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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048화 (805/2,000)

1048화. 허 가(家)

*

“그리 예의 차릴 것 없네. 선자와 나도 어찌 보면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이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지.”

한립은 빙백 선자의 후인을 앞에 두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허 선자가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시녀가 조용히 다가와 향기로운 차를 두 잔 따라냈다.

“너도 물러가고, 내 명이 있기 전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거라.”

“예!”

시녀가 물러가고 한립은 대문을 향해 소매를 털었다. 그러자 누각 대문에 하얀 기운이 반짝이며 닫혔고 대청 사방에 남색빛이 어리며 바깥과 단절되었다.

그것을 본 허 선자가 속으로 흠칫 놀라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은밀한 이야기가 오갈 것이 아니라면 상대가 금제를 펼칠 리 없었다.

“이번에 내가 허 선자를 찾아온 것은 확실히 물어볼 것이 있어서라네. 선자는 빙백 선자의 후인이 맞는가?”

“사실입니다. 어찌 이런 일로 선배님을 속이겠는지요.”

“잘 됐군. 그렇다면 빙백 선자의 행방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있는가? 선배님을 뵈어야 할 일이 있어 묻는 것이라네.”

“직접 뵈어야 한단 말입니까?”

“어찌 그러지? 수사도 선배님의 행방을 모르는 것인가?”

여인의 반응에 한립이 미간을 좁혔다.

“비록 제가 선조의 피를 이어받은 것은 사실입니다만, 가문 어른들의 말씀을 들으니 선조께서 막 합체기 경지에 이르셨을 때 천연성의 장로직도 거절하시고 다른 중요한 일로 출타하셨다가 행방이 묘연해지셨다고 합니다.”

허 선자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렇게 됐다면 직접 만나기는 어렵겠군. 빙백 선자의 일맥 중에 허 선자를 제외하고 다른 후인이 더 있는가?”

“솔직히 말씀 드리면 당초 저희 선조이신 빙백 선자의 일맥은 이미 열댓 개의 지류로 나뉘었습니다. 심지어 그 중 두 곳은 선조가 남기신 공법을 기반으로 작은 종문을 세우기도 했고요. 하지만 가장 가까운 것은 저희 허 씨 가문이 맞습니다. 선조의 직계 혈통이 이어져 그 분의 성을 따라 오늘날 까지 가문을 이어왔으니까요.”

그가 빙백 선자와 어떤 인연이 있다는 것을 짐작한 여인은 기탄없이 대답했다.

“그럼 현재 허 가를 주관하는 이는 누구지? 혹시 선자는 아닌가?”

“농이시지요? 저희가 진령세가 정도는 아니어도 천원성에서는 어느 정도 명성이 있습니다. 현재 제 부친께서 가주를 맡고 계시고 그 외에 숙조(叔祖)분들이 몇 분 더 계십니다.”

“내 선자의 부친을 만나 뵈어야겠는데 괜찮을지 모르겠군.”

“선배님이 저희 허 씨 가문에 들러주신다면 가문의 영광일 것입니다. 다만…… 대충이라도 그 이유를 알려주실 수는 없겠는지요?”

여인이 망설이다 이유를 물었다.

“하하, 걱정할 일은 아닐세! 부탁을 받은 물건이 있어 빙백 선자께 전해 드려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면 직계 혈맥인 후인에게 전달해야 할 것 같아서 묻는 것이네. 허 가가 빙백 선자의 가장 가까운 일맥이라면 당연히 가주인 선자의 부친께 물건을 전하는 것이 옳겠지.”

“그런 것이었군요. 어떤 분의 부탁을 받은 것인지 알 수 있을까요?”

“아마 선자는 모르는 분일 게야. 다른 허 가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놀란 여인의 물음에 한립이 고개를 저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직접 선배님을 모시지요! 마침 순찰 임무를 마치고 반년간 휴가를 받은 참입니다. 전송진을 이용하면 충분히 다녀올 만합니다.”

“허 선자가 직접 안내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바로 동부로 돌아가 준비하고 이틀 후에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허 선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립을 향해 공손히 물었다.

“나는 따로 준비할 것이 없어 언제든 괜찮네. 선자가 이틀 후가 편하다면 그리하게.”

한립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후에 뵙겠습니다! 그보다 선배님, 제 본명은 ‘허천우’라 하오니 앞으로는 그냥 이름으로 불러주셔도 됩니다. 어찌 선배님께 선자라는 칭호로 불리겠습니까.”

“하하, 천우 수사가 불편하다면 어쩔 수 없겠지.”

