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6화. 옛 지인
*
중년인은 조심스럽게 가죽 주머니를 거두고 머뭇거리다 탁자 위 옥함 중 하나를 열어보았다. 그러자 옥함 속에서 하얀 기운이 흘러나오고 옥으로 만든 하얀 부채가 서늘한 모습을 드러냈다.
주술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진 보물이었다. 중년인은 옥 부채를 꺼내 슬쩍 휘둘러보고 엄청난 영기의 압력에 멈칫했다.
“산하선(山河扇)은 바람과 흙 속성을 지녀 한 번 부치면 바람이 닿는 곳은 어디든 적을 만근의 힘으로 공격할 수 있네. 그럭저럭 쓸 만한 물건이지.”
한립이 가볍게 웃으며 설명했다. 중년인은 희색이 가득한 얼굴로 감사 인사를 올렸다.
나머지 세 사람도 흥분한 기색으로 옥함을 하나씩 골라가 열어보았다. 각각 은색 고리, 알록달록한 손수건 그리고 현빙(玄氷)으로 만들어진 비도가 담겨 있었다.
한립에게는 있으나 마나한 것들이지만 화신기 수사들은 오매불망할 보물들이었다. 수사들이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고 보물을 챙겼다. 한립의 요구를 정식으로 수락한 셈이었다.
다만 그들이 영석을 들고 달아날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었다. 알아보니 넷은 산수가 아니기 때문에 출신 가문을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과 관계된 사람들이 큰 화를 입게 될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만일을 위해 한립은 은근슬쩍 그가 얼마 전 합체기에 이렀다는 소식을 흘렸다.
누각을 벗어난 한립은 천연성에서 복무할 때 머물던 거대 석탑으로 날아갔다. 석탑을 드나드는 다양한 색의 갑옷을 입은 병사들을 바라보니 자연스레 옛 기억들이 떠올랐다. 석탑은 바로 그가 청명위로 있을 때 머물던 곳이었다.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이곳은 이전과 똑같구나.’
한립이 시선을 거두고 석탑 입구로 날아갔고 그곳에는 열댓 명의 흑철위들과 두 명의 청명위가 서있었다. 그들은 낯선 수사의 등장에 의심어린 눈초리를 보냈다.
한립은 별 말 없이 합체기 수행을 드러냈다. 경지의 차이가 극심했기에 청명위들은 안색이 파랗게 질렸고 흑철위들은 몇 걸음이나 뒷걸음질을 쳐야했다.
“합체기 수사!”
청명위 거한이 놀라 소리쳤다.
“엇! 한 수사?”
짧은 수염을 기른 청명위 노인이 한립의 얼굴을 훑고 기함했다. 그는 뜻밖에도 한립을 알아보았다. 한립도 짧은 수염 노인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악 수사!”
“한 수사가……. 아, 아니 한 선배님께서 어찌 여기에……?”
노인은 귀신이라도 만난 사람처럼 웅얼거렸다.
“선배님께서는 천연성의 장로가 아닌 것으로 압니다.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악 형, 아는 분이십니까?”
청명위 거한이 서둘러 예의를 차리고 악 노인을 향해 조용히 물었다. 그러나 노인은 멍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청명위의 허 선자가 안에 있는가?”
한립이 담담히 용건을 밝혔다.
“아, 허 선자라면 대원들을 데리고 성 밖으로 순찰을 나가 며칠이 지나야 돌아올 듯합니다.”
청명위 거한이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노인을 보다 공손히 답했다.
“찾는 사람이 없다면 나도 굳이 안에 들어갈 생각은 없네. 그럼 허 선자가 돌아오는 대로 내가 성 안의 취선각(聚仙閣)에서 기다린다고 전해주게! 내 신분은 악 수사가 잘 알고 있으니 따로 밝히지 않겠네.”
한립은 미간을 좁히며 분부했다. 그리고 짧은 수염의 노인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도대체 저분이 누구시기에 그러고 계신 겁니까?”
푸른 빛줄기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거한은 아직까지 어안이 벙벙해 있는 악 노인을 향해 불만스레 물었다.
“허 선자를 찾는 것을 보니 내 눈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정 형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나, 한 선배님은 300년 전 우리와 똑같이 청명위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까지만 해도 화신 중기였고요!”
드디어 상념에서 벗어난 짧은 수염 노인이 이상하다는 목소리로 답했다.
“겨우 300년 전에 청명위였다고요? 농을 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정 형은 200년 전에 천연성으로 왔으니 모르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지금의 한 선배님께서 청명위였을 때 깊은 친분을 나누지는 못했으나 저도 도움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당시에도 청명위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한 수사였고요.
