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0화. 한염(寒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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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 일행이 산맥 중심의 거대한 전각 앞에 도착했을 때 생김새가 비슷한 두 노인이 기다리고 서 있었다.
“한 선배님, 제 숙부 되는 분들입니다! 원래 폐관 수련을 하시다 선배님이 오셨다는 소식에 직접 마중을 나오셨습니다.”
허교가 나서서 두 노인을 소개했다.
“허화, 허함이 한 선배님을 뵙습니다!”
두 노인이 서둘러 포권을 하고 인사했다. 연허 초기와 중기 수사들이었다. 평범한 수도 가문에 연허기 수사들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보통 작은 가문에는 화신기 수사가 가문의 근본이 되었기 때문이다.
천원경 내에서 허 가가 꽤 명성이 있다는 허천우의 말은 사실인 듯했다.
“나는 단지 부탁을 받아 찾아온 것뿐이니 그리 예의 차릴 것 없네.”
한립은 손을 내저으며 허 가의 수사들에게 퍽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노인들은 한립을 전각 안으로 안내했고 모두 자리에 앉자 시녀들이 차를 내왔다.
“선배님께서 선조이신 빙백 선자 혹은 그분의 직계 후인에게 전할 물건을 지니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허교가 먼저 본론을 꺼냈다.
“그렇다네. 그런데 천우 수사에게 들으니, 빙백 선자의 후인이 허 씨 가문만이 아니라더군. 허 가주가 직계 후인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어야 나도 물건을 내줄 것일세.”
한립이 단도직입적으로 원하는 바를 말했다.
“선배님께서는 어떤 증거를 원하시는지요? 저희가 빙백 선조의 혈맥이라는 사실은 인근 수도자 가문이라면 전부 알고 있습니다.”
허화라는 노인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예를 들자면 빙백 수사가 당시 수련했던 공법이나 신통 혹은 남겨 놓은 보물 같은 것이 증거가 될 수 있겠지.”
“선조께서 보물을 전부 지닌 채 실종되셨기 때문에 보여드릴 것이 없습니다. 공법이라면 몇 가지 전해 내려오고 있지만 수련 조건이 까다로워 익힐 수 있는 자가 몇 되지 않았지요. 허암 숙부께서 다행히 그 중 한 가지를 익히셨습니다. 숙부님, 괜찮으시면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허교가 허암을 향해 물었다.
“하찮은 재주이지만 선배님이 원하시니 보여드리겠습니다.”
망설이던 노인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매 속에서 깡마른 손을 꺼내자 남색 화염이 손바닥에 어렸다. 영기의 빛이 흐르고 화염이 남색 연꽃으로 피어났는데 얼마나 정교한지 진짜 연꽃 같았다.
“건람빙염(乾藍氷焰)!”
한립이 눈을 반짝이며 한염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뛰어난 식견이십니다. 이 한염(寒焰)은 빙백 선조의 이름난 신통으로 극성으로 수련하면 천리 빙벽을 쌓고 허공을 얼릴 수 있다고 하지요. 물론 저는 아직 부족한 수준입니다.”
허암의 마른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노인이 손바닥 위의 남색 연꽃을 허공에 띄우자 곁에 있던 또 다른 노인이 들고 있던 찻잔을 그 안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괴이하게도 찻잔이 남색 얼음덩어리로 변해 허공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이에 한립은 조금 놀랐다.
‘건람빙염이 이런 신통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찬찬히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가 허천정에서 얻은 건람빙염은 스스로 수련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서 경지를 높일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허암은 오랜 세월 수련을 통해 한염을 만들어냈고 공법 구결도 익혔으니 자연히 수행이 높아짐에 따라 건람빙염의 위력도 강해졌을 것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은 장단점이 있었다.
한염을 흡수해 연화시키면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지만 이후 위력을 강화하기 위해 외부의 힘이나 다른 극한의(劇寒) 화염이 필요했다.
하지만 노인이나 빙백 선자처럼 수련을 통해 스스로 한염을 만들면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한염 자체로도 더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한립은 인계에서 건람빙염을 얻었고, 그때 빙백 선자는 기껏해야 화신기 수사였을 테니 연허기 노인의 한염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허암 노인이 허공에 띄운 남색 기운은 순식간에 유리처럼 산산이 부서졌고 남색 찻잔도 아래로 추락했다.
곁의 허화 노인이 건람빙염에 휩싸인 찻잔을 끌어갔고, 동시에 그의 손에서 새빨간 기운이 번뜩이고 얼음이 녹아 사라졌다. 찻잔은 언제 얼어붙었었냐는 듯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떠십니까? 허암 숙부의 신통으로 저희 허 가와 빙백 선조의 관계를 입증할 수 있겠는지요.”