여인의 뜻밖의 말에 한립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허천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취선각을 떠났다. 그녀의 동부는 천연성 근처였지만 오고가는 시간을 빼면 준비하는데 이틀도 빠듯했다.

한립은 네 명의 수사들이 머무는 곳에 가서 그들이 구해 놓은 재료를 거두고 새로운 목록을 주었다. 그 후로 취선각으로 돌아와 한 발자국도 나서지 않았다.

* * *

천연성 모처의 전당 안, 대여섯 명의 수사들이 모여 기밀사항을 논의 중이었다.

“그렇다면 그 자가 천연성에 들어올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겠군요!”

은발에 허약해 보이는 백포(白袍) 노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곡 장로, 빈승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한 수사는 일심(一心)으로 수련에만 정진하는 수사라 어떤 세력에도 들어갈 생각이 없었어요.”

금색 가사를 걸친 노승이 한숨을 쉬며 답했다. 바로 한립을 찾아갔던 금월 선사였다. 백포 노인은 물론이고 이곳에 모인 이들은 전부 금월 선사와 같은 합체기 수사들이었다.

“결국 장로회의 구성원을 보충할 방법이 없단 말씀입니까? 이종족 침공이 있기 전에는 장로회가 완전했고 은광 수사가 장로 후보로 거론되기까지 했었는데 말입니다. 장로 10명이 꽉 차지 않은 이때에, 만일 마재(魔災)라도 도래해 마족들이 본 성을 둘러싸고 공격하면 우린 끝입니다. 그런 일이 예전에 없었던 것도 아니고요.”

얼굴에 연한 금빛이 도는 거한이 냉랭히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인족 패황, 성황 게다가 요족의 칠대요왕까지 수하의 합체기 수사들을 내놓지 않으려 하니까요. 다들 마계가 천 년 내로 강림할지 모른다고 예상하는데 어떻게든 힘을 모아 스스로 살 궁리를 먼저 하지 않겠습니까. 지난번 마겁(魔劫)에 1대 삼황과 칠요왕 중 절반이 죽어 나갔으니 그 전철을 밟고 싶지 않겠지요.”

금월 선사가 안타깝다는 듯 대답했다.

“금월 수사, 마계가 정말 천년 내로 영계와 겹쳐지겠습니까?”

은색 가면을 쓴 여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분명합니다. 성도(聖島)에서도 경계하라 소식이 왔고, 막간리 대인께서 친히 성반(星盤)을 이용해 진마계에 다녀왔으니까요. 마계는 지금 영계를 침입하려 전쟁 준비가 한창이라 합니다.

선배님께서 자세히 조사하기 전 마계의 성조에게 발각되어 안타깝게 다시 영계로 돌아오셨지요. 이는 천 년이 아니라 수백 년 내로도 마계가 강림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족과 요족 그리고 인근 몇몇 종족들이 머무는 구역이 전부 마계와 인접한 지역이라 큰 재난을 면할 수 없을 겁니다.”

“성도와 막 대인의 말씀이 증거라면 거짓일 리 없겠군요. 삼황과 칠요왕 및 다른 세력들도 전부 비슷한 소식을 접해 우리 천연성 장로회가 장로를 보충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금월 선사의 말에 백포 노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럴 겁니다. 마겁 기간에는 목족이나 야차족 등 이종족들도 몸을 사려 인족과 요족을 공격하지 않지요. 그렇다면 삼황과 칠요왕도 천연성에 병력을 내줄 이유가 없지요. 어차피 두 종족을 보호하는 금제는 마계 강림에는 소용이 없으니까요.

당초 삼황칠지가 건립된 이유도 원래는 수만 년에 한 번 있는 마재에 대응하기 위해서였으니 말입니다. 지난번 이종족 침공 이후 본 성의 합체기 장로는 물론 연허, 화신급 병사들도 충원이 거의 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도  도처에서 지원자들을 겨우 끌어 모은 것이고요.”

가면 여인이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우리 천연성은 이종족 침공으로 세가 크게 꺾였습니다. 인원을 보충하지 못하고 마겁이 닥치면 그저 성을 지키기도 급급해 지난번처럼 마족을 토벌할 수는 없을 겁니다.”

보라색 머리카락의 젊은 부인이 미간을 좁히고 입을 열었다.

