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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052화 (809/2,000)
  • 1052화. 각성의식

    *

    한립은 인사를 받고 핏빛 연못으로 다가갔다.

    “혈혼대법에 따라 제작한 물건입니다. 연못 안의 영액은 허 씨 가문 수사들이 피와 각종 진귀한 재료들을 융합해 만든 것이고요. 영액은 혈혼을 깨우는 데 필수적이고 혈혼이 흩어지는 속도를 늦춰주는 기능도 합니다.”

    허원이 다가와 조용히 설명했다.

    “허나 각성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은 영액 아래 있겠지. 그것이 없다면 영액이 아무리 많아도 혈혼대법을 펼칠 수 없을 테니!”

    한립이 명청령안을 발동해 살펴보고는 평온히 말했다.

    “혜안을 지니셨습니다. 말씀하셨다시피 영액 아래 가문의 보물인 ‘혈정관’이 놓여 있습니다. 이것 없이는 혈혼이 육체를 이룰 수 없지요.”

    허원은 조금 놀랐으나 티 내지 않고 답했다.

    “혈정관을 이용해 혈혼이 육체를 응결한다! 각성의식이란 것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는군.”

    거대 진법을 살펴본 한립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십니까?”

    “벌써 말입니까?”

    허화와 허암이 놀라 멍해져 물었다. 분명 믿지 못하겠다는 기색이었다. 각성의식은 허 씨 가문 전체를 동원하고서도 펼치는데 반나절이 걸렸다.

    아무리 합체기 수사라도 대충 훑어보고 그것을 꿰뚫어 본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네. 자네들이 준비한 의식과 내가 이전에 연구했던 이종족 공법이 비슷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니까.”

    한립은 웃음을 거두었다.

    그다지 명성이 높지 않은 이종족이었지만 그들이 지닌 공법으로 혼백을 여러 개로 분리할 수 있었다. 미리 육신만 준비해 놓으면 바로 자신과 똑같은 화신을 복제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공법이 흥미롭고 수련 구결이 인족의 것과 유사해 한립은 복제해 갖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공법을 제대로 익히기 위해서는 이종족 특유의 천부적 자질을 지녀야 했고, 그런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로 익히면 공법의 반서(反噬)를 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안타깝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종족 공법과 인족의 혈혼대법은 세부적으로 차이가 컸으나 혼백을 분열해 새로운 육신에 깃들게 한다는 점에서는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원래 대법을 성공할 자신이 3, 4할 밖에 없던 한립은 그것을 깨닫고 확신이 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자리에서 대법이 반드시 성공할 거라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는 다른 수사들의 시선을 받으며 핏빛 연못과 진법 전체를 천천히 걸어 다녔다.

    “이만 하면 되었네. 때가 되면 내가 나설 것이니 자네들은 원래 하던 대로 의식을 거행하면 될 것이야.”

    그는 몇 바퀴를 둘러보다 한 마디만 하고 그대로 대청 구석으로 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버렸다. 허교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한참을 기다렸지만 한립은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그가 막 입을 떼려는데 귓가에 허원의 전음이 들려왔다. 단 몇 마디였지만 허교는 곧장 입을 다물고 다른 수사들과 함께 진법 안에 자리를 잡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시간이 흘러 하늘이 어두워지고 밤이 찾아왔다. 줄곧 눈을 감고 있던 허 가 수사들이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다. 적잖은 수사들이 고개를 들어 진법 중간의 높은 단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허원과 허교 등도 눈을 뜨고 그곳을 응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청 안이 빛으로 가득 찼다. 하얀 주술문자들이 높은 단에서 흘러나와 여러 개의 소형 진법을 이룬 것이다.

    우웅! 우웅! 우웅!

    소형 진법들이 진동하며 우윳빛 빛기둥을 분출해 아래쪽에 위치한 핏빛 연못으로 흡수되었다. 한립이 눈을 떴을 때는 고요하던 핏빛 연못이 요동치고 있었다.

    핏빛 연못을 중심으로 소용돌이가 생겨 핏물의 파랑 속에서 크고 작은 은색 주술 문자들이 깜빡거렸다.

    “시간이 되었다. 시작하라!”

    조용히 기다리던 허원이 대청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일갈했다. 이에 수사들은 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두 손으로 수결을 맺고 똑같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파파파팟!

