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7화. 금월 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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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이 옥간을 던져 주자 검은 기운 속에서 하얀 손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하아, 필요한 재료 중에 우리 요족의 뼈와 내단도 많네요. 이런 것을 적어 제게 보이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이것들로 법기라도 제련하려고 하십니까?”
“몇 가지 보물을 제련해볼 요량입니다. 뼈와 요단이야, 어차피 요족 수사들도 사용하는 재료가 아닙니까.”
여인의 말에 한립이 담담히 답했다.
“흥! 그 말은 맞지만, 요족 수사들은 대체할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다른 재료를 사용하는 편입니다. 사용한다고 해도 자기 종족의 뼈와 내단은 건들지 않지요. 인족 수사들이 함부로 요족의 뼈와 내단을 취하는 것에 많은 이들이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보아하니 선자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 듯싶은데요?”
한립이 가볍게 웃자 여인이 주저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속한 종족의 재료만 아니라면 상관없기는 합니다. 다만 옥간에 적힌 목록은 요족에서도 찾기 어려운 것들이라 절반 정도만 구해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가격도 굉장히 높을 테고요.”
“가격은 상관없습니다. 제가 찾는 물건이라면 만년 영약은 넉넉하게 내어 드리지요.”
한립이 희색을 드러내며 흔쾌히 답했다.
“그 말만 믿겠습니다. 그런데 이 물건들을 가지고 천연성에서 거래하기는 불편하니 괜찮으시면 몇 년 후에 있는 만보대회(万寶大會)에서 만나실까요? 인족과 요족이 천 년에 한 번 거행하는 대형 교역회인데 장소는 이미 정해졌다고 합니다. 현무경과 천호(天狐)의 땅 사이에 위치한 구선산(九仙山)이라더군요.”
“만보대회에 관해서는 저도 들은 바가 있습니다. 선자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여인의 제안에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지니고 있는 종자를 한 번 보여드리겠습니다. 원하시는 것을 골라 가시고 신물(信物)을 나누시지요. 만보대회에서 서로를 알아볼 수는 있어야 할 테니까요.”
여인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 * *
한식경 후, 교역대전을 걸어 나오는 한립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시장을 찾은 보람이 있었다.
그가 요족 여인에게 준 옥간 속에는 단약 제련을 위한 재료들 외에 태을청산 제련에 필요한 물품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태을청산 제련은 원자극산보다 훨씬 어려웠다. 보조 재료들도 훨씬 많이 필요했고 대부분이 영계에서 이미 멸종된 것들이라 찾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 대부분이 다른 재료로 대체할 수 있었는데 대체품이 바로 요족의 뼈와 요단이었다.
이런 재료는 인족에 많이 풀리지 않아 네 명의 화신기 수사들에게 구해오라 시키지도 않았다. 오늘 교역 대전에서 요족 여인을 다시 만나자 번득 그 생각이 들어 목록을 내준 것이다.
요족은 그다지 강대한 세력은 아니었지만 날짐승과 길짐승 그리고 어류까지 못 해도 수백만 종류는 될 것이다. 게다가 영계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왔으니 그간 요족이 남긴 뼈와 내단의 수가 얼마나 많겠는가!
다는 아니더라도 그가 제시한 목록의 절반만 찾아줘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운이 좋아 그녀가 말한 만보대회에서도 필요한 것들을 구할 수 있다면 남은 몇 가지는 그가 직접 찾으러 다녀도 상관없었다.
한립은 생각을 정리하며 천천히 처음에 들렸던 재료 상점으로 걸어갔다. 주인장이 진작 저물탁을 준비해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저물탁을 받아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미간을 좁혔다. 예상대로 그가 구해온 재료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네 명의 수사들에게 기대를 걸어보아야 할 것 같았다.
한립은 영석을 지불하고 점포를 나와 다른 곳으로 향하지 않고 천연성의 고계 수사 전문 객잔인 취선각으로 날아갔다. 명목상으로는 전부 취선각이라고 불렸지만 실제로는 열댓 개의 독립된 누각들이었다.