화신기 수행으로 연허급에 상당하는 이종족들을 죽이고는 했으니까요. 나중에 비밀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만황세계로 떠났다는 소식이 들리고는 실종되었는데 못 본 사이에 화신기에서 합체기 수사가 되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악 노인은 길게 숨을 토해내고는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 * *
석탑을 떠난 한립이 향한 곳은 시장이었다. 보조 재료 구매를 네 명의 수사들에게 맡겨 두었지만 구할 수 있는 것은 먼저 구하려는 것이다.
천연성 시장은 그 전에도 여러 번 와본 터라 이전에 찾아간 재료 상점으로 가 목록을 던져주고 대신 구해오게 했다.
그는 점포를 떠나 시장 중심부에 있는 거대한 전당으로 걸어갔다. 요족 쪽에 그가 원하는 재료가 있을 수도 있었다. 만약 거대 세력에 의탁한다면 이런 사소한 일로 그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구속을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세력을 만드는 것이 훨씬 좋은 방법이었다. 그의 수행에 스스로 세력을 모으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니까.
다만 그런 잡다한 일을 하느라 시간과 정성을 쏟다보면 수련에 지장이 생길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세력을 창립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은 결정이다.
그렇다면 아예 영황 자리를 손에 넣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삼황 세력은 다른 종파나 가문과 달리 대부분의 권력이 삼황 본인에게 있었다. 누구든 삼황 자리에 오르면 바로 인족의 우두머리 중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한립은 이런 생각을 하며 인족과 요족이 거래할 수 있는 전당 앞에 도착했다. 그는 영석을 지불하고 전당 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 * *
그때 인족 구역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동굴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우웅!
거대 전송진이 진동하며 영기의 빛을 뿜자 그곳을 지키던 꼭두각시 병사들이 눈을 번득이며 전송진을 향해 칼끝을 겨누었다. 그 순간 동굴 입구에서 전신에서 은빛을 발산하는 모호한 인영이 날아들었다.
파앗.
때마침 하얀빛을 뿜으며 전송진 위에서 두 명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건장한 체구의 흑포 거한과 우아한 자태의 백의 여인이었다. 거한이 새까만 피부에 흉악한 외모를 지닌 것에 반해 여인은 새하얀 피부에 눈동자가 별처럼 빛났다.
“너희는 우리 은족인(銀族人)이 아니구나. 누군데 본 족 전송진을 사용해 이곳으로 넘어온 것이냐!”
은빛 인영이 그들을 보고 날카롭게 소리쳤다.
“여기도 은족인들이 지키고 있나 봅니다. 성조 대인, 제가 다 삼켜 버릴까요?”
흑포 거한이 은빛 속 인영을 힐끗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저자의 수행도 낮지는 않구나. 잘못 삼켰다가 탈이 날까 겁나지도 않더냐.”
백의 여인이 은빛 인영을 훑고는 평온히 말했다.
“하하, 성조 대인께서 계신데 겨우 은족 성계 수사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흑포 거한이 미소를 띠며 백의 여인을 추켜세웠다.
“감히 어디서 헛소리를!”
그들의 대화에 은빛 인영이 소리치자 사방의 꼭두각시들이 칼을 들어 허공을 갈랐다.
쉬쉬쉬식!
열댓 개의 은빛들이 전송진을 향해 쇄도했다.
“이렇게 허접한 공격이라니…….”
흑포 거한이 냉소하며 소매 속에서 검은 안개를 뿜어 몸을 가렸다.
콰르릉! 콰릉!
은빛이 날아들다 검은 안개에 부딪치자 잇달아 폭발했다. 이에 은족인은 흠칫 놀랐다. 그러나 거한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입을 벌려 폭발한 은빛을 빨아들이고, 등 뒤로 검은 그림자를 불러냈다.
후웅!
파공음이 동굴을 울리고 열댓 마리 꼭두각시들이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검은 그림자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다. 이에 은족인이 서둘러 검은 그림자의 정체를 파악하느라 정신없었다.
‘저건!’
비늘로 뒤덮인 새까맣고 굵은 물체는 무언가의 꼬리였다. 두꺼운 꼬리는 거한을 둘둘 감고도 남을 정도로 길었다. 흑포 거한이 음침한 웃음을 흘리고 검은빛을 반짝이며 성계 존재의 기운을 드러냈다.
그의 모습에 은족인은 긴장했다. 흑포 거한 한 명이라면 상대할 수 있겠지만 그 옆의 백의 여인은 그보다 더욱 강력한 존재임이 분명했다.
