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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059화 (816/2,000)
  • 1059화. 빙수지체(氷髓之體)

    *

    악화 선자는 불현듯 마음이 불안해졌다. 이분이 어째서 백과아를 이리 중시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서였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한독으로 곧 죽을 백과아에게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옆에서 노부인이 쉼 없이 눈짓을 했기에 악화 선자는 단단히 결심하고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 바로 모시겠습니다.”

    그녀는 한립과 다른 이들을 데리고 동부의 뒤쪽 별당으로 걸어갔다. 붉은 나무 침상 위에 아이가 의식을 잃고 누워있었다.

    살짝 찡그린 얼굴에는 푸른 기운이 드리워있었고 입술이 보랏빛으로 질려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한립은 침상으로 가까이 다가가 한 줄기 뜨거운 기운을 느끼고 눈썹을 끌어 올렸다.

    “염목(炎木)으로 냉기를 쫓으려한 노력은 가상하다만 이미 한독이 경맥 깊은 곳까지 퍼져 있어 아이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게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과아의 고통을 줄여주려 염목으로 만든 침상을 구한 것이지요.”

    악화 선자가 침상에 누운 아이를 보며 걱정스런 눈빛을 보냈다. 한립은 소녀의 손목을 쥐고 눈에서 남색빛을 일렁였다.

    그의 모습에 노부인을 포함한 수사들은 다들 숨을 죽였고, 그러는 동안 일다경이 흘러갔다.

    파앗.

    한립의 손끝에서 순간 오색 빛이 감돌고 백과아의 얼굴에 푸른 기운이 흘러 달걀 크기의 덩어리로 뭉쳐졌다. 이에 한립은 눈을 빛내며 다른 손으로 은침을 꺼내들어 아이의 손목에 찔러 넣었다.

    “헛!”

    백의 여인과 중년남자는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손을 꼭 쥐고 간신히 버텼다. 잠시 후, 은침이 뽑힌 자리에서 한립의 법력에 이끌려 새빨간 피가 천천히 흘러 나왔다.

    한립은 은침을 거두고 하얀 옥함을 꺼내 아이의 피를 받았다.

    챙!

    핏방울은 옥함에 떨어진 순간 얼어붙어 맑은 소리를 냈다. 그 모습에 노부인 등은 얼굴이 시시각각 바뀌었는데 한립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옥함을 회수하고 아이의 손목을 쥔 손에 오색 빛을 더욱 크게 일으켰다.

    푸른 기운 덩어리가 점점 옅어져 결국에는 사라졌고, 그 순간 아이가 정신을 차리며 눈을 떴다. 이에 백의 부인과 중년인은 크게 기뻐하며 감사 인사를 하려 했다.

    그러나 한립은 아이의 손목을 놓아주는 대신 손끝으로 이마를 짚어 하얀 법력을 불어넣었다. 막 깨어난 아이는 바르르 몸을 떨고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에 모두가 화들짝 놀라고 있을 때 한립이 먼저 입을 열었다.

    “걱정할 것 없네. 체내의 한독은 제거했지만 몸이 약해진 상태라 잠시 쉬게 한 것이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자리를 옮겨서 하세.”

    그가 먼저 걸음을 옮기고 수사들은 궁금한 것이 가득인 채로 그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대청으로 돌아온 한립은 자리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들었다. 무언가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하는 모습이었다.

    “백 수사, 여식의 한독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몇몇 고인들을 청해 살펴본 결과 과아 체내의 한독은 흔히 볼 수 없는 지독한 냉기로 평범한 방법으로는 고칠 수 없다했습니다. 합체기 수사가 막대한 법력으로 제거를 하거나 아니면 극양(極陽)의 성질을 지닌 전설 속의 영약 몇 가지를 복용하는 것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백화급은 조금 놀랐지만 사실대로 고했다.

    “그들이 그렇게 말했을 만도 하구만.”

    “선배님의 뜻은 과아의 한독에 다른 문제라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자네들은 아이의 몸에 한독이 깃든 것을 언제 알았지?”

    악화 선자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지만 한립은 여인이 말에 답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했다.

    “아홉 살 때 수련하던 아이가 갑자기 밀실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그때서야 한독의 존재를 알았지요. 그때는 별것 아니라고 치부하고 평범한 방식으로 제거하려 했습니다.