3층으로 된 누각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개별적으로 금제진법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다른 조건이 없는 대신 이곳에서 머물고 싶으면 영석이 많이 필요했고 연허기 이상의 수사만이 기거할 수 있었다.
이에 취선각은 보통 연허기 수사전용이었고 지난 몇 백 년 동안 합체기 수사가 머문 것은 한두 번에 불과했다. 한립은 숨기지 않고 취선각 주인장의 면전에서 합체기 수사의 기운을 드러냈다.
“하, 합체기 선배님!”
놀란 화신기 수사는 아주 예의 바르게 대했고 그에게 최상의 누각을 내주고 가장 용모가 빼어난 시녀들을 골라 누각에 배치해 주었다.
어차피 이곳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기에 한립은 굳이 거절하지 않았고 시녀들이 누각을 깨끗이 청소하는 동안 3층으로 올라가 조용히 좌선(坐禪)을 했다.
이튿날 아침, 눈을 감고 있던 그의 눈꺼풀이 꿈틀했다.
“과연 찾아 왔구나. 그런데 합체 중기의 수사가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지난 번 동부로 찾아왔던 척 장로는 확실히 아니었다. 잠시 후, 아래층에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울리고 긴장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님께 아룁니다. 본 성의 금월 선사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알겠다. 바로 내려가겠다.”
한립은 방문객의 이름을 듣고 즉시 대답했다. 다른 천연성 장로는 몰라도 ‘금월 선사’라면 천연성에 단 두 명뿐인 합체기 비승 수사 중 하나라 귀가 닳도록 이름을 들어왔다.
불종(佛宗) 출신의 금월 선사는 줄곧 폐관수련을 했기 때문에 장로회 일원이 아니고서는 얼굴을 보기도 어려웠다. 그런 거물이 등장했으니 시녀가 긴장할 만도 했다.
한립은 청명위에게 자신의 신분을 노출했을 때부터 천연성 장로회에서 누군가 찾아올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차분히 몸을 일으켜 한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영기의 빛으로 반짝이더니 그의 몸이 모호하게 변했다.
누각 1층 대청 안에서는 옅은 금색 가사(袈裟)를 입은 승려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는 벽에 걸린 그림들을 감상하고 있었는데 그 곁에는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아름다운 시녀들이 나란히 서서 분부를 기다렸다.
승려가 돌연 몸을 돌려 대청 한 곳을 응시했을 때 푸른 기운이 반짝이고 한립이 나타났다.
“빈승 금월이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승려는 불호(佛號)를 외며 한립을 향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실례라니요. 선사의 위명을 들어온 지 오래입니다.”
한립도 서둘러 포권을 하며 승려를 자세히 살폈다. 하얀 수염을 길게 기른 늙은 승려는 얼굴에 주름이 가득해서 눈을 제대로 뜰 수나 있을지 알 수 없을 만큼 노쇠해 보였다.
“허허, 빈승 역시 척 장로를 통해 한 수사에 대해 전해 들었습니다. 겨우 수백 년 만에 화신기에서 합체기에 이른 데다 비승 수사라 본 성에서 청명위를 지내셨다지요. 모두 사실입니까?”
금월 선사는 웃음을 짓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진솔한 분이시군요. 맞습니다, 모두 사실입니다! 그간 여러 기연들을 만나 지금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한립은 잠시 주저하다 빙긋 웃으며 답했다.
“허허허! 우리 정도의 경지에 이르려면 누구나 엄청난 운이 따라줘야 함이 아니겠습니까. 수사처럼 빠르게 경지에 오른 경우가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역대 인족 수사들 중에는 손에 꼽힐 겁니다.”
노승이 온화하게 미소를 지었고, 한립은 겸양의 말을 하며 자신을 낮추었다.
“척 장로의 말을 들으니 천연성에 들어올 마음이 없다고 하던데. 참으로 아쉽게 되었습니다. 이제 장로회에 비승 수사라고는 이제 빈승 한 사람 뿐이라서 말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뇌라 진인이 계셨던 것으로 압니다. 설마…….”
“뇌라 진인은 이종족 침공 때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노승이 한숨과 함께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장로회에서 두 분이 돌아가셨다는 얘기만 들었던 터라, 뇌라 수사께서 변고를 당한 줄은 몰랐습니다.”