‘내가 상대할 자들이 아니다!’
은족인이 놀라 전신에 은색 기운이 흐르며 모호하게 변해갔다.
“어딜 가려 그러느냐?”
흑포 거한이 흉흉하게 눈을 번뜩이고 새까만 꼬리를 거세게 흔들었다. 꼬리는 공간을 뛰어넘어 순식간에 은빛 속 인영을 꿰뚫었지만 흩어진 은빛 속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은족인이 흑포 거한보다 한발 앞서 비술을 펼친 것이다. 그러나 그때 백의 여인이 미소를 머금고 전방을 가리켰다.
분홍색 꽃 한 송이가 그녀의 손끝에서 피어나 빛이 번쩍하는 순간 거대하게 변해 동굴 전체를 에워쌌다. 그리고 일대가 분홍빛으로 물들고 기이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펑!
그 순간 방금 달아났던 은족인이 인근 허공에서 튕겨 나왔다.
“말도 안 돼! 이, 이럴 수가…….”
은족인이 기겁하며 다시 영기의 빛을 반짝이고 달아나려고 했으나, 백의 여인이 그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은족인의 발밑에 파문이 일고 분홍색 꽃이 소리 없이 떠오르자 온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이에 흑포 거한이 웃음을 터트리고 검은 기운에 휩싸여 은족인에게 달려들었다. 검은 기운 속에서 커다란 입이 쩍하고 벌어졌고, 은족인은 처절한 비명을 질러댔다.
백의 여인은 그 후의 일은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두고 손끝에 또 다른 꽃을 피워 향기를 맡았다. 마치 꽃향기에 취한 것 같았다.
* * *
풍원대륙과 뇌명대륙 사이의 해저궁전. 밀실 안에 검은 기운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핏빛 누에고치가 둥실 떠있었다. 누에고치는 핏빛으로 반짝이며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 열두 마리의 새까만 거대 괴수들이 있었다.
머리가 둘에 눈이 여섯인 괴수도 있었고, 두 쌍의 날개에 발이 세 개인 조류 괴수도 있었다. 심지어 전신이 황금색에 꼬리를 아홉 개나 지닌 교룡도 있었다.
열두 마리 괴수들은 전부 핏빛 누에고치 아래 엎드려 움직이지 않았는데 생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누에고치가 핏빛을 반짝일 때마다 괴수들의 깡마른 몸이 드러났는데 마치 무언가에 흡수당한 것 같았다.
밀실 한쪽에는 녹색 옥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수정 구슬 하나가 희미하게 영기의 빛을 반짝이더니 표면에 어떤 모습이 떠올랐다.
은빛 찬란한 연방(蓮房)의 모습이었다.
* * *
인족 천연성 시장. 한립은 널따란 대청 안에서 검은 기운에 둘러싸인 요족 여인을 보고 있었다.
“이곳에서 수사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저도 한 수사를 다시 보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요? 이종족 침공을 피해 아주 떠나신 줄 알았습니다.”
여인은 한립과 이전에 여러 번 거래했던 요족 여인이었다. 그녀는 한립을 만나 굉장히 기뻐 보였다.
금제의 작용 때문에 상대가 수백 년간 얼마나 수행이 늘어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꽤 많은 만년 영약을 바꿔갔으니 적잖은 진보가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여인도 한립의 수행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긴 당초 기연이 따라 주지 않았으면 이곳에서 다시 수사를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이곳은 어쩐 일이십니까? 만년 영약들을 챙겨 가셔서 한동안은 폐관수련에 들어가실 줄 알았습니다.”
“저라고 왜 그러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당시 수사에게 꽤 많은 만년 영약들을 얻었지만 전부 제가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요. 그 영약들은 바닥난 지 오래입니다. 안 그대로 그동안 진귀한 종자를 모아두었는데 계속 거래할 마음이 있으신지요?”
요족 여인이 짧게 한탄하며 물었다.
“제게 없는 영약의 종자라면 당연히 거래할 생각입니다. 다만 그간 저도 귀한 종자를 많이 구해 두어서 얼마나 거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제가 모아 놓은 종자들이 수사의 눈에 들지 모르겠네요. 허나 저도 천연성에 오래 머물 형편이 못되어 거래가 가능한 대로 만년 영약을 확보했으면 합니다.”
요족 여인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아쉽다는 듯 말했다.
“너무 실망하실 것 없습니다. 영약의 종자뿐 아니라 저를 도와 여러 재료들을 구해주신다면 만년 영약으로 거래할 테니까요.”
“재료요?”
“필요한 목록입니다. 요족에서 구할 수 있을지 살펴봐 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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