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9화. 미신환경(迷蜃幻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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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롱 선자라면 하계에서 돌아왔다는 천규신랑(天奎神狼)의 비(妃)가 아닙니까. 듣자니 영롱 수사는 오소 선배님의 직계 후인도 아니고 꽤나 랑왕의 총애를 받았다던데요.”
보라색 머리 부인이 이 일에 대해 아는지 놀라 물었다.
“맞습니다. 영롱 수사는 하계에서 돌아왔을 때만 해도 화신 후기의 수행을 지녔었는데 지난번에 보았을 때는 연허 중기 최정상이 되어있더군요. 마재가 도래하기 전에 고비를 넘기고 후기에 이를 가능성도 있어 보였습니다. 당초 그녀의 천부적 자질은 은월랑족 내에서도 유명했으니까요. 오랜 세월 하계에 갇혀 있지만 않았더라도 진작 우리와 같은 경지에 올랐을 것입니다.”
가면 여인은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자질이 뛰어나더라도 오소 선배님 곁에 수백 년간 머물지 못했으면 그렇게 빨리 수행을 높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소 선배님의 신통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뜻이지요. 그보다 오소 선배님께서는 어찌 랑왕의 비를 데려다 곁에 두시는 걸까요?”
보라색 머리 부인이 이 일에 관심이 많은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계에서 돌아온 이후 영롱 선자와 천랑 수사 사이에 갈등이 일어 오소 선배님이 그녀를 데리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합니다. 오랜 세월 하계에 갇혀 있었는데 랑왕이 도움을 주지 않은 것에 불만이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가면 여인이 주저하며 확실하지 않은 어투로 답했다.
“오소 선배님께서 무사하시다면 다른 일은 상관없습니다. 이제 야차족과 목족에서 보낸 사자(使者)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지요. 아마 마재와 관련한 일로…….”
백포 노인은 곧바로 화제를 돌렸고 다른 장로들도 정신을 번쩍 차리고 논의에 참여했다. 그렇게 천연성 장로들은 거의 반나절을 전당 안에서 머물다 흩어졌다.
* * *
이틀 후, 천연성 어딘가의 전송진에서 빛이 번쩍이고 두 명이 사라졌다.
우웅!
동시에 천연성에서 멀리 떨어진 대규모 성의 전당 안에서 전송진이 진동했다.
“……!”
주변에서 노닥거리고 있던 병사들은 흠칫 놀라 그곳을 쳐다보았다. 성 안의 고계 수사들이 전송진을 중시해 매일 지키고는 있지만 전송 비용이 워낙 비싸 실제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일단 전송진이 발동하면 나타나는 이들은 대부분 고계 수사였기 때문에 다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공손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이 풍림성(楓林城)인가?”
전송진에서 나타난 청년이 병사 중 하나를 보고 차분히 물었다.
“예, 이곳이 바로 풍림성입니다. 선배님, 풍림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병사는 전송진에서 나타난 이들을 훑어보았지만 수행을 헤아릴 수 없자 바짝 긴장했다.
“풍림성이라니 되었군.”
청년은 미소를 지으며 더는 병사들을 상대하지 않고 여인을 데리고 대청 문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천연성에서 전송되어 온 한립과 허천우로 풍림성은 허 가로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성이었다. 건물을 빠져나오자 그들 앞에 청석으로 만들어진 광장이 펼쳐졌다.
광장은 소박한 편이라 바닥에 깔린 푸른 벽돌들을 제외하면 다른 장식은 없었다. 또 주변에 몇몇 누각과 전당이 보였지만 순찰을 도는 병사들을 제외하면 드나드는 이가 거의 없었다.
한립은 의식을 조금 멀리 퍼트려 광장이 거대한 산봉우리 중턱에 세워져 있으며 산 아래로 집들이 빼곡하게 서 있고 반듯반듯한 길들이 정비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산봉우리 정상을 바라보았다. 정상에 우뚝 솟아 있는 작은 궁전은 굉장히 화려했고 안에는 연허기 수사들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곳을 담당하는 고계 수사들인가 보군.’
한립은 의식을 회수하고 푸른 기운으로 여인을 감싸 날아올랐다.
산 정상 궁전의 편전 안, 연허기 수사 셋이 과실주와 안주가 가득 놓인 탁자를 앞에 두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들은 놀란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방금 강대한 의식이 이곳을 훑고 지나갔구나. 어느 합체기 선배님이 본 성을 찾은 것일까?”
미색 장포를 입은 노인이 중얼거렸다.
“의식으로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성황 곁의 대인들인지 아니면 천연성 장로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얀 갑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조금 놀란 얼굴로 답했다.