허교가 미소를 머금고 한립을 보았다.
“건람빙염이 확실하군. 게다가 허암 수사의 한염을 다루는 능력도 뛰어나고.”
“그 말씀은…….”
“하하, 안심하게. 허 가가 빙백 선자의 직계라는 것을 확인했으니 물건을 내주겠네.”
한립이 조용히 웃으며 탁자 위에 남색 옥간과 새하얀 옥함을 꺼내놓았다. 둘 다 금색 부적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백의 사내는 숙연한 얼굴로 물건을 살피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떤 분이 이것들을 부탁하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말해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 자네들은 모르는 분일 걸세. 그 선배님은 인요족이 아닐뿐더러 나조차도 우러러 봐야하는 존재니까 말일세.”
“이종족이란 말씀이십니까?”
“선배님조차 우러러 봐야하는 수행이라면…….”
허 가의 사람들이 놀라 웅얼거렸다. 한립의 대답이 그들의 예상을 벗어났던 것이다. 한립은 그들의 반응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허교가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선조께서 떠나실 때만해도 막 합체기에 이르셨지만 만황세계로 진입해 풍원대륙 곳곳을 돌아다니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종족 수사 몇 분과 친분을 나누는 것도 가능한 이야기지요. 이 물건들을 통해 선조의 행방과 관련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요?”
“그럴 지도 모르겠군.”
허암 등 노인들이 허교와 눈을 마주치고 희색을 드러냈고, 허천우와 거한도 들뜬 기색이 다분했다.
“아무래도 확인을 해봐야겠습니다. 선배님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곧 돌아오겠습니다. 허암 숙부님, 천우와 함께 선배님을 모셔주십시오.”
허교가 심호흡을 하며 탁자 위의 물건을 챙겨 한립에게 양해를 구했다.
“편한 대로 하게.”
한립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허교가 허화 노인과 거한을 데리고 자리를 떠나자 대청 안에는 한립과 허천우 그리고 허암만 남게 되었다.
“천연성에서 지내실 당시 천우를 지도해 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아이가 이렇게 빨리 화신기에 도달하지 못했겠지요. 천우를 대신해 감사인사를 올리겠습니다.”
허암이 한담을 주고받다 고개를 숙였다.
“아닐세, 천우 수사의 자질이 뛰어났던 게지.”
“그때 일을 들으니 선배님께서 빙백 선조님과 인연이 있으신 것 같다던데 사실인지요?”
“빙백 선자를 뵌 일은 없네만 인연이 없다고는 할 수 없네. 그래서 이런 부탁도 받게 된 것이고 말이야. 수사도 이것을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걸세.”
한립은 호기심 가득한 노인을 보고 검지에서 남색 한염을 일으켰다.
파앗.
남색 한염은 작게 폭발해 남색 얼음꽃으로 피어났다.
“거, 건람빙염!”
놀란 노인이 남색 얼음꽃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설마 선배님께서도…….”
옆에서 지켜보던 허천우가 깜짝 놀라 끼어들었다.
“자네들 생각과 달리 관련 공법을 익힌 것은 아니고, 빙백 선자께서 하계에 남기신 한염을 우연히 얻게 되었을 뿐이라네.”
“그런 것이었군요.”
허암은 내심 궁금한 것이 많았으나 자세히 물어볼 수 없었다.
같은 시각, 금제로 층층이 둘러싸인 밀실 안에서 가주와 허화 노인 그리고 거한이 무언가를 상의하고 있었다.
“부적이 너무 강력해 내 수행으로는 강제로 뜯어낼 수 없겠네. 한 선배님 말대로 이종족 대승기 수사가 내어준 물건이 맞는 모양이야.”
허화 노인이 부적을 떼어내려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다 실패했다.
“대승기 수사의 수법이라면 금제 부적이 이렇게 현묘한 것도 당연합니다. 부적을 강제로 없애려다가는 내용물까지 훼손될 텐데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허교가 매끈한 턱을 쓸어내리며 고민에 빠졌다.
“가주인 자네가 시도해 보고 싶은 게 있다면 해보게.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될 것이니.”
“알겠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허교가 자신의 손목을 향해 입에서 하얀 빛을 뿜었다. 그러자 날카로운 무언가가 그의 손목을 긋고 입 안으로 돌아갔다.
다음 순간 손목에 가느다란 혈선이 생기고 새빨간 핏방울들이 옥간을 봉인한 부적 위로 떨어졌다. 핏방울은 순식간에 부적 속으로 스며들었다.
파앗.
