니다, 선배님! 다른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선배님께 아뢰도록 하겠습니다.”

    거한은 ‘보원단’이란 소리를 듣고 희색이 만연해 약병을 받아 들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머지 세 병사들도 얼른 인사를 올리고 병을 받았다.

    그 후 한립은 손을 내저어 병사들을 물리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에 병사들은 눈치 있게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간 더 날아가 그들은 거대한 누각과 저택들이 연이어 세워져 있는 어떤 산봉우리 아래에 도착했다.

    그중에서도 백옥으로 만든 궁전은 총 10층으로 이뤄져 있어 웅장하기 그지없었고, 그 주위로 아름다운 누각들이 백여 개나 넘게 지어져 있었다.

    “이곳이 바로 영선궁입니다. 합체기 선배님들은 문하의 제자들을 데리고 한 층을 통째로 사용하실 수 있고, 각 층마다 전송진이 있어 아래층을 지나지 않고 바로 1층의 공용 대청으로 이동하실 수 있습니다.

    주위의 누각들은 원래 연허기 선배님들을 위해 준비된 곳이지만 현재는 합체기 선배님들만 구선산에 들어오실 수 있기 때문에 비어 있습니다. 각 산봉우리마다 합체기 선배님들을 모시기 위해 영선궁이 한 채씩 마련되어 있고요.”

    거한은 성심성의껏 이곳을 소개했다.

    “그럼 영선궁에 들어와 있는 수사 분이 있는가?”

    “만골진인(万骨眞人)이 한 달 전에 도착하셔서 문하의 제자들과 머물고 계십니다.”

    “만골진인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다. 본래 산수였다가 만여 년 전에 백골문(白骨門)을 창립하며 창립조사가 된 분이라지. 포부가 남다르겠어.”

    “백골문은 저희 현무경 내에서도 꽤 강대한 세력을 이루고 있습니다. 백골문이 짧은 시간 안에 10대 종문에 들 정도로 성장한 것은 전부 만골 선배님의 신통 덕입니다. 아, 만골 선배님은 영선궁의 가장 높은 층에 머물고 계십니다. 선배님께서는 어떤 층에 머물기를 원하십니까? 제가 바로 영선궁 총관대인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네 명의 뇌우들과 한립 일행은 백옥 궁전 대문에 도착했다. 푸른 갑옷을 입은 병사 몇 명이 그곳을 지키고 서 있었다.

    거한이 서둘러 내려 병사들에게 다가가 한립쪽을 가리키며 무어라 낮게 속삭였다. 그러자 무표정하게 서 있던 청갑 병사의 표정이 한순간에 달라져 한립을 향해 인사를 올리고는 서둘러 대문 안쪽으로 달려갔다.

    다시 한립 곁으로 돌아온 거한이 입을 열었다.

    “한 선배님, 저희는 아직 순찰을 마치지 못해 이곳에 오래 머물지 못할 듯합니다. 영선궁 총관대인이 곧 나와 선배님을 친히 모실 것이니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거한과 나머지 병사들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그곳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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