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5화. 구선산(九仙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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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뇌영근(雷靈根)이 소실되었다.’
이와 같은 일은 열흘 전에도 벌어졌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영근이 단시간 내에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다는 것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막대한 법력을 몸에 지니고 있어도 영근이 소실된 기간에는 어떤 술법도 펼칠 수 없었다.
“한 형은 멍하니 뭐하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은데 제가 무해관의 영차라도 내드릴까요? 대신 지난번에 맛본 영과(靈果)도 몇 개 꺼내 주시면 좋고요. 맛이 그만이라 잊혀 지지 않습니다.”
기령자가 섬세하게도 한립의 변화를 눈치채고 눈짓을 했다.
“아, 그건 맞는 말일세! 한 형께서 내주신 영과의 맛은 대단했지.”
해대소도 그 말을 듣고 눈을 반짝이며 입맛을 다셨다.
“흠, 자네들이 영과에 마음을 빼앗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네. 그러나 응주과(凝珠果)는 맛은 좋지만 정순한 영력이 많아 한 번에 너무 많이 복용하면 오히려 둘의 경맥을 상하게 할 수 있다네. 그럼 이렇게 하지. 6개를 꺼내 두 개씩 맛을 보세.”
뜬금없이 죽이 맞아 자신의 영과를 노리는 해대소와 기령자를 보고 한립이 헛기침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
파앗.
그의 소매 속에서 달걀 크기의 비취색 과실들이 담긴 옥쟁반이 빠져나왔다.
“하하, 두 개만 해도 감지덕지지요. 무슨 일인지 지난번 한 형께서 주신 과실 세 개를 집어먹고 정체되어 있던 법력이 늘어났지 뭡니까? 그러지 말고 응주과를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알려주십시오. 단약이고 뭐고 그냥 며칠에 한 번씩 맛 좋은 영과나 먹으면서 법력을 늘리고 싶습니다.”
기령자가 구슬처럼 반짝이는 비취색 과실을 보고 기분 좋게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휙! 하고 쟁반 위의 과실 두 개를 가져갔다.
사각!
기령자가 급히 고개를 돌리니 해대소가 양 손에 영과를 하나씩 들고 번갈아 가며 베어 먹고 있었다.
“이런 낭비가!”
그것을 본 기령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해대소는 어린 도사가 아까워하든 말든 입 안 가득 베어 나오는 과즙을 즐기며 응주과의 맛에 빠져들었다.
이에 한립은 말없이 지켜보며 몰래 미소 지었다. 손에 들고 있는 영과 하나에 영석 천 개가 넘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저리 통쾌하게 먹어치울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해졌던 것이다.
한립이 시선을 돌려 어린 도사를 응시했다. 그간 지켜보니 기령자도 비범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확실히 평범한 삼영근(三靈根)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단전에 영기의 빛으로 휩싸인 콩알만 한 구슬이 숨겨져 있었다. 호기심에 몰래 구슬의 정체를 알아보려 했지만 거센 봉인의 힘을 감지했다.
‘전승법기(傳承法器)!’
일부 수도자들이 전승이 끊기는 것을 우려해 자신이 배운 것을 특수한 비술로 봉인해 전승 법기에 남겨두고는 했다. 후인이나 문하의 제자의 몸에 심어진 전승법기는 보통 어떤 조건을 충족해야 모습을 드러냈고 그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수행이 일정 경지 이상이 되면 전승법기 속의 비술이나 공법을 획득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전승자가 죽기 전 고유의 비술을 이용해 전승법기를 다른 사람의 체내에 심는 것도 가능했고, 이밖에 다른 사람이 강제로 전승법기를 빼앗으려 하면 전승자와 같이 폭발해 사라지기도 했다.
이런 전승법기는 제련법을 아는 이가 드물고 제련과정이 복잡해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이 기령자의 몸속에 있다니 뜻밖이었다. 보아하니 무해관의 창립 조사는 정말 평범한 비승 수사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강력한 신통을 여럿 익힌 한립은 다른 수사의 비술에 큰 관심이 없었고, 기령자 보다는 해대소에게 더욱 주의를 기울였다. 나타났다 사라질 수 있는 영근이라니 너무 신기하지 않은가!
그들은 기령자가 내놓은 영차를 음미하며 남은 과실을 다 먹고 다시 비차를 타고 현무경으로 날아갔다. 현무경은 천원경과는 꽤나 달랐다.
수도자의 수는 천원경과 천령경에 못 미쳤는데 연체사의 수는 월등했다. 풍속도 호전적이라 노인이나 아이, 여인과 문인들도 무기를 들고 나가 짐승을 사냥했다.
하지만 현무경 내에 범인들이 머무는 대형 성은 몇 되지 않았고 대부분이 산채처럼 광활한 땅에 흩어져 있었다.