    그 때문에 오히려 악화가 되어 몇 년 만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과아가 막 태어났을 때는 저와 장모님이 직접 살펴보았지만 아무런 이상도 없었습니다. 십중팔구 원한을 가진 누군가가 과아에게 손을 쓴 것이겠지요.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누구의 짓인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알아내기만 한다면…….”

    중년 사내는 고통스런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고, 악화 부인도 어두운 얼굴로 그 정체 모를 원수를 증오했다.

    “한참 잘못 알고 있군! 이 한독은 아이가 뱃속에서부터 타고난 것이며 무슨 지독한 냉기 따위가 아니라 굉장한 내력을 지닌 기운일세.”

    “선배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분명 사실이겠지요. 그럼 자세히 설명을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계속 듣고만 있던 노부인이 공손히 물었다.

    “자네가 그리 말하지 않아도 설명해주려던 참이었네. 아이는 사실 전설 속 영체(靈體)인 빙수지체(氷髓之體)를 타고난 것이라네. 태어날 때는 아무 증상을 보이지 않다가 9살 무렵에 발현이 되는데 한독이 처음으로 맹렬하게 발작할 때 대부분이 사망하고 말지. 이런 영체는 상고경전에도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네. 나도 우연히 관련 기록을 보지 않았다면 아이의 한독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을 게야.”

    “빙수지체!”

    악화 부인과 백화급이 시선을 마주쳤다. 처음 듣는 소리에 놀랍기도 했지만 의심이 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말에 노부인이나 다른 수사들은 눈만 크게 뜨고 다른 이들의 반응을 살폈다.

    한립은 믿든 말든 상관없다는 얼굴로 다시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과아가 빙수지체였다니. 복인지 화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때 노부인이 뜻밖에도 이런 말을 했다.

    “사부님도 이런 체질을 들어보셨습니까?”

    백의 여인이 놀라 물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언젠가 알고 지내던 벗도 이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나는구나. 한 선배님께서 하신 말씀과 똑같았지! 과아가 그런 체질을 타고났을 줄은 생각도 못했었는데…….”

    “안 좋은 것입니까?”

    “듣기로 빙수지체는 9살에 발작을 시작해 한기가 점점 강해져 보통 열대여섯 살이 되기 전에 죽고 말지. 살아남으려면 단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알고 있다.”

    “스승님, 그게 무엇인지요?”

    “한 가지는, 합체기 수사가 매년 막대한 법력을 이용해 한독을 제거해 주다 나중에는 진원으로 경맥을 뚫어주는 것이다. 백년을 이렇게 버티면 영체의 주인은 한독에 적응해 무탈할 수 있고, 약간의 수련을 거쳐 기이한 한기로 빙수한백(氷髓寒魄)이라는 강력한 신통을 부릴 수도 있다.”

    반색하는 백의 부인을 향해 노부인이 주저하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절정의 자질을 타고난 것이 아닙니까!”

    중년 사내도 희소식을 반기며 물었다.

    “빙수영체의 극한(劇寒)의 기운을 억누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인 줄 아는가! 처음 수십 년은 그나마 합체기 수사가 가볍게 한기를 제거해 줄 수 있겠지. 하지만 그 후로는 합체기 수사라 해도 진원을 소모해가며 한기를 억눌러야 하네.

    좌선을 하고 휴식을 취한다고 해서 쉽게 회복되는 것이 아니란 말일세. 오랜 세월 막대한 법력을 소모해 영체의 주인을 도와주려면 합체기 수사는 거의 수백 년 세월의 고된 수련을 날리는 셈인데 누가 그런 일을 하겠는가?”

    노부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노부인의 말을 들고 악화 선자와 백화급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수백 년의 수련을 수포로 돌리는 일은 혈육이라고 해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어찌 남에게 바랄 수 있겠는가.

    “그, 그럼 두 번째 방법은 무엇입니까?”

    중년 사내가 일말의 희망을 품고 급히 질문을 던졌다.

    “두 번째 방법은 전설 속의 영약을 찾아 극양의 기운을 품은 단약을 제련해 복용하는 것일세. 상극의 기운으로 한기를 극복해 빙수지체 자체를 개선하는 것이지. 하지만 이것 또한 첫 번째 방법과 마찬가지로 만만치가 않네.

