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1화. 혈혼(血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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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진 후, 한립은 산봉우리의 누각 속에서 가부좌를 하고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원래 물건만 전달하고 가볼 생각이었는데 허 가주가 적극적으로 말리며 며칠만 남아 달라 청해왔다.
그러면서 그가 전해 준 물건을 통해 빙백 선자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하는 것 아닌가! 그 말에 한립도 고민이 되었다.
빙백 선자의 행방에 대해 전혀 궁금하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이었다. 그 옛날 허천전(虛天殿)에서 허천정과 건람빙염을 얻은 것부터 대진 북야소극궁 일맥도 모두 빙백 선자와 관련이 있었다.
빙백 선자를 만나 몇 가지 풀리지 않은 의문을 해결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보름 정도는 기다려 봐도 괜찮겠지.’
물론 이 일이 한 달 넘게 지체된다면 더 이상 기다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진짜 빙백 선자의 행방을 알게 되어도 그 후 어찌할지는 상황을 봐야 할 것이다.
한립은 은색 부적을 꺼내들었다. 광한계 금제 유적에서 발견한 기운을 소진한 진선계 부적이었다.
합체급 단약을 아직 제련하지 못했고 법력을 늘리는 일도 급하지 않아 요즘 이 선계 부적들을 연구하는데 시간을 쏟고 있었다. 부적에 적힌 은과문만 파악해도 금궐옥서에 적힌 부적술을 익히는데 도움이 될 거란 판단에서였다.
과연 부적을 연구하고 나서 줄곧 진전이 없던 ‘천과부(天戈符)’에 대한 내용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금궐옥서 잔본에 기재된 이 은과문 부적은 유일한 공격용 부적이었고, 위력은 몰라도 복잡함으로는 다른 부적을 월등히 상회했다.
합체기에 이르러 천지법칙에 대해 어느 정도 깨달은 후에도 어렵게 느껴졌으니 이제 믿을 것은 진선계 부적 연구뿐이었다.
한립은 은색 부적을 들고 다른 손으로 허공에 무언가를 그려나갔다. 시간이 흐르자 가끔씩 크고 작은 은색 주술문자들이 나타났다가 폭발해 사라지거나 반짝이며 모양을 응결하기도 했다.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얼마 후, 산맥에 몇 개의 달이 떠오르고 늦은 밤이 되었다. 한립은 돌연 자리에서 창가로 다가가 산봉우리 하나를 응시했다.
“갑자기 기괴한 금제 파동이 느껴지다니. 이건 마치…….”
무언가를 떠올린 그가 얼른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놀랍게도 은빛으로 반짝이던 만월이 새빨갛게 변해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남색빛이 일렁이는 눈으로 산봉우리를 살피니 핏빛 기운이 가득 모여 있었다. 범상치 않은 금제의 파동이 그곳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데, 설마 허 씨 가문이 모종의 혈제(血祭)라도 지낸단 말인가? 하필 내가 있는데 그런 짓을? 내가 전해 준 물건과 연관된 일인가.”
그는 오래지 않아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
한립은 평정을 되찾고 다시 가부좌를 했다. 이후 며칠간 허천우가 하루에 한번 문안 인사를 온 것을 제외하면 다른 수사들은 그의 수련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인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으로 보아 허 씨 가문의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는 듯했다.
매일 밤 비슷한 천기현상과 금제파동이 느껴졌고 날이 밝으면 허천우가 찾아와 무언가 말을 하려다 못하고 돌아가고는 했다. 한립은 그것을 알면서도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흠…….’
* * *
5일째 되는 아침, 누각에서 부적을 연구하던 한립이 손바닥을 뒤집어 부적을 거두었다.
누각 밖에 허천우 외에 허교와 낯선 수사가 찾아와 있었다. 강력한 기운을 내뿜은 수사는 연허 후기의 수행을 지니고 있었다. 허 씨 가문이 이렇게 많은 고계 수사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아래층에서 허 가주가 공손히 용건을 말했다.
“한 선배님, 허교입니다. 혹시 시간이 되시면 저희를 만나주시겠습니까?”
