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045화 (802/2,000)

1045화. 진혈(眞血)의 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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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황 중 천묘영황(天妙靈皇)이 사망해 백 년 내로 새로운 영황을 선발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한립이 뜬금없이 던진 질문이 척후빙과 효풍 선자를 당황하게 했다.

“그, 그렇기는 합니다. 백 년 후 거행되는 성족 수사 비무 대회에서 선발된 합체기 수사가 새로운 영황을 맡게 될 것입니다. 설마 수사께서도 영황 직위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왜 그러시지요? 저는 영황 선발에 참가할 가격이 안 되는 것입니까?”

청포 노인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묻자 한립은 가볍게 웃음을 지으며 반문했다.

“그건 아닙니다. 합체기 이상의 인족 수사라면 누구나 영황 자리를 다툴 수 있으니까요. 허나 역대로 삼황의 직위는 합체기를 대성한 수사들이 맡고는 했습니다. 예외가 있다고 해도 역천의 신통을 지닌 합체 중기 수사였고요.”

“진령의 피를 계승하신 한 선배님의 신통이 비범하다는 것은 압니다만 아직 영황을 노리기에는 시기상조가 아닐까요? 백 년이면 경지를 안정화시키기에도 벅찬데 어찌 후기 수사들과 경쟁하려 하십니까?”

청포 노인은 애매한 웃음을 흘렸고 여인도 완곡하게 만류했다.

“하하, 당연히 막 합체기에 이른 제가 영황위(靈皇位)를 차지하리라 기대하진 않습니다! 그저 대회에 수많은 동급 수사들이 모일 테니 교류나 하고자 함이지요. 다만 두 분의 요청은 감사하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겠군요.

제가 한곳에 오래 머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품이라서요. 그리고 진령세가의 진령혈맥에 관한 술법은 관심이 가는데, 효풍 선자가 원한다면 다른 보물이나 공법으로 거래를 하였으면 좋겠군. 선자의 뜻은 어떠한가?”

한립의 제안을 들은 여인은 할 말을 잃었다. 곡 가의 태상객경장로가 되는 것을 싫지만 진령혈맥 관련 비술은 얻어가고 싶다는 말이 아닌가!

효풍 선자는 간신히 미소를 유지하고 답했다.

“송구하지만 그 말씀에는 따를 수 없겠습니다. 곡 가의 비술은 외부인에게는 전수할 수가 없어서요. 그런 선례가 없기에 아무리 굉장한 보물과 공법을 내놓으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여기서 마쳐야겠군. 곡 가가 아니라 그 어떤 세력에도 가담할 마음이 없으니 말일세. 송구하지만 두 분이 헛걸음을 하신 듯 싶습니다.”

한립은 여인이 거절에 크게 개의치 않고 노인과 여인을 번갈아 보며 쐐기를 박았다. 효풍 선자는 작게 한숨을 쉬었고 척후빙도 더는 장로직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후 그들은 공법과 수련 상의 깨달음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어색했던 분위기가 다시 부드러워졌다.

몇 시진 후 여인과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개의 둔광이 운해 끝을 빠져나왔다.

“척 선배님, 이번에 저희 모두 빈손으로 돌아가게 생겼습니다. 저는 바로 곡 가로 돌아가려 하는데 선배님께서도 천연성으로 가시는지요?”

“노부는 천연성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현무경으로 가볼 생각일세! 그곳에도 합체기에 이른지 얼마 되지 않은 수사가 있다더군. 듣기로 이미 현무패황의 제안을 받아들였다지만 그래도 한 번 시도는 해볼 요량이라네.”

“그렇다면 저는 먼저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인은 노인에게 인사를 하고 은색 빛줄기로 변해 하늘 끝으로 날아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시야에서 사라진 그녀를 지켜보던 청포 노인은 청록색 비주(飛舟)를 방출해 그 위에 올라탔다.

비주가 초록색 빛을 흩날리며 멀리 사라지자 운해 주변이 다시 고요해졌다. 그런데 반 시진이 지나지 않아 하늘 저 끝에서 은색 빛줄기가 다시 날아들었다.

둔광 속의 여인은 차분히 운해를 향해 입술을 달싹였고, 운해는 꿈틀거리며 다시 통로를 드러냈다. 효풍 선자가 한립의 동부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두 시진 만에 다시 운해 속 통로를 나와 이번에는 정말로 종적을 감추었다.