    바닥의 진법에서 영기의 빛이 일어나고 곳곳에서 총 열여덟 개의 핏빛 빛기둥이 솟아올랐다. 사발 굵기의 빛기둥들은 대청의 천장을 통과해 끝없이 뻗어 나갔다.

    허원, 허화, 허암 세 사람은 연허기 수사로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진법의 눈에 자리를 잡고 다른 수사들이 법결을 읊자 각각 새빨간 깃발을 꺼내들었다.

    깃발이 떠오르자 그들은 혀끝을 깨물어 피를 내뱉었다. 핏덩이들이 휙! 하고 날아가 허공에서 핏빛 안개로 흩어져 작은 깃발들을 휘감았다.

    웅!

    작은 깃발들이 진동하며 핏빛 안개를 죄다 빨아들였고, 순식간에 세 개의 작은 깃발은 핏빛을 내뿜으며 크게 불어났다. 거대한 핏빛 깃발에서 흉흉한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거대 깃발들이 끊임없이 핏빛 기운을 방출해 진법 속으로 흘려보내 원래 진법 속의 핏빛 기운과 융합되어 핏빛 연못을 둘러쌌다. 피비린내와 기괴한 향기가 섞이더니 이상한 기운으로 변해 갔다.

    쿠르릉!

    바로 그때 핏빛 연못의 소용돌이에서 핏빛 화염으로 이루어진 빛 덩어리가 떠올랐다. 핏빛 화염 속에는 수정으로 만들어진 관(棺)이 떠있었다.

    관의 등장에 허 씨 가문 수사들의 표정이 굳었다. 각종 영기의 빛이 흐르는 몸으로 몇몇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법력을 극성으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핏빛 연못에서 솟아 오른 주술문자들이 혈정관으로 스며들어 사라지자 관 속에서 하얀 기운이 뭉쳐져 모호하게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허교가 소매를 털어 핏빛 작은 병을 방출했다. 그리고 한 손을 뻗어 손가락을 튕기며 법결들을 작은 병에 흡수시켰다.

    이에 작은 병의 뚜껑이 열리고 그 안에서 핏빛 실이 뻗어 나와 연못 위쪽의 관 속으로 향했다. 핏빛 실이 관 속으로 들어가자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관 속의 하얀 인영이 핏빛 실에 닿는 순간 붉게 물들기 시작한 것이다. 허 가 수사들도 이제부터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온몸에서 영기의 빛을 강하게 분출하고 주술을 외우는데 집중했다.

    허원 등 연허기 수사들 앞의 거대 핏빛 부채가 미친 듯이 펄럭이고 있었다. 진법 위쪽의 핏빛 기운 속에서 스멀스멀 핏빛 주술문자들이 새어 나와 혈정관의 주위를 맴돌았다.

    쉬익!

    그때 핏빛 연못 속 소용돌이에서 돌연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핏빛 실들이 빼곡하게 솟아올라 혈정관 속의 핏빛 인영을 휘감아 핏빛 고치를 만들었다. 그럼에도 핏빛 실들은 점점 더 많아지고 굵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핏빛 고치가 사람만 하게 커지고 머리 부분에 희미하게 눈과 코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의식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핏빛 실이 부단히 고치 속으로 파고드는 대신 이전에 인영을 휘감고 있던 핏빛 실은 하얗게 말라비틀어져 사라졌다.

    시간이 흐르고, 허 가 수사들이 진법에 힘을 실어도 더는 연못에서 핏빛 실이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몸집을 불리지 못하고 말라비틀어진 핏빛 실이 많아지자 핏빛 고치가 꿈틀거리며 고통스러워했다.

    허교 등 고계 수사들이 안색이 급변해 체내의 법력을 끌어올렸으나 혈정관 속의 핏빛 고치는 상태가 악화되기만 했다.

    허 가 수사들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법력이 고갈되어가자 허교가 초조한 마음으로 대청 구석의 한립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한립은 제자리에 앉아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 선배님…….”

    허교가 절박하게 그를 부르며 무어라 말하려는데 한립이 말을 끊었다.

    “조급해 할 것 없네. 내가 도와주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뒤통수를 스치자 검은빛 속에서 새까만 소인이 나타났다. 검은 갑옷을 입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소인은 바로 한립에 제2의 원영이었다.

    그리고 한립의 소매 속에서 금빛에 휩싸인 표린수가 빠져나왔다. 무시무시한 기운을 발산하는 영수의 두 눈이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한립이 갑자기 원영과 영수를 풀어놓자 허교 등은 당황했지만 한립은 신경 쓰지 않고 명을 내렸다.

