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4화. 해대소와 기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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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건을 마친 여인은 한립에게 인사를 하고 누각 대청을 걸어 나갔고 허교가 재빨리 그 뒤를 쫓았다.
그들이 누각 대문을 나가 사라지자 한립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혈령에게서 듣고 싶었던 몇 가지의 물음에 대한 답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또한 허천정을 여인에게 건네자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언젠가 수행을 높이는데 장애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찝찝함이 사라졌고 비 씨 청년에게 했던 심마를 건 맹세의 영향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허천정에 그가 모르는 다른 용도가 있을 테지만, 위력으로 따지면 이미 그가 가진 보물들이 훨씬 앞섰다. 아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내주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번 거래를 통해 마음도 편해지고 혈령과 허 가 그리고 빙백 선자와 우호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어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게다가 줄곧 이름만 들어왔던 마옥화도 얻지 않았는가.
‘슬슬 허 가를 떠나야겠구나.’
만보대회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몇 년간은 천원경 내를 유람하며 천천히 구선산 쪽으로 가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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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지나고 산맥 위로 푸른 빛줄기가 날아올랐다. 한립은 둔광 속에서 잠시 허 가 일가를 바라보다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 후, 그는 몇 년 동안 천원경을 돌아다니며 크고 작은 성들을 둘러보았다. 성에서 이름난 종문이나 세가로 가서 고계 수사들과 수련상의 깨달음을 나누기도 했고, 때로는 조용히 관찰만 하다 떠나기도 했다.
천원경의 10분의 2에도 못 미치는 지역들이었지만 인족의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했다. 인족 합체기 수사들은 각치족이 아니라 비령족과 비교해도 수가 너무 적었다.
천연성 및 삼황 등이 보유한 합체기 수사 외에 세가나 종문에 몸담고 있는 합체기 수사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또한 그처럼 완전히 자유롭게 생활하는 합체기 산수는 손에 꼽혔다.
듣기로는 요족이 그나마 인족보다는 상황이 낫다고 했지만 인요족 전체를 합쳐야 풍원대륙의 중간 정도 규모의 이종족과 세력이 엇비슷할 것이다.
풍원대륙 구석에 자리 잡고 주변에 강대한 이종족이 없었다는 것이 영계에서 두 종족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한립이 알기로 인요족보다 훨씬 세력이 강했던 이종족도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영계에서 사라지는 경우가 꽤 많았다.
어찌 됐든 이런 상황에서 인족 합체기 수사인 그를 위협할 수 있는 자는 얼마 되지 않았고, 우연히 마주친 사수(邪修)들을 몇 죽인 것으로 천원경 내에서도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고 있었다.
이제 많은 중소 종문이나 세가들도 인족에 청년의 모습을 한 합체 초기 수사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현무경과 천령경에서도 사람을 보내와 그를 포섭하려 했지만 한립은 전부 거절했다.
그렇게 5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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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무경과 천원경 사이의 산세가 수려한 산맥 어딘가. 인족 수사 셋이 돌로 만들어진 정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얀 장포를 걸친 미남 수사는 기품이 있어 보였고, 그 옆에 낡은 목검을 메고 노란 도포를 걸친 도사는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수사는 피부가 까만 것을 제외하면 평범한 얼굴을 지닌 푸른 장포의 한립이었다.
한립은 입 꼬리를 끌어올리고 맞은 편 어린 도사가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제가 허풍 떠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무해관(霧海觀)의 창립 조사께서 하계에 계실 때 무해종(霧海宗)이 천하제일종문이었다고 합니다. 인계를 재패하고 요수들도 기를 못 썼다는군요! 현령자 조사께서는 당연히 천하제일이셨고요.
이제 저 기령자가 무해관을 이어받았으니 두 분께서 본관으로 들어오시면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 될 것입니다. 우리 세 사람이 수행을 대성하면 무해관을 인족 제일의 종문으로 키우는 것도 충분할 겁니다.”
“하하, 오는 내내 그 소리만 몇 번을 하는 것인가! 무해관이 겨우 어린 도사 몇 명을 거두어 데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나와 한 형에게 거기로 들어오라고? 아무리 조사께서 인계에서 펄펄 날아다니셨다고 해도 영계에서는 평범한 화신기 수사에 불과하셨을 텐데.”