같은 시간, 한립은 동부 대청에 앉아 은백색 옥패를 들고 침음하는 중이었다. 은빛을 반짝이는 옥패 한쪽에는 ‘곡(谷)’ 자가 적혀 있었고 다른 쪽에는 빨간색 머리 세 개가 달린 괴수 도안이 새겨져 있었다.

새빨간 비늘로 뒤덮인 뿔 달린 말 머리, 검은 호랑이 머리 그리고 남색 사자 머리였다. 이야기로만 들어오던 진령 여후(黎吼)였다.

중급 진령에 속했지만 세 개의 머리가 동시에 다른 속성의 힘을 발휘할 수 있어 적과 싸울 때 비범한 능력을 발휘할 뿐 아니라 다른 방면으로도 효용성이 높았다.

이 옥패는 효풍 선자가 따로 그를 찾아와 주고 간 것이었다. 곡 가는 진령 여후의 혈맥을 계승하는 진령세가였다.

‘흠…….’

한립은 여인이 다시 찾아와 했던 말을 회상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옥패를 던져주고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을 했다. 만 년 동안 곡 가에 정식으로 몸담을 필요 없이 10년 후 진령세가들이 모이는 진령대전에서 딱 한 번만 도움을 달라는 것이었다.

그거 진령대전에서 곡 가를 위해 힘을 써주면 곡 가의 진령혈맥 비수 일부를 전수해준다는 것이었다. 물론 여인은 그에게 전수해줄 내용이 곡 가가 지닌 핵심 비술은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그래도 어느 진령세가를 찾아가도 쉽게 배울 수 없는 비술인 것만은 분명했다. 오랜 구속을 받지 않고 딱 한 번이면 된다는 말은 확실히 구미가 당겼다.

경칩결로도 진령의 피를 연화시킬 수 있었지만 비령족을 위해 창립된 술법이라 인족이 펼치기에 적합하지 못했다.

합체기에 이르기 전에는 미미한 차이를 보였지만 지난 1년 동안 연화시킨 진령의 피는 겉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놀란 한립은 일단 법력으로 연화하지 못한 진혈을 억눌러 두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 다른 진혈이라도 흡수하는 날에는 어떤 예상하지 못하는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었다.

그래서 여인이 곡 가의 진령혈맥 연화술을 언급했을 때 흥미가 갔다. 진령세가의 비술로 남은 진혈을 철저히 연화시킬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앞으로의 수련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경칩결을 위주로 인족의 연화술을 연구해 단점을 개선하면 후환을 제거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만 년이나 곡 가에 소속될 마음도 없었고 편법을 써서 다른 진령세가 비술을 얻는 방법도 있었기에 처음 제안은 거절했다.

그러나 진령대전에서 다른 진령세가 수사들과 기량을 겨루고 곡 가를 위해 약간의 이익을 쟁취해 달라는 말에는 동의하고 말았다.

그의 대답을 들은 효풍 선자는 밝은 얼굴로 동부를 떠났고, 옥패는 잠시 동안 그가 곡 가의 장로라는 것을 증명하는 신분 패였다.

한립은 몇 번이나 이해득실을 따져보고는 밀실로 돌아가 합체기 경지를 안정시키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 후로도 몇몇 규모 있는 세력들이 접촉해왔고 그중에는 천원성황이 보낸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한립은 그들을 일일이 거절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한립은 밀실에서 나와 푸른 빛줄기로 변해 동부를 떠났다.

폐관수련을 통해 체내의 법력을 완전히 장악했으니 이제 밀린 일처리를 해야 했다. 그는 당연히 가장 가까이 있는 천연성으로 향했고, 두 달 후 천연성 성벽 위에 도착했다.

잠시 고민하던 한립은 어딘가로 날아갔고, 곧 두 개의 석탑 중간에 위치한 누각들로 향했다. 천연성에서 외지인들을 위해 제공하는 임시 거처였다.

수행이 낮은 이들은 열댓 명이 한 개의 누각을 썼지만 연허기 이상의 고계 수사들은 누각 전체를 독점하기도 했다.

그중 한 누각을 네 명의 화신기 수사들이 사용하고 있었는데 제법 실력이 있고 수차례 만황구역에 다녀온 이들이었다.

그들은 최근 몇 년 동안 누각을 나서지 않고 폐관수련에 매진했는데 인근 소식통에 의하면 만황세계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가 원기를 크게 상해 요양하는 중이라고 했다.

천연성에서는 이런 이들이 허다했다. 그런데 이날 누각 안에서 수련하던 수사들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한 모가 잠시 들려도 되겠는가?”

