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044화 (801/2,000)

1044화. 손님

*

여인은 옅은 미소를 머금었는데 전신에서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아 범인처럼 보였다.

“효풍 선자! 곡 가의 가주가 친히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구만.”

푸른 장포 노인은 여인의 얼굴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누가 벌써 와계신가 했더니 천연성의 척 장로님이셨습니다. 선배님도 욱일봉에 머무는 수사를 만나러 오신 것입니까?”

여인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물었다.

“천연성이 여기서 겨우 몇 달 거리라 합체기 존재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 오래일세! 다른 장로들은 폐관하고 있거나 출타 중이라 어쩔 수 없이 이 늙은이가 여기까지 왔네. 곡 가주의 목적도 같지 않은가?”

청포(靑袍) 노인이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상대의 수행이 낮음에도 여인을 꽤 정중히 대하고 있었다.

“맞습니다. 사실 이전에 저희 곡 가의 장로 중 하나가 욱일봉의 선배님과 접촉하기는 했습니다만, 겨우 1년 만에 합체기 수사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자연히 직접 찾아와 만나 봬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기억대로라면 몇 년 후에 3천 년에 한 번 있는 진령세가의 진령대전(眞靈大典)이 열릴 테지. 곡 가주가 서둘러 곡 가의 세력을 늘리고 싶어 하는 것도 이해는 하네! 하지만 욱일봉의 수사가 정말 합체기 수사라면 노부도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두게. 지난번 이종족 침공으로 천연성은 이미 두 명의 장로를 잃었고 또 다른 장