또한 삼경 중 칠지와 맞닿은 곳이라 ‘요수의 난’의 규모도 컸고 저계 요수들을 마주칠 확률도 다른 곳에 비해 높았으며 고계 화형기 요수들도 심심치 않게 현무경 내로 숨어들어 이상한 짓을 저질렀다.
그러니 삼경 중 현무경이 가장 어수선했고 요족과 인접할수록 혼란은 가중되었다. 그러나 천호의 땅과 현무경 사이에 있는 거대한 산맥인 구선산은 예외였다.
아홉 개의 산봉우리로 나뉘는 산맥은 극품영맥을 지니고 있고 인족과 요족 모두에게 큰 쓸모가 있는 영약의 자생지였다.
거기다 구선산 자체가 산세가 험하고 특수한 지형을 이루어 인족과 요족의 정예 세력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아무리 담이 큰 자라도 이곳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최근 몇 년간 구선산은 더욱 엄하게 주변을 관리했고 평판이 나쁜 주변의 중소 세력들을 정리해 5, 6년 만에 현무경에 어울리지 않는 낙원으로 개척했다.
그런 구선산에서 천년에 한번 열리는 인요족의 만보대회가 열리는 것이다.
* * *
만보대회까지는 아직 몇 달이 남아 있었지만 구선산 주변에는 이미 삼경 칠지에서 모여든 인족과 요족 수사들로 가득했다.
구선산으로 들어가지 못한 수사들로 인해 산맥 인근에 자연스럽게 열댓 개의 크고 작은 시장이 형성되었고 수많은 고계 수사들이 나타나 진귀한 재료와 영약을 거래했다.
다른 시장처럼 인족과 요족이 따로 거래하지도 않았다. 시장에 나타난 요족 수사의 수는 인족에 비해 적었지만 대부분 화형기 고계 수사라 진정한 실력으로는 인족 수사들에게 밀리지 않았다. 이로 인해 어느 정도 균형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장들은 임시로 만들어진 것이라 이렇다 할 규율이 없었다. 이에 심심치 않게 강자가 약자의 것을 빼앗거나 강매를 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날 구선산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황산에서도 비슷한 일이 펼쳐졌다. 수척한 얼굴의 중년 수사와 열한두 살밖에 안 된 여자아이가 세 명의 흑의인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중년 수사는 축기 중기, 여자아이는 연기기 3, 4성에 불과했는데 흉흉한 얼굴의 흑의인들은 전부 축기 후기의 수행을 지니고 있었다.
“백화급, 아직도 천년 혈삼을 내놓지 않는단 말이냐! 얌전히 혈삼을 내놓으면 너희 부녀를 놔주고 약간의 영석을 내어줄 생각도 있다.”
흑의인 중 하나가 음산하게 소리쳤다.
“석륜! 내가 어리석어 너희에게 속아 여기까지 왔지만 혈삼을 원한다면 딸아이를 먼저 보내줘야 할 것이야. 그렇지 않으면 내 손으로 혈삼을 없앨망정 너희에게 내주지는 않겠다.”
수척한 얼굴의 중년인은 비단으로 둘러싸인 함을 꺼내들고 손에 영기의 빛을 일으켰다. 그것을 본 흑의인들의 표정이 달라진 것은 당연했다.
“혈삼을 내놓기 전에는 아무도 떠날 수 없다!”
“흥, 너희가 혈삼을 얻고 우리 부녀를 해치지 않을 거라 어찌 믿는단 말인가? 맹세를 하겠다는 말은 하지도 말거라. 내 절대 다시 너희를 믿지 않을 것이니!”
또 다른 흑의인의 말에 중년인이 결연하게 외쳤다.
“그럼 여기서 살아서 빠져나갈 생각은…….”
“좋다, 약속하지.”
거한이 다시 협박하려는데 석륜이라는 수사가 말을 끊고 제안을 수락했다.
“석 형, 어째서…….”
“왜? 내 말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냐.”
석륜이 나머지 흑의인들을 서늘하게 쳐다봤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닙니다. 석 형 뜻대로 계집은 보내지요!”
두 흑의인은 석륜의 눈치를 보며 동의했다.
“우리가 하는 말은 잘 들었겠지? 아이는 보내줄 것이나 괜한 짓을 하려들면 어찌 될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야.”
“딸아이가 무사히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이까짓 혈삼은 너희에게 내주어도 상관없다.”
“아버지 안 돼요! 절대 저 혼자 떠날 수 없어요!”
곱게 생긴 아이가 중년인의 옷자락을 붙들고 고개를 저었다.
“어리석은 것! 과아야, 네가 외조모를 찾아 도움을 구해야 이 아비를 살릴 수 있다.”
