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3화. 혈령(血靈)
*
한립은 흠칫 놀라 대연결을 운용해 의식의 힘을 밀어냈다. 궁장 여인은 의외라는 얼굴로 시선을 돌려 자신을 둘러싼 혈정관을 가리켰다.
그러자 혈정관이 작게 수축해 그녀의 손으로 들어왔고 곧 종적을 감추었다.
“너희는 허 씨 가문의 사람들이겠구나! 그런데 허 가 사람이 아닌 수사가 있는 듯한데?”
드디어 여인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빙백 수사십니까?”
허원 등 허 가 수사들이 눈치를 보는 동안 한립이 미간을 좁히고 반문했다. 피로 이루어진 여인의 몸에서는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아 상대의 수행을 가늠할 수 없었다.
“제가 빙백 선자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당신은 합체기 수사시군요.”
“저는 한립으로, 허 가주가 선자의 혈혼을 깨우기 위해 도움을 청해 왔습니다.”
상대가 빙백 선자의 화신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예를 갖춰 말했다.
“그러셨군요. 수사 같은 합체기 수사를 청할 생각을 다 하다니 후손들의 정성이 갸륵합니다.”
그의 말에 여인이 고마움을 표하며 예를 취했다.
이에 듣고 있던 허교 등 허 가 고계 수사들은 조금 낯이 뜨거워졌다. 한립은 그들이 청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온 것이었고, 그의 도움이 없었으면 각성의식도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
“사실은 저와도 관계가 있는 일이라 작은 도움을 주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까?”
한립의 대답에 궁장 여인이 허 가 수사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한 선배님 말씀대로입니다. 선조님의 혈혼을 허 가로 전달해 주셨을 뿐 아니라 같은 인계(人界) 출신으로 선조님이 남기신 건람빙염을 지니고 계시다 합니다.”
허교가 눈치껏 한 걸음 앞으로 나서 공손히 답했다.
“놀랍게도 그런 일이 있었군요! 본체가 곤경에서 벗어나면 반드시 후한 보답을 할 것입니다.”
궁장 여인의 아름다운 눈에 놀라는 기색이 스쳤다.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닙니다만 몇 가지 선자께 가르침을 청할 일이 있습니다. 지금은 긴 이야기를 나눌 때가 아니니 육신을 안정시키고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수사께서도 알아보셨군요. 방금 육신을 응결한 터라 확실히 불안정합니다. 며칠이 지나야 혈혼과 몸이 진정 하나로 융합될 테지요.”
“하하, 이제 막 깨어나셔서 본 가의 수사들과 나누실 말씀이 많을 테니 저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천우 수사가 나를 거처로 안내해 주게.”
한립은 주저 없이 몸을 돌려 허천우에게 말했다.
“예!”
“선조의 혈혼을 깨우는데 큰 도움을 주셨으니 잠시 후 제가 직접 인사를 드리러 찾아뵙겠습니다!”
허교는 한립이 알아서 자리를 피해주어 기분이 좋았다. 한립과 허천우가 성큼성큼 대청을 빠져나가고 허교는 허 가 수사들을 이끌고 다시 한 번 궁장 여인에게 인사를 올렸다.
“모두 일어나게. 혈혼을 깨우느라 고생이 많았겠군. 자네가 허 가의 당대 가주인가?”
“제173대 현손(玄孫), 허교가 빙백 선조님을 뵙습니다!”
“173대라, 시간이 많이도 흘렀구나……. 나는 본존의 기억 일부를 계승한 혈혼일 뿐이니 선조라 칭할 것 없네. 그나마도 시간이 오래되어 완전하지 못하니까 말이야. 다들 그냥 ‘혈령’이라 부르면 되네.”
궁장 여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말에 허 가 수사들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저, 혈령 선배님. 그럼 빙백 선조님께서는 어디에 계신지 아십니까? 별일 없으신 것이 맞는지요?”
허원이 급한 마음에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그 물음에 궁장 여인의 얼굴이 어두워져 고계 수사들은 가슴이 철렁했다.
“안심하게. 정확한 행방은 기억이 나지 않으나 혈혼으로서 약간의 감응은 가능하니까. 본존은 아직 영계에 살아 있고 내게 그녀의 행방에 관련한 단서가 모호하게 남아 있네.”
“정말 다행입니다! 저희가 어떻게든 선조 대인을 모시고 돌아오겠습니다!”