부적이 금빛을 발산하고 표면에 작은 금색 주술문자들이 떠올랐다. 금색 주술문자들이 흩어져 사라진 후에는 부적의 강력한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역시!”
허교는 크게 기뻐하며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빙백 선자의 후인만이 부적을 뜯을 수 있게 돼 있었던 것이다.
훅! 하고 입에서 바람을 뿜자 금색 부적이 소리 없이 옥간에서 떨어져 내렸다.
지켜보던 노인과 거한의 얼굴도 한결 밝아졌다. 허교는 똑같은 방법으로 옥함에 붙은 부적도 떼어낸 다음, 남색 옥간으로 손을 뻗었다.
백의 사내는 옥간을 이마에 대고는 눈을 감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내의 얼굴에 놀람이 어렸다. 허화 노인과 거한은 긴장된 기색으로 사내가 의식을 거두기만을 기다렸다.
일다경 후 옥간을 이마에서 떼 낸 허교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어라 쓰여 있던가?”
“숙부님께서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허교는 복잡한 얼굴로 옥간을 넘겨주고 입을 다물었다. 노인이 옥간에 의식을 불어넣고 허교는 옥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옥함 뚜껑을 열자 손가락 크기의 새빨간 병이 들어있었다. 표면에 기이한 문양이 새겨진 작은 병에서 미약하게 피비린내 같은 것이 풍겼다.
“엇, 이것은!”
거한은 단박에 작은 병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그래, 우리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혈혼병(血魂甁)이다. 원래 한 쌍이었는데 빙백 선조께서 하나를 가지고 가셔서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았지. 이게 이렇게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허교가 어두운 얼굴로 답했다.
“정말 혈혼병이었다니…….”
“너는 당장 내 영패를 들고나가 비밀 병사들을 소집해 종묘가 있는 산봉우리를 겹겹이 지키게 하고, 인근의 금제도 전부 개방해 개미 새끼 한 마리 드나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 또한 폐관 수련 중인 큰 숙부께 출관을 청하고 종묘로 모셔 오거라.”
“정말 비밀 병사들을 소집하고 큰 숙부님께 출관을 청하란 말씀이십니까?”
허교의 명에 거한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빙백 선조님과 관련된 중차대한 일이니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고 꼭 큰 숙부님께서 나셔주셔야 할 일이고.”
“선조의 행방에 대한 실마리가 생긴 것이군요.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보겠습니다!”
거한이 주저하지 않고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허교는 거한이 밀실을 나가자 옥함 속 작은 병으로 시선을 옮겼다. 잠시 후 허화도 옥간의 내용을 확인하고 눈을 떴다.
“선조께서 정말 만황세계로 나가셨다 다른 대륙까지 가셨을 줄이야!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기에 그분의 한 줄기 혈혼(血魂)만이 돌아왔단 말인가.”
“옥간에는 혈혼비술(血魂祕術)을 제외하면 다른 내용은 없었습니다. ‘혈정관(血晶棺)’을 이용해 혈혼을 깨워야만 내막을 알 수 있겠지요. 빙백 선조께서 오래 전 혈정관과 혈혼병 한 쌍을 준비해 두신 것이 참으로 다행입니다. 안 그랬으면 혈혼을 두고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을 텐데요.”
“그보다 부적을 떼면 수일 내로 각성의식(覺醒儀式)을 해야 한다고 적혀 있었네. 혈혼병에 오랜 세월 담겨 있던 혈혼이 흩어져 버릴 수도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장 오늘 밤에 의식을 거행할 생각이니까요.”
허화가 걱정스런 기색을 드러내자 허교가 결연히 다짐했다.
“그게 가장 좋겠군. 그럼 한 선배님께는 무어라 말씀을 드려야겠는가? 천우의 말대로 빙백 선조님과 인연이 있는 분이고 또 직접 혈혼을 가져다주셨으니 우리 가문에 악의는 없으시겠지?”
“이제 막 합체기에 이르셨지만 상고 진법에 정통하시고 실력이 뛰어난 수사입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앞으로 가문에 큰 도움이 될 테지요. 어떻게든 이곳에 며칠 모셔두고 각성의식을 마친 다음 친분을 다지는 것이 좋겠습니다.”
“자네 말이 맞네. 그렇게 하도록 하세.”
허교의 결정에 허화가 고개를 끄덕이고 홀로 밀실을 나서려 했다.
“잠시만요. 성의를 표하기 위해 가주인 저도 숙부님과 함께 가겠습니다.”
“그도 그렇군! 합체기 선배님을 대하는 것인데 공손할수록 좋겠지.”
이렇게 허교는 옥함을 챙겨 노인과 같이 밀실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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