“대인 분들은 천원성에서 무언가를 준비하느라 바쁘다고 들었습니다. 여기까지 올 틈이 없을 텐데요. 천연성의 장로가 아닐까요?”
금색 머리를 말아 올린 청년이 입을 열었다.
“휴우, 천연성 장로라면 그냥 지나가는 것일 게다! 바삐 떠나는 것으로 보아 따로 인사를 올리지 않아도 될 것 같고.”
미색 장포 노인이 긴장을 풀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합체기 수사가 천원경 구석의 풍림성까지는 어찌 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합체기 수사가 무얼 하는지 우리가 어찌 알겠습니까! 우리를 찾는 것만 아니라면 감사하게 생각하고 신경 끄면 그만이지요.”
백갑(白甲) 중년인의 말에 금발 청년이 얼른 답했다.
“그 말도 맞지만 일단 아랫것들에게 한동안 몸을 사리고 괜한 일을 만들지 말라 분부를 해놓아야겠구나.”
미색 장포 노인이 고민하다 신중하게 답했다.
“형님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천연성 소관도 아니니 그쪽 장로가 오든 말든 상관은 없으나 그래도 합체기 수사는 조심하는 것이 좋겠지요.”
백갑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풍림성의 성주와 부성주들로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는 얼굴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 시각 한립은 허천우의 안내를 받아 남쪽으로 날아가는 중이었다. 풍림성에서 한 달 정도 더 가야 허 씨 가문에 도착할 수 있어 그들은 비차를 타고 고공을 날아갔다.
퍽 외진 곳인데도 범인들이 드문드문 출현했고, 몇몇 작은 마을에는 범인과 수도자가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십여 일을 더 이동해 구릉지대에 진입하자 협곡에 사는 짐승 무리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구릉지대는 다른 곳에 비해 영기도 매우 희박했다.
“허 가는 어찌 이런 곳에 가문을 세운 것이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원인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한립의 물음에 허천우가 빙긋 웃으며 능청스럽게 뜸을 들였다.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하군!”
한립은 무척 궁금했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 후로 그들은 십여 일은 더 날아갔고 푸른 기운이 돌던 구릉지대는 점점 붉은 빛을 띠기 시작했다.
산이고 돌이고 그 위로 자라는 식물들까지 붉은 기운을 띠고 있었다. 한립은 처음에는 개의치 않았지만 며칠 더 날아가자 표정이 달라졌다.
“이제 아셨나 봅니다.”
“매장량이 상당한 정동(精銅) 광맥이 있었군. 영기가 충분하지 못해도 가문을 건립할 만 해.”
웃음기 어린 허천우의 물음에 한립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희 가문이 만 년 전 이곳에 자리를 잡을 때도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가문의 숙조님들께서 이곳으로 결정을 내리셨지요. 그 후로 가문은 광산 덕에 부(富)를 누렸지만, 자제들은 영기가 부족한 곳에서 수련한 탓에 어쩔 수 없이 그 영향을 받았습니다. 득과 실 중 어느 것이 큰지는 확실히 말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허천우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후, 드디어 시야에 초록빛이 들어왔다.
‘도착했구나.’
풍부한 영기에 한립은 정신이 맑아졌고 허 씨 가문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녹음이 푸른 작은 산맥이 나타났다. 평범한 영맥을 지녔지만 주변의 척박한 땅과 비교하면 훨씬 나았다.
열댓 개의 산봉우리로 이루어진 산맥에는 다양한 건물들이 가득했고 희미하게 현묘한 파동이 존재했다.
“선배님, 이곳이 허 씨 가문입니다. 제가 아버지께 먼저 소식을 전해도 되겠습니까?”
비차가 산맥 인근에서 멈추자 허천우가 물었다.
“허 가에서 나름 괜찮은 곳을 찾아냈군. 이곳에서 잠시 기다릴 테니 그렇게 하게.”
한립이 의식으로 산맥을 훑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낯선 비차의 등장에 산맥 아래에서 경계를 서던 허 씨 가문의 수사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금제 파동이 일고 열댓 개의 빛줄기가 각각의 산봉우리에서 날아올랐는데 그다지 호의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이에 허천우가 즉시 하얀 빛줄기로 변해 가문 수사들을 향해 날아갔다.
허 가 수사들은 그녀를 바로 알아보고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웃음을 머금은 허천우는 그들과 몇 마디 나눈 후 산맥으로 내려갔다.
비차에 남아 기다리던 한립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맥에서 풍악을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두 무리의 하얀색과 붉은색으로 이루어진 궁장차림의 묘령의 여인들이 날아왔다. 수행은 결단기 혹은 축기기 수준에 불과했지만 하나같이 용모가 빼어난 미인들이었다.