미남자가 웃음을 흘리고 녹색 부채를 촥! 하고 펼쳐 부쳐댔다.
“해대소, 자네가 뭘 안다고 그리 말하는가! 우리 무해관은 공법이 별로인 게 아니라 조사께서 남기신 무해무극대법(霧海無極大法)의 수련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 제자를 아무나 들이지 못하는 것이네. 조사께서 영계로 비승하다 공간 폭풍에 휘말려 중상을 입으시지 않았다면, 이런 새 둥지만도 못한 곳에 급히 무해관을 세우셨을 리 없네.”
어린 도사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열변을 토했다.
“그게 아니라 자네 조사께서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게지. 무해관의 실력에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면 아직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한 형,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해대소라고 불린 미남자가 부채를 접고 한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해 아우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지만, 기령자 수사의 공법이 특수해 수련하는데 특수한 자질이 필요하다는 것도 맞는 말이네.”
“하하! 한 형 말씀 잘 들었는가? 우리 무해관에 전승되는 공법은 격을 달리한단 말일세. 본 관에 입문하기만 하면 내 바로 무해무극대법을 전수해주지.”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 답했고, 그 말에 어린 도사가 신나서 회유를 계속했다.
“쯧! 이 몸은 정종(正宗)의 연체술을 수련했고 연체사로 자질이 뛰어나 벌써 금강결 3성을 익혔는데 자네에게 뭘 또 배운단 말인가? 관주가 겨우 축기기에 이른지 얼마 안 된 수사라 나를 꺾을 실력도 안 되는데 말이야. 사부를 모신다면 이름난 거대 종문으로 가야지.
그리고 한 형, 말씀을 그렇게 애매하게 하시면 안 됩니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니요. 당시 현령자 선배님께서 그렇게 구석진 산골짜기에 무해관을 건립하신 것은 분명 제 말대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려는 궁여지책이셨을 겁니다.”
해대소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한립은 결국 쓴웃음을 지으며 무어라 대꾸하지 않았다. 눈앞의 두 사람은 정말 익살꾼 같았다.
그들은 한 달 전, 작은 성 인근에서 만났는데 어쩐 일인지 작은 문파에 밉보여 축기 수사 여럿에게 추살당하고 있었다. 인요족에서는 아주 흔하게 벌어지는 일로 한립도 처음에는 나설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한립은 포위당한 이들을 대충 훑고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한 명은 최상의 영근 자질을 지니고도 연체술을 익혀 범인의 몸으로 금강결 3성을 수련했고, 다른 한 명은 무척 조잡한 영근 자질을 지니고도 아주 특이한 공법을 익혀 혼자 동급 수사 여럿을 상대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힘을 합쳐 대여섯 명의 축기기 수사를 상대하면서도 밀리지 않았다. 호기심이 생긴 한립은 기운을 축기기 최고봉으로 갈무리하고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가 수행을 숨긴다 해도 축기기 무리를 쫓아버리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이에 한립은 축기기 무리를 물리쳤고 도움을 받은 해대소와 기령자는 한립에게 대단히 감격해 몇 마디 말을 나누기도 전에 의형제를 맺자고 했다.
한립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는 서둘러 구실을 찾아 의형제 제의를 거절하고 현무경에서 열리는 만보대회에 참가하러 가는 길이라고 알려주었다. 이에 그들도 그곳에 가는 길이었다며 동행하자고 했다.
한립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만보대회는 인요족 합체기 수사는 물론 삼황과 칠요왕까지 참석하는 성대한 모임이었다.
‘겨우 축기기 정도의 실력으로 만보대회까지 갈 생각을 하다니.’
게다가 만보대회에 참가하는 축기기 수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저계 수사들은 시종이나 문하 자제의 자격으로 고계 수사들을 따라 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홀로 찾아오는 축기기 수사들은 인근에 거주해서 견문이나 넓혀 볼까하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기령자와 해대소는 각각 차 항아리 몇 개와 이름 모를 돌조각을 들고 만보대회로 향하고 있었다.
정말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건 몰라도 기령자의 영차는 확실히 품질이 괜찮아 상등품이라 할 만했고, 해대소의 이름 모를 돌조각은 한립조차 그 내력을 파악할 수 없는 신기한 광석이기는 했다.