“어찌할 도리가 없잖습니까. 마재는 말 그대로 우리 수도자들에게는 몇 만 년에 한번 돌아오는 재앙이니까요. 마족이 영력을 지니지 못한 범인들과 짐승들에는 큰 관심이 없어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수만 년마다 도륙당해 인족과 요족의 맥에 끊겼을 것입니다. 마족들이 영계의 자원을 약탈하고 수도자들을 살육하는 데만 미쳐 있는 것이 어떤 의미로는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요.”

백포 노인의 말에 금월 선사의 인자한 얼굴이 언뜻 서늘해졌다.

“그게 어디 마족들이 자비를 베풀어 그런 것입니까. 그들은 범인과 평범한 짐승들을 가축처럼 일부러 살려두는 겁니다. 그래야 다음 마재 때 살육을 자행할 수 있을 테니까요. 우리 같은 수도자의 원영이나 요단은 그들에게는 최상의 보약이 아닙니까.”

“또한 수련에 필수적인 몇몇 자원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만 지켜내도 마계와 영계가 분리될 때까지 버틸 저력이 되어줄 테니까요.”

보라색 머리 부인이 한마디 거들었다.

“다른 세력들이 제 살길을 찾기 바쁘니, 천연성도 더는 외부의 도움을 바랄 수 없겠군요. 오늘부로 숨겨두었던 부속 성들의 금제를 거두고 인근의 범인들을 이주시킵시다. 그밖에 흙 속성 공법에 정통한 수사들을 보내 비어 있는 다른 성들도 수리하게 하고요.”

백포 노인이 팔걸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직 이르기는 하지만 미리 대비해야겠지요. 금제로 버틴다고 해도 고계 수사들을 많이 확보할수록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재에서 가장 넘기기 어려운 고비는 처음 몇 번의 폭발적인 공세였으니까요. 그것만 막아내면 마족들도 더는 죽을힘을 다해 몰려들지 않고 대치 상태로 들어갈 것입니다.

포 수사, 인족에서는 몇 백 년 내로 새로운 합체기 수사가 등장하지 않을 듯합니다. 요족에 합체기 고비를 앞둔 이가 있다고 들었으니 주의를 기울여 주세요.”

백포 노인은 고개를 돌려 얼굴에 금빛이 도는 거한을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요족 왕족들 중에 경이로운 자질을 지닌 이들이 몇 있어 합체기에 이를 희망이 보이기는 합니다.”

금면(金面) 거한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족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은광 수사에게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백포 노인이 머뭇거리다 이번에는 가면 여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곡 형과 제가 알고 지낸 세월이 있는데 못할 말이 뭐가 있습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편히 묻겠습니다. 오소 선배님은 안녕하십니까?”

“아, 저는 또 무슨 일이라고요! 곡 형께서 오소 어르신의 일을 걱정을 하고 계셨군요. 헌데 요족 장로가 저 혼자도 아닌데 어찌 제게 물어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알면서 무얼 그러십니까? 은광 선자께서는 비록 은월랑족(銀月狼族) 출신은 아니지만 은월랑족의 혈맥을 일부 이어받아 오소 선배님 문하에서 천 년 넘게 있었지요. 그러니 오소 선배님이 최근 어찌 지내시는지 선자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겠습니까.”

가면 여인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흑포 거한이 눈썹을 끌어올리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

“포 수사의 말씀대로입니다. 삼천 년 전 거운산(巨雲山)에 다녀가신 뒤로 오소 선배님의 소식이 끊겼습니다. 마겁이 코앞인데 두 명의 대승기 수사 중 한 분이 보이지 않으시니 초조한 마음이 들 수밖에요.”

백포 노인이 신중한 얼굴로 다시 물었고, 다른 장로들도 전부 관심어린 눈초리를 보내왔다. 이에 가면 여인은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다물고 있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잘 압니다. 인요족이 영계에서 자리 잡은 후 스무 번 이상의 대천겁을 이겨낸 경우가 거의 없기는 하지요. 그래서 어르신이 몇 년 전 스물한 번째 대천겁을 잘 치르셨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오소 어르신은 지난 대천겁 때 목숨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약간의 원기를 상해 줄곧 요양 중이십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흑포 거한의 얼굴이 순간 환해졌다. 같은 요족 장로로서 인족 수사들보다 요족 대승기 선배의 안위가 더 걱정되는 것이 당연했다. 그녀의 말에 백포 노인과 노승 등 인족 장로들도 한시름을 놓았다.

“수백 년 전, 어르신 곁을 지키는 영롱 선자를 직접 만나들은 이야기입니다. 오소 어르신은 순조롭게 원기를 회복하는 중이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출관하실 거라더군요.”

가면 여인은 확신에 차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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