그 뒤로 세 명이 바짝 뒤따랐는데 허천우와 백의(白衣) 사내 그리고 구불구불한 수염의 거한이 함께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궁장 여인들은 비차에서 떨어진 곳에 조용히 멈추었고 허천우 일행은 한립에게 가까이 접근했다.
“허교가 한 선배님을 뵙습니다! 미리 마중 나오지 못해 죄송합니다.”
평범한 외모를 지닌 젊은 백의 사내는 화신 후기 수사였다.
“허교 수사가 허 가의 가주가 맞는가?”
한립은 눈을 반짝이고 백의 사내를 훑었다.
“예, 제가 천년 동안 허 가의 가주로 가문의 일을 돌보고 있습니다!”
“내가 이번에 찾아온 목적은 천우 수사가 허 가주에게 이미 얘기했겠지?”
“저희 선조의 일로 여기까지 찾아주시다니 감사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안으로 들어가셔서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그러게.”
백의 사내의 말에 한립이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립은 비차를 회수하고 아래로 내려갔고 그의 곁에서 백의 사내와 거한이 보좌를 했다. 그리고 허천우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얌전히 그 뒤를 따랐다.
산맥 위에서 허교가 청록색 영패를 꺼내 천천히 허공을 그었다.
파앗.
갑자기 산맥에 강렬한 공간파동이 생기고 열댓 개의 산봉우리들이 일그러지며 풍경이 확 달라졌다. 산봉우리들은 그대로였지만 그 위치가 완전히 바뀌었다.
적이 강력한 신통으로 허 가의 산봉우리를 공격해도 일격으로는 절대 주요 건물을 부술 수 없을 것이다.
“미신환경(迷蜃幻境)! 이곳에 전설 속의 상고 금제가 펼쳐져 있을 줄은 몰랐군.”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한 마디 했다.
“허허, 부끄럽습니다. 만 년 전 저희 가문에 천부적인 자질을 지닌 진법사가 있었습니다. 그 진법사가 평생을 다해 상고 환진(幻陣)을 7, 8할 정도 복원했습니다. 수행이 낮아 일찍 수명이 다하지 않았다면 이 상고 진법도 완벽해졌을 텐데 아쉬운 일이지요.”
가볍게 웃으며 설명하는 허교는 자신의 가문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훌륭하네. 허 씨 가문이 든든하겠어.”
한립은 미소를 지으며 간단한 칭찬 외에는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이에 허교는 조금 실망했다. 드물게 합체기 수사를 모셨으니 금제대진에 대해 자세한 평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선배님께서는 이 진법으로 합체기 수사의 공격도 막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그때 곁에 있던 거한이 우렁차게 물었다.
“합체기 수사의 공격이라. 하하…….”
한립은 슬쩍 거한을 보고는 명확한 답을 주지 않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 말씀은 이 진법이 합체기 선배님께는 무용지물이란 뜻인지요?”
“상고 진법을 완전히 복원하지 못해 몇 가지 약점이 있네. 진법에 약한 수사라면 파훼하는데 약간 시간이 걸리겠지만 어느 정도 진법에 정통한 합체기 수사라면 불완전한 미신환경으로는 절대 막을 수 없겠지.”
잠시 진법을 둘러본 한립은 금제가 펼쳐져 있는 산맥의 몇몇 곳을 손가락으로 짚어 보였다.
“진법의 허점을 알려주신 것입니까?”
백의 사내가 깜짝 놀라 소리를 높이자 허천우와 거한의 표정이 달라졌다.
“별것 아닐세. 비슷한 진법에 대해 경전에서 읽은 기억이 있어 다른 점을 지적했을 뿐이네.”
한립은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미신환경이라는 상고 진법은 인족에서는 실전된 지 오래지만 천원대륙을 가로지르면서 몇몇 이족 시장에서 인족의 상고 진법에 관한 경전들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인족의 상고 문자로 적힌 데다 진법을 중시하지 않는 종족들이라 잡화점에 쌓여 있어도 아무도 구입하는 이가 없었다. 어쩌다 인족의 상고경전이 거기까지 흘러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립이 이런 횡재를 놓칠 리 없었고 헐값에 상고 진법에 관한 경전을 전부 사들여 돌아오는 내내 연구했다.
그러다 오늘 허 가의 진법을 보았으니 경전 속의 완전한 상고 진법과 비교해 허점을 찾아내는 일은 무척 쉬운 일이었다.
허교는 이런 사정을 몰랐지만, 한립의 말에서 상대가 완전한 미신환경을 펼치는 방법을 알고 있을 거라 추측하고 낯빛이 달라졌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의 눈에 허 가를 지키는 불완전한 금제대진(禁制大陣)은 어린애 장난과 다름없을 것이다. 허교의 미소가 어색하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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