    어디서 그런 영약을 구할 것이며, 어렵사리 제련해 복용해도 후환이 무궁무진하거든. 빙수지체를 제거하는 대신 영근 자질이 엉망이 될 수 있으니까 말이야.”

    노부인은 난색을 표하며 말해주었다. 그 말에 중년 사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런데 백의 부인이 골똘히 생각을 하다 한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한 선배님께서 굉장한 능력을 지니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과아를 구할 방법이 있다면 저희 가문이 무슨 일을 해서든 그 은혜를 갚겠습니다.”

    여인의 말에 노부인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한립을 쳐다보았다. 한립은 분명히 과아를 위해 이곳에 왔다고 했다. 그 말은 도움을 줄 방법이 있다는 뜻이었다.

    중년 사내도 머리를 조아리고 간곡히 사정했다.

    “제법 머리가 있군그래. 내가 이곳까지 왔을 때는 아이를 구할 뜻이 있어서겠지.”

    “선배님의 크나큰 은덕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백의 여인은 자신의 추측이 맞아  떨어지자 기쁨에 휩싸여 한립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려 했다. 하지만 한립이 소매를 털어 압력으로 악화 선자와 백화급을 막았다.

    “그리 조급히 굴 것 없네. 내가 정말 도움을 줄지는 자네들이 내 조건에 응하는지에 달렸으니까.”

    “어떤 조건이든 말씀만 해주십시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절대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악화 선자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답했고, 중년 사내도 가슴이 철렁했지만 반대하지 않았다. 한립은 이제 딸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조건은 아주 간단하네. 나는 아이를 도와 빙수한백의 신통을 익히게 하고 심지어 기명제자로 들일 마음도 있네. 다만 신통을 대성하면 반드시 나를 대신해 한 가지 물건을 찾아 주어야 하는데, 이 물건은 인요족 구역에 있을 수도 있고 만황세계의 어느 구석진 곳에 있을 수도 있네.

    오직 빙수한백을 익힌 자만이 감응하여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지. 물론 극히 위험한 임무가 될 것이야. 자네들은 아이를 대신에 이 조건을 수락할 수 있겠는가?”

    “헉, 만황이요?”

    백화급이 놀라 숨을 들이키며 대답을 못하고 있을 때 악화 선자가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선배님이 말씀하시는 신통을 대성할 때가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것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수행이 너무 낮으면 만황세계에서 살아 돌아올 수 없을 텐데요.”

    “하하, 그건 자네들이 염려할 것 없네! 나도 공을 들여 키운 기명 제자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니. 어차피 빙수한백을 대성하고 임무를 수행하러 떠나려면 최소한 화신기 이상은 되어야 하네. 또한 강력한 보물들을 내려 목숨을 부지하게 하고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인요족 구역이 아닌 만황세계로 나가게도 하지 않을 것이야.”

    “화신기라면 충분합니다! 저도 평생 갈망해온 경지인 것을요. 게다가 선배님이 도움을 주시지 않으면 몇 년 지나지 않아 요절할 목숨, 천여 년 후의 길을 걱정해 무엇 하겠습니까.”

    수행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악화 선자는 머리 회전이 빠르고 결단력이 있었다. 백화급은 아직도 걱정이 되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다른 소리는 하지 않았다.

    “음, 그럼 되었구먼. 내 과아를 기명제자로 거둬 앞으로 약 백 년간 곁에 두겠네. 백 년 후에는 아이를 자네들에게 돌려주고 수련상의 도움을 주는 것을 제외하면 생활에 일체 간섭하지 않을 것이야.”

    “저는 선배님만 믿겠습니다!”

    중년 사내가 그제야 마음을 놓고 감격한 얼굴로 감사를 표했다. 이번에는 한립이 인사를 받자 악화 선자도 밝은 얼굴로 예를 올렸다.

    노부인은 곁에서 한시름 놓으면서 들뜬 마음을 겨우 가다듬었다.

    상대가 기명제자 과아에게 수련 공법을 고스란히 전수해줄 생각은 없다고 해도 합체기 선배와 인연을 맺는 것이었다. 이로써 금광종이 엄청난 배경을 갖게 되는 셈이니 앞으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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