    “가라.”

    머리 위의 원영이 두 손으로 수결을 맺고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다음 순간, 허화 노인 머리 위로 파공음이 울리고 검은 원영이 괴이하게 나타났다.

    허화 노인은 안색이 달라졌고 체내의 보물들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갑작스런 원영의 등장에 경계심이 인 것이다. 그러나 새까만 원영은 아래에 있는 노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거대한 핏빛 깃발로 두 손을 뻗었다.

    쉭! 푸푹!

    손바닥에서 검은 빛기둥이 날아갔다. 그러자 점점 빛을 잃어가던 거대 깃발이 웅! 하고 맑게 울며 다시 요란하게 핏빛을 방출했다. 이전보다 훨씬 밝은 빛이었다.

    이에 허화 노인은 반색하며 수결 모양을 바꿔 원영에게 힘을 보탰다.

    같은 시각, 허함 노인 곁에는 표린수가 나타났다. 영수는 입을 벌려 체내의 정순한 영력을 금빛 빛기둥으로 쏘아 보냈다. 역시 거대 깃발이 이전과 다른 핏빛을 방출했다.

    한립이 한 걸음 내딛자 순식간에 청백색 뇌전이 번뜩여 대장로 앞으로 이동했다. 한립은 놀란 허원 앞에서 세 번째 거대 깃발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손끝에서 쏘아져 나온 푸른빛이 주먹 크기의 푸른 연꽃으로 변해 날아갔다.

    우웅!

    푸른 연꽃을 빨아들인 핏빛 깃발은 격렬하게 몸을 떨더니 엄청난 양의 핏빛 주술문자들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이에 깃발을 발동하느라 기진맥진한 허원은 훨씬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이때 소용돌이가 배로 커져 핏빛 연못 전체로 번졌고, 한줄기씩 솟아오르던 핏빛 실은 빼곡한 실뭉치로 변해 혈정관 속으로 날아들었다.

    말라가던 핏빛 고치가 활력을 얻은 것처럼 빠른 속도로 여인의 형상을 갖추어갔다. 그것을 본 허교가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육신을 응결하고 있습니다!”

    허교는 곧바로 허 가 수사들에게 명을 내려 수결과 주문을 바꾸게 했다. 혈정관 주위를 맴돌던 핏빛 주술문자들이 미친 듯이 관 속으로 밀려들어 핏빛 고치 속으로 사라졌다.

    일다경 후, 핏빛 고치는 붉은 수정으로 조각한 사람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성공입니다.”

    허교가 길게 숨을 토해내며 법결을 마무리 짓자 다른 수사들도 동작을 멈추었다. 진법이 멈추자 대청 안이 고요해졌다.

    허 가 수사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핏빛 수정관을 쳐다보았지만 허교 등 고계 수사들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한립도 원영과 표린수를 거두고 흥미롭다는 얼굴로 핏빛 연못 위를 바라보았다.

    혈정관 속 핏빛 수정 조각에 챙! 하고 금이 가 눈이 있어야할 자리에 두 개의 구멍이 뚫리더니 눈동자가 나타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적인 눈빛이었다.

    미미하게 표정이 달라졌던 한립은 금방 평정을 되찾았지만 대청 안의 다른 수사들은 숨을 죽이고 혈정관의 변화를 주시했다.

    눈이 조용히 감기고 핏빛 눈동자가 사라지자 핏빛 수정 조각이 맑은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부서진 수정 가루들이 바람에 날아가자 그 자리에 절색의 여인이 서있었다.

    긴 다리와 탄력 있는 허리 그리고 옥처럼 매끈한 피부와 아름다운 얼굴은 거의 완벽했다.

    여인은 아름다운 광채로 몸 대부분을 가렸지만 대청 안의 사내들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말았다. 대청 안의 수사들이 원영기 이상이었으니 망정이지 평범한 수사들이었다면 추태를 보였을지 모른다.

    파앗.

    허교 등 고계 수사들이 손을 쓰려 하자 핏빛 기운을 반짝이며 여인의 몸에 붉은 궁장이 입혀졌다. 긴 속눈썹이 떨리며 천천히 눈을 뜬 여인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여인이 주변을 둘러보다 한립에게 오래 머물렀다.

    ‘이런.’

    한립은 한 줄기 의식의 힘이 그를 훑는 것을 느꼈다. 강대한 의식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자신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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