“수사께서 이미 척 장로의 요청을 거절했다는 것은 알지만. 빈승, 비승수사의 일원으로서 다시 한 번 장로회에 들어와 줄 것을 청하겠습니다. 한 수사께서도 아시다시피 우리 비승수사들은 현지 수사들과는 다른 점이 많습니다. 게다가 천연성에 비승수사들 중 9할이 모여 있고요…….”
“만일 수사가 노승과 같이 비승수사들을 비호한다면 처우를 많이 개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금월 선사는 진지한 얼굴로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한립에게 장로직을 권했다. 한립도 신중하게 그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결국에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도 비승수사의 일원이라 상황은 잘 압니다. 하지만 저와 수사의 힘만으로 무엇을 얼마나 바꿀 수 있겠습니까? 제가 장로회에 들어간다면 오히려 분쟁의 한가운데에 설 뿐입니다. 저는 수도의 길을 걸어오며 오직 수련에만 매진해왔습니다. 더욱이 이제 막 합체기에 올라 진선으로 비승하기까지는 요원하기만 한데 어찌 다른 곳에 한눈을 팔 수 있겠는지요.”
“오직 수련에만 매진하고자 하는 수사의 의지에는 노승도 탄복하는 바입니다. 그리 마음을 굳히셨다면 더는 권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이번에 천연성에 오신 목적이 따로 있을 듯한데, 빈승이 도울 일이 있겠습니까?”
“선사의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그저 필요한 재료를 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받은 일을 처리하러 들렸을 뿐입니다.”
“허허, 그러셨군요. 이후라도 빈승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주세요. 천연성 내의 일은 부족한 저라도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겁니다.”
노승의 말에 한립이 감사를 표했다.
그들은 다른 일은 논하지 않고 오직 수련상의 심득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우호적인 관계의 합체기 수사들이 만나면 거의 서로의 깨달음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들과 같은 경지에 이르면 동급 수사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약소 종족의 경우 합체기 수사가 한두 명뿐인 곳도 있었고, 전설 속의 대승기나 도겁기 수사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서로서로 교류를 해가며 수련상의 어려움을 해결해야 했다.
금월 수사는 합체 중기 수사지만 후기까지 얼마 남지 않아 깨달음의 수준이 합체 초기의 척 장로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한립도 강력한 신통들을 많이 지녔고 범성진마공이라는 전대미문의 법체쌍수 공법을 수련하고 있어 독특한 길을 개척하고 있었기에 둘의 교류는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부지불식간에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금월 선사는 유쾌한 얼굴로 돌아갔다.
한립이 처소로 돌아가고 며칠 동안은 다른 합체기 수사들이 찾아오지 않았다. 짐작컨대 다들 다른 일이 있거나 금월 선사를 통해 장로직을 거절했다는 것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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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새가 지나고 그가 기다리던 사람이 찾아왔다.
한립은 시녀가 고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아래층으로 향했고, 1층에서 한담을 나누던 시녀들은 그가 나타나자 깜짝 놀라 황급히 예를 취했다. 그러나 한립은 손을 내저으며 담담히 명했다.
“내 기다리던 사람이 왔으니 안으로 모시고 너희는 물러가거라.”
그 말에 시녀들은 조용히 답하고 누각 밖으로 몰려나갔다. 대청의 상석에 앉아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시녀와 함께 얼굴이 새하얀 여인이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남색 궁장 차림의 허 선자였고, 어느덧 화신기 수사가 되어 있었다.
“정말 한 선배님이셨군요! 정말 합체기에 이르셨습니다!”
한립의 얼굴은 수백 년이 지나도 그대로였기에 여인은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당시 한립은 그녀가 빙백 선자의 후인이라 잘 챙겨주었고 수련함에 있어서도 몇 차례 지도를 해주었다.
그랬기에 허 선자는 천연성으로 돌아와 그가 찾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다른 일을 제쳐두고 취선각으로 날아왔다. 물론 합체기 수사가 되었다는 소식에는 악 노인 못지않게 놀랐다.
직접 보기 전까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는데 한립의 강대한 기운을 느끼고 모든 의심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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