한립은 두 사람에 대해 궁금하기도 했고 어차피 만보대회까지 시일이 넉넉해 그들과 동행하는 것을 수락했다. 상급 비차를 꺼내 둘을 태우고 현무경으로 날아가던 중 한립은 쓴웃음을 금치 못했다.
그가 내력을 물을 것도 없이 해대소와 어린 도사 기령자는 틈만 나면 입씨름을 하면서 자신들의 신세에 관해 술술 늘어놓았던 것이다.
해대소는 범인들의 성에서 굉장히 이름난 연체가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최상의 영근을 타고났지만 한 수사가 실수로 영근이 없다고 판단을 내려, 그 후로 쭉 연체사로 살아왔다.
그러나 자신이 연체술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우연히 영근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주저 없이 연체술 수련을 멈추고 수도의 길을 가려 했다. 하지만 작은 범인들의 성에 제대로 된 수도 종문이 있을 리 없었고, 콧대 높은 그의 눈에 약소한 수도 종문이 눈에 찰 리는 더더욱 없었다.
심사숙고 끝에 그는 몰래 가문을 떠나 거대 수도 종파를 찾아 나섰고 도중에 만보대회에 참석하러 가던 무해관의 어린 도사와 마주친 것이다.
그들은 뜻밖에도 짧은 시간 안에 의기투합했고 해대소가 기령자의 꼬임에 넘어가 의형제까지 맺고 만보대회로 방향을 틀게 된 것이다.
기령자는 해대소를 설득하며 만보대회를 이렇게 묘사했다고 한다.
“거긴 화신기 수사가 널려 원영기 수사는 취급도 안한다네! 그 중에 아무 수사나 붙들고 스승으로 모시면 무슨 거대 종문을 찾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겠나?”
그렇게 그들은 만보대회로 향하게 되었고, 다행히 멀리 돌아가더라도 위험한 곳은 죄다 피해 다녔다.
그래서 큰 사고 없이 이동하다 한립을 만난 작은 성에서 우연히 현지 수도 가문의 심기를 건드려 동급 수사들에게 공격당한 것이다. 한립을 만나지 못했다면 쉽게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해대소와 기령자의 눈에 한립은 매우 신비로운 존재였다. 결단까지 한 걸음을 두었다고는 하지만 신통한 법기와 보물들이 한 둘이 아니었고, 수련상의 깨달음도 그들이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에게 대충 몇 마디 조언을 듣는 것만으로 수련에 큰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한립이 연체술에 대해 지적해주었을 때 해대소는 반나절이나 어안이 벙벙했다. 수사가 연체술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아주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한립이 심오한 뭔가가 있다고 느꼈지만 원래 사교성이 좋고 털털한 성격들이라 거침없이 한 형이라 칭하며 곰살궂게 굴었다. 한립이 수행을 그대로 드러냈다면 뻔뻔스럽게 사부로 모시고 싶다고 졸라댔을 것이다.
말끝마다 무해관 자랑을 하는 기령자도 은근히 만보대회에서 좋은 스승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드러냈으니 말이다. 그는 말과 달리 무해관 관주라는 직함에 미련이 없는 눈치였다.
그럼에도 기령자는 줄곧 한립과 해대소에게 무해관으로 오라며 설득했고, 그 때문에 해대소의 비웃음과 한립의 쓴웃음을 이끌어냈다.
그렇게 그들은 한 달 남짓 날아가다 현무경 근처의 경치 좋은 산에 내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기령자가 쉴 새 없이 무해관을 치켜세우며 그들에게 입관을 제안하고 해대소가 거절해대는 동안 한립의 눈빛은 남색으로 일렁였다.
영안을 발동해 해대소를 주시하던 그는 순간 상대의 얼굴에 기이한 붉은 빛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것을 포착했다.
‘나타났다!’
한립은 얼른 의식 한 줄기를 내보내 해대소의 몸을 훑었다.
“하하, 천둥 속성 영근을 지닌 내가 화신기나 연허기 수사의 문하에 들어가는 것은 간단한 일 아니겠나! 이 몸이 선술을 익히면 그때는…….”
해대소가 흥분하며 원영기나 화신기 수사가 된 이후의 밝은 미래에 대해 떠들썩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하는 천둥 속성 영근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평범한 수사가 그를 살펴본다면 영근이 없는 평범한 연체사라고 결론을 내릴 것이 분명했다. 한립은 눈썹을 끌어올리며 가슴이 조금 서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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