허교가 한시름을 놓고 포권을 하며 다짐했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걸세. 잘은 생각나지 않지만 본존은 다른 대륙 어딘가에 갇혀 있을 것이야. 자세한 사항은 내가 불완전한 기억을 정리한 후에 다시 말해주도록 하지. 이제 자네들이 최근 인족의 상황과 조금 전 합체기 수사에 대해 말해보게. 그자의 몸에서 건람빙염을 제외하고도 아주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어. 기억이 날 듯 말듯한데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군!”
혈령이 의혹을 드러냈고 허교가 연허기 수사들과 시선을 마주쳤다. 허교가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빙백 선조께서 실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족에 마재대겁(魔災大劫)이 도래해 당시 삼황과 칠요왕이 죽어나갔습니다. 이로 인해 인요족은 그 후 만여 년간 꽤나 혼란스러웠고…….”
허교는 지난 수만 년 동안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일일이 설명하며 간간이 허 가에 관한 일도 언급했다. 몇 번은 멸족당할 위기를 처하기도 했던 모양이었다.
대략의 이야기를 마치고 그는 허천우에게 들은 한립의 정보를 모두 혈혼 화신에게 전달했다.
* * *
한립은 머물던 누각으로 돌아와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창문을 통해 허 가 종묘 방향을 쳐다보던 그는 노란 방석을 꺼내 그 위에 앉았다.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은 그는 더 이상 움직임이 없었다.
사흘 후, 스스로를 혈령이라고 칭한 궁장 여인이 허교를 데리고 누각 앞에 서있었다. 그녀의 방문을 예감하고 있던 한립은 차분히 내려와 그들과 1층 대청으로 들어갔다.
“육신이 완성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궁장 여인이 자리에 앉자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이렇게 빨리 육신과 혈혼이 융합할 수 있었던 것은 한 수사의 정순한 법력 덕이었습니다.”
궁장 여인도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제 그녀의 핏빛 눈동자도 평범한 검은색으로 변해있었다.
“하하, 별것 아닙니다. 그런데 수사의 혈혼대법이 참으로 신묘합니다. 간단히 화신을 복제해 위기의 순간 큰 도움을 받을 수 있겠어요.”
“예전에 우연히 얻은 공법인데 그중 몇 가지는 확실히 목숨을 부지하기에 용이한 공법들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이 공법이 담긴 경전으로 수사의 은혜에 보답을 해도 되겠습니까?”
혈령이 눈을 깜빡이며 하얀 옥간을 꺼내 탁자에 올려두었다. 이에 한립은 동공을 수축하며 지척의 옥간을 잠시 내려다보곤 끌어왔다.
“혈령 수사의 마음은 감사하지만 경전에 적힌 비술이 제가 수련 중인 공법과 맞지 않아 익힐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잠시 옥간의 내용을 살핀 한립은 고개를 저으며 옥간을 탁자 위로 돌려놓았다.
“혹시 유가(儒家) 법결을 수련하십니까?”
혈령은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보냈다. 분명 마공을 익힌 새까만 제2원영을 보았던 것이다. 완전히 상반된 두 가지 공법을 익히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인족 전체를 통틀어도 한 손에 꼽힐 것이다.
“아닙니다. 그저 특수한 의식 비술을 수련해서 혈혼대법을 익히면 오히려 앞으로의 수행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제2원영이 이미 연허 후기의 경지에 이른 것을 보고 한 수사께서도 혈혼대법에 못지않은 비술을 지니고 있을 거라 예상은 했습니다. 보통 보조 원영은 본존보다 수행이 한참 떨어지기 마련이니까요. 저만해도 한 줄기 혈혼으로 만들어진 화신의 몸이라 연허 초기의 법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수사께서 필요가 없으시다 하니 제가 거두지요.”
혈령은 한립의 말에 놀라는 기색 없이 옥간을 가져갔다.
“혈혼대법과 제2원영은 각자의 장단점이 있군요. 최소한 제2원영은 수사처럼 오랫동안 본존과 떨어져 있을 수 없으니까요. 그랬다가는 크게 성가신 일이 벌어질 겁니다.”
“혈혼은 상고시대의 특수한 비술로 제련된 혼백과 의식이라 화신이 반서할 걱정은 없습니다. 그래서 혈혼대법을 만들어낸 혈정 상인의 명성이 대단했던 것이고요.”
빙긋 웃은 혈령이 말을 이었다.
“제게 물을 것이 있다고 하셨지요. 기억하는 것은 얼마 없지만 무엇이든 물어보신다면 답변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제 내력에 대해서는 혈령 수사께서도 어느 정도 아실 겁니다.”
한립의 시선이 곁의 허교를 스쳤다.