“아!”
중년인은 순간 안색이 달라져 재빨리 입술을 달싹여 전음을 보냈고, 과아라 불린 여자아이는 그 말을 듣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안 가고 뭐 하는 거지? 그렇게 시간을 끌다 내 마음이 변하면 어쩌려고 그러지!”
석륜이 성가시다는 얼굴로 사납게 소리쳤다. 그 말에 아이가 깜짝 놀라 얼어붙었지만 소녀도 수도자였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팟!
아이는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는지 중년인을 힐끔 쳐다보다 하얀 부적을 꺼내 몸에 붙이고 쏘아져 나갔다. 이에 중년인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딸아이를 지켜보았다.
흑의인들이 소녀를 그냥 통과시키자 중년인이 한시름을 놓으려는데 석륜이 눈을 번뜩이고 뒤쪽으로 팔을 휘둘렀다.
아이가 탄성을 내뱉은 순간, 검은 그림자에 붙들려 끌려갔고 석륜의 수중에 떨어졌다. 새까만 손이 아이의 여린 목을 틀어쥐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석륜! 혈삼을 부숴버리겠다!”
“혈삼을 부수면 내가 네 딸의 목을 비틀어 버릴 텐데? 쓸데없는 소리 말고 함을 던져라. 셋 셀 때까지 던지지 않는다면 죽이겠다. 하나! 둘!”
석륜은 중년인의 협박에도 망설이며 손가락에 힘을 주었고 목이 졸린 소녀는 몸을 요동쳤다. 그제야 나머지 흑의인들은 석륜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처음부터 한 명을 인질로 삼을 생각으로 거짓말을 한 것이다.
중년인은 다급한 상황에 닥치자 온몸이 떨리고 머리가 새까맣게 변했다. 그는 석륜이 셋을 다 세기도 전에 황급히 비단함을 던져주고 말았다.
이에 흑의인 중 하나가 피식 웃으며 그것을 끌어왔다.
“혈삼이 맞는지 확인하거라!”
“맞습니다! 진짜 혈삼입니다.”
석륜의 분부에 비단함을 열자 커다란 핏빛 인삼이 모습을 드러냈다.
“혈삼을 가져갔으니 아이는 놔줄 수 있겠지”
중년인 수사가 창백한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큭큭, 너희를 놔주면 나중에 악화 선자가 우리를 찾을 게 아니냐!”
그 말에 석륜이 비열하게 웃었다.
“감히 그걸 알고도 우릴 건드렸단 말인가!”
“우리가 미리 알아보지도 않고 아무나 해치는 어중이떠중이인 줄 아느냐? 나도 결단기 수사는 건드리고 싶지는 않지만 네가 하필 혈삼을 지니고 있으니 어쩔 수 없지. 혈삼만 있음 결단이 코앞이니 악화 선자 따위 두려워할 이유도 없고, 너희를 죽여 시체까지 없애면 우리 짓인지 누가 알겠느냐?”
석륜이 광소하며 소녀의 목을 쥔 손에 검은빛을 일으켰다. 이에 중년인이 격분해 괴성을 지르며 소매 속에서 노란 비검을 던지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석륜의 손에 아이의 목이 비틀어지기 직전 불가사의한 장면이 펼쳐졌다. 이상한 파동이 느껴지고 아이의 목이 딱딱해진 순간 석륜은 손에서 격렬한 통증을 느꼈다.
비명을 지르며 서둘러 고개를 돌리니 소녀가 있어야 할 자리에 새까만 강철 꼭두각시가 있었다.
남색 가시가 가득 박힌 꼭두각시를 맨손으로 움켜진 탓에 그의 손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석륜이 사납게 강철 괴뢰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치고 분노에 차 외쳤다.
“누구 짓이냐!”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손에서 검은색 진법 법기 한 벌이 나타났다. 그 모습에 중년인이 아연한 얼굴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때 나머지 흑의인도 상황을 파악하고 각각 은색 도끼와 검은 방패를 꺼내 주변으로 의식을 훑었다.
“대소, 나는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겠네. 아무래도 저것들과 한바탕해야겠어.”
커다란 나무 뒤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흑의인들이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나무를 노려보았다.
“나도 이런 꼴을 그냥 보고 넘길 성미는 아닐세. 강도짓을 하려면 물건만 빼앗으면 그만이지 아이를 건드려? 아주 흠씬 패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겠군. 근데 우리 둘이서 저 셋을 제대로 패줄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나무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씩씩거리며 말하는데 조금 걱정하는 듯했다.
“흐하하, 한 형이 있는데 무슨 걱정인가! 딱 3대 3이니 이기지는 못해도 위험하지는 않을 걸세.”
처음 들려온 냉랭한 목소리가 짓궂은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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