누각에 겹겹이 쳐놓은 금제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 네 수사의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그들은 깜짝 놀라 누군가를 떠올리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누각 1층으로 모여들었다.

그중 팔이 잘려나갔던 중년인이 제일 먼저 도착해 누각의 대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바깥에 한립이 조용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 선배님을 뵙습니다! 이런 누추한 곳까지 직접 와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중년인이 놀란 얼굴로 예를 취하고 한립을 안으로 안내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으로 들어가자 홍갑 거한과 두 여인도 1층에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한립의 얼굴을 확인하고 공손히 예를 올렸다.

“그리 예를 차릴 것 없네!”

한립은 손을 저으며 인사를 받았고, 거침없이 대청의 상석에 앉았다. 중년인을 포함한 네 명의 수사들은 그 옆에 서서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아직 만황세계에서 원기를 상한 일로 고생하는 듯 보이는군.”

한립은 수사들을 가볍게 훑으며 손쉽게 그들의 몸 상태를 파악했다.

“역시 혜안을 지니셨습니다. 저희의 수행이 그리 높지 않고 원기도 크게 상해 아직 절반 정도밖에는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중년인은 솔직히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 단약들을 가져다 복용하게. 한 달만 지나면 완전히 회복할 수 있을 것이야.”

한립은 네 개의 연두색 옥병을 꺼내 허공에 띄웠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수사들은 깜짝 놀라 중년인을 시작으로 차례대로 옥병을 받아갔다. 뚜껑을 열자 그윽한 향기가 대청을 가득 채웠다. 향기만 맡아도 기분이 상쾌해지고 활력이 돌았다.

수사들은 옥병 속의 단약이 범상치 않자 기쁨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단약을 복용하면 한립이 말한 것 이상의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

“저희가 있는 곳까지는 어인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선배님의 분부라면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중년인이 약을 확인하고는 눈치껏 먼저 물었다.

“음, 자네들이 해줄 일이 있는 건 맞네. 간단하지만 비교적 시일이 걸리는 일이라 천연성에 오래 남아 있을 사람이 해주었으면 하네. 자네들이 해줄 수 있겠는가? 물론 대가 없이 일을 시키지는 않을 걸세.”

한립은 인자한 어투로 이야기를 꺼냈다.

“안 그래도 저희는 백 년 내로는 천연성을 떠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안심하고 일을 맡겨 주셔도 됩니다! 어떤 일이든 전력을 다할 것입니다.”

위험한 일이 아니라는 말에 중년인이 마음을 놓고 흔쾌히 답했다.

“나를 도와 천연성에서 남궁완이라는 여인을 찾아봐 주면 된다네. 그녀는 비승 수사이고 이름을 바꾸었을 수도 있으니, 그녀의 초상화가 담긴 옥간을 남겨 두지. 아직 천연성에 없다면 이후 백년간 그런 여인이 나타나는지 주시해 주게. 그녀를 찾아와 준다면 후한 보상을 해주겠네.”

“알겠습니다! 저희가 천연성에 가깝게 지내는 수사들이 꽤 되어 말씀하신 선자가 나타나면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외에 한 가지 더! 내 제련을 준비 중인 몇 가지 단약들이 있는데 필요한 재료들이 다양하고 하나같이 흔히 구할 수 없는 것들이라네. 천연성이라 해도 짧은 시간 내로는 전부 모을 수 없을 테지.

나는 멀리 다녀올 일이 있으니 자네들이 대신해 재료들을 모아주게. 이 안에 든 영석이면 필요한 재료들을 구입하는데 충분할 것이야. 나머지 보물들은 자네들이 남겨두고 쓰도록 하게.”

한립의 소매에서 네 개의 크고 작은 옥함과 검은 가죽 주머니가 떠올라 탁자 위에 놓였다. 이에 수사들은 서로 전음으로 몇 마디를 나누고 신중한 얼굴로 명을 받들었다.

그 후, 중년인이 대표로 주머니 안을 확인하고는 안색이 급변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홍갑 거한과 두 여인들도 의식으로 훑고는 한립을 보는 표정이 달라졌다.

다행히 중년인이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말했다.

“한 번에 이렇게 많은 극품 영석을 내주시다니 통도 크십니다! 저희가 구해야 할 재료들이 정말 흔치 않은 물건이라는 뜻이겠지요. 저희를 이렇게 신임해 주시니 온 힘을 다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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