“혈령의 본존과 같은 인계 출신에, 우연히 하계에서 건람빙염을 얻으셨다 들었습니다. 게다가 저를 깨우는 것을 도와주셨으니 인연이 깊다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줄곧 궁금하던 인계의 일에 대해 몇 가지 묻고 싶습니다. 수사께서 도움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계의 일을 물어보신다고요?”
웬일인지 여인은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요?”
“문제라기보다는 제게 인계의 일을 물어보셔도 답을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궁장 여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에 한립의 미간이 좁아졌지만 상대가 이유를 말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제 기억에는 아예 인계와 연관된 부분이 없습니다. 인계에서 겪은 일은 아주 흐릿하게 남아 있을 뿐이라 서요.”
“혈혼봉인을 할 때 인계의 기억을 잃은 것입니까?”
“그게 아니라, 아예 본존이 인계의 기억을 복제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한립의 의문에 여인이 거의 확신하는 투로 답했다.
“어째서 말입니까?”
“그거야, 저도 알 수 없지요.”
궁장 여인은 굉장히 미안했지만 이번에 그를 찾아온 다른 이유가 있었기에 머뭇거리다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저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질문을 드리려 합니다.”
한립은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담담히 미소를 머금었다.
“물어보시지요.”
“인계에 계실 때 혹시 혈령의 본존이 남긴 다른 보물을 얻은 일은 없으십니까? 며칠 전 수사를 만나 뵈었을 때 아주 익숙한 기운을 느꼈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아무래도 저와 본존 모두에게 아주 중요한 물건일 거라는 판단이 들어서 말입니다.”
혈령은 무척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 말에 한립의 안색이 달라지며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사께서 말씀하신 물건이 무엇인지 짐작이 갑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립이 입에서 푸른색 작은 솥을 꺼내 들었다.
“허령정? 아니, 이건 허천정이로구나…….”
보물을 보자마자 탄성을 내뱉은 혈령이 눈을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이것을 알아보시는군요.”
“아마 허천정이 맞을 겁니다. 인계의 일은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지만 보자마자 이름이 떠올랐습니다. 본존이 지니고 있던 허령정이라는 보물과 매우 비슷한 기운을 내뿜는 것으로 보아 이것도 본존이 제련한 보물이겠지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본존이 극히 중시하던 물건 같습니다.”
혈령이 푸른 솥을 바라보며 설명했다.
“극히 중시한다라…….”
한립은 여인의 말을 곱씹었다.
“이유는 말씀 드릴 수 없지만 혈혼에 남아있던 본존의 강렬한 열망이 그렇게 말을 하는군요. 송구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저는 허천정을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회수하고자 합니다. 가능하겠는지요?”
“…….”
혈령의 말에 한립은 생각에 잠겨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허교, 물건들을 들이게!”
여인이 그것을 보고 바로 허교에게 명을 내렸다.
“……예!”
허교는 아깝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저물탁에서 크고 작은 두 개의 옥함과 남색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삼만 년 된 마옥화(魔玉花)와 여덟 마리 교룡을 부릴 수 있는 보물 팔교인(八蛟刃) 그리고 영석 삼천만 개의 가치를 지닌 극품 영석들입니다. 이것으로 허천정을 교환하고자 하는데 어떠십니까? 뿐만 아니라 본존이 인족으로 돌아오는 대로 반드시 답례를 할 것입니다.”
혈령은 눈을 반짝이며 절실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에 한립이 가볍게 미소를 짓고는 탁자 위의 물건들을 훑었다. 그러나 한립은 검은 꽃이 든 작은 옥함만 끌어왔다.
혈령은 순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마옥화는 제가 필요로 하던 것이라 받겠습니다. 하지만 영석과 보물은 되었습니다. 수중에 영석이나 보물이 부족한 것도 아니니까요. 제가 성인군자는 아니라도 은혜를 모르는 부류는 아닙니다. 하계에 있을 당시 건람빙염과 허천정 때문에 수차례 강적에게서 목숨을 구했는데 그것을 생각해서라도 당연히 돌려드려야지요. 게다가 마옥화는 진마계 특유의 영화(靈花)라 진귀한 영보에 못지않으니 이것만으로 충분합니다.”
한립이 미소를 지으며 작은 솥을 여인에게 날려 보냈다.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여인은 솥을 앞에 두고 잠시 주춤거렸다. 침묵하던 혈령이 안색을 바르게 하고 입을 열었다.
“허 가와 본존을 대신해 베풀어 주신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이후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허 가로 와 저를 찾아주십시오. 수행은 높지 않으나 몇몇 방면에서는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궁장 여인은 감사를 표한 뒤 핏빛 기운을 뿜어 푸른 솥과 탁자 위의 다른 물건들을 회수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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