“허 가주가 왔는가? 곧 내려갈 테니, 대청으로 들어와 잠시 기다리게.”
한립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오자 그의 눈에 연허 후기의 낯선 사내가 들어왔다. 허교와 나란히 선 수사는 낡은 회색 장포를 입은 청년으로 스물 일고여덟 살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선배님 이쪽은 허 가의 대장로인 ‘허원’이라 합니다. 며칠 전에야 폐관 수련을 마쳐 이제야 함께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허교가 한립을 보고 예를 취하고 곁에 선 청년을 소개해 주었다.
“허원 수사는 이미 연허기 최고봉에 이르러 합체기 고비를 넘을 준비를 하고 있구만.”
한립이 청년을 훑고 미소 지었다.
“선배님 말씀대로 고비를 뛰어넘기 위해 준비하던 중이었습니다. 허나 워낙 쉽지 않은 일이니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청년은 공손히 인사를 하고 탄식했다. 이에 한립이 미소를 머금으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눈짓으로 그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허 가주가 찾아온 것은 빙백 선자에 관한 소식을 알아내서 인가?”
한립이 거두절미하고 묻자 허교가 움찔하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선배님을 찾아뵌 이유는 다름이 아니오라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게?”
“솔직히 말씀 드리면, 선배님이 전달해 주신 물건에 빙백 선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는 실마리가 담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희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선배님께 부탁을 드리려 합니다.”
“무슨 일인지 상세하게 말해보게.”
“물론 그러겠습니다. 선배님께서는 혹시 혈혼대법(血魂大法)에 대해 아십니까?”
“혈혼대법! 귀에 익은 듯한데……. 수만 년 전 혈정 상인이 수련했던 혈혼대법을 말하는 것인가?”
허교의 말에 한립이 미간을 좁혔다.
“역시 들어보셨군요! 혈정 상인은 만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인족의 기재로 혈혼에 관한 비술을 만들어 여러 동급 이족들을 죽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혈정 상인은 오래전 목숨을 잃었지만 그분의 공법을 빙백 선자께서 우연히 발견해 지니고 계셨지요. 대부분 마도 공법에 가까워 익힐 수 없었지만 선조께서 그중 몇 가지 비술을 수련하시고 위기 상황에 목숨을 부지하게 해줄 보물을 제련해 남겨 두셨습니다.
이번에 선배님께서 가져다주신 물건이 바로 그중 하나인 ‘혈혼병’이었고요. 그 안에 선조의 혈혼이 들어있으니 혈혼만 깨울 수 있다면 선조의 소식을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허교가 담담히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한립의 표정을 살폈다. 혈혼병에 대해 언급할 때 눈을 번뜩인 것 말고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밤마다 나타난 기이한 천기현상은 자네들이 혈혼을 깨우려 했기 때문이겠군.”
“맞습니다. 그날 바로 수사들을 모아 각성의식을 진행했지요. 허나 안타깝게도…….”
허교가 말을 잊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혈혼이 너무 오래 봉인되어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저희의 혈맥이 정순하지 않아서인지 각성의식은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혈혼을 봉인한 부적을 뜯어 버린 상태라 이제 이틀 후면 각성 못한 혈혼은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
청년이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날더러 각성의식에 참가해달라는 것인가?”
“며칠 동안 온갖 방법을 시도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제 기댈 곳은 선배님뿐이라 찾아온 것이니 제발 도움을 주십시오.”
허교는 간절히 청했다.
“법력이 부족해서 실패하는 것이라면 도움을 줄 수 있네. 하지만 혈혼이나 각성의식 자체의 문제라면 어쩔 수 없네.”
한립이 턱을 쓸어내리며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다른 문제라면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겠습니다!”
허교가 크게 기뻐하며 감사를 표했고 허원과 허천우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 지금 바로 빙백 수사의 혈혼을 확인하고 각성의식을 준비하게.”
“예. 의식은 해가 진 다음 특정 시간에 거행해야 하지만 미리 살펴보시는 것도 좋겠지요!”
허교가 흔쾌히 대답했다.
빙백 선자만 찾을 수 있다면 허 씨 가문은 인족 최강의 가문이 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가주와 장로들이 빙백 선자의 혈혼을 깨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한립은 그들을 따라 어제 저녁까지 금제의 파동이 느껴지던 산봉우리로 날아갔다. 평범해 보이던 산봉우리는 도처에 다채로운 빛깔의 금제가 펼쳐져 있었고, 그 사이사이를 푸른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한립은 병사들을 의식으로 훑고는 그들이 전부 원영기 수사이고 백 명이 넘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천연성에 비하면 언급할 수준은 아니지만 한 가문이 보유한 병력치고는 엄청났다.
그의 얼굴을 살피던 허교가 옆에서 설명했다.
“저들이 바로 가문의 비밀 병사들이자 최정예병들입니다. 홀로 고계 수사들을 상대할 수는 없어도 서너 명이 협공해 화신기 수사를 상대할 수 있게 훈련하고 있지요.”
“오, 합공에 정통한 병사들이로구만.”
“허허, 그렇습니다. 각성의식이 방해받을까봐 신중을 기하기 위해 가문의 힘을 모두 이곳에 모아 둔 것입니다.”
허교가 법기를 꺼내 금제를 열고는 모두를 이끌고 산중턱의 사당으로 향했다. 사당 대문에는 커다랗게 ‘허(許)’ 자가 적힌 편액이 걸려 있었다.
대문 옆에는 비밀 병사 8명이 무표정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고, 커다란 대문 대신 한 사람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작은 쪽문만 열려 있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이곳은 저희 가문의 종묘가 위치한 곳이라 쪽문을 통해서 지하의 비밀 전각으로 내려가셔야 할 듯합니다.”
“아무래도 상관없네.”
허원이 송구하다며 고개를 숙이자 한립은 손을 저으며 개의치 않아 했다. 그의 말에 허원과 허교는 내심 크게 안심했다. 사소한 일이라도 상대가 불만을 품으면 그들에게는 큰 손해였다.
한립과 허 가 수사들은 쪽문을 지나 종묘로 들어갔다.
* * *
기다란 회랑을 지나 여러 번 골목을 돌고 나서야 그들은 종묘의 정전(正殿)을 지나 뒤쪽의 전각에 도착했다. 그 안에 은밀하게 숨겨진 밀실 안에 지하로 통하는 하얀 돌계단이 있었다.
계단 입구도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허교가 그들을 물렸고 바로 아래로 내려갔다.
휘잉.
어두운 통로에는 찬바람이 불어왔고, 양쪽에는 일정 거리를 두고 월광석이 박혀 주변을 밝혔다. 통로가 어두워졌다 밝아졌다하는 것이 더욱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돌계단은 그리 길지 않아 그들은 곧 지하 대청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
그곳을 둘러본 한립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새까만 옥석을 깎아 만든 대청 안은 꽤 넓었고 벽과 천장에 하얀 주술문자들이 복잡하게 새겨져 있었다.
주술문자들이 내뿜는 하얀 영기의 빛에 대청이 대낮처럼 밝았다.
그러나 대청 안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연못 형태의 높은 단이었다. 육각형 단은 거대한 진법으로 둘러 싸여 있었고 그 안의 원형 연못에 선홍색 액체가 담겨 그윽한 향기를 발산했다.
거대 진법 곳곳에 열댓 명의 허가 수사들이 가부좌를 하고 앉아 연못이 있는 담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중에는 허암과 허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 선배님을 뵙습니다! 저희 가문을 위해 힘을 보태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연허기 수사들은 한립이 허원, 허교와 같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멀리서 예를 올렸다.
“아직 감사의 말을 듣기에는 이르네. 정말 도움이 될 지는 알 수 없으니까.”
한립이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허교와 장로들은 다른 수사들을 불러 전부 인사를 시켰다.
아직 젊어 보이는 자부터 백발노인까지 나이는 다양했지만 사내와 여인을 가리지 않고 전부 화신기 수행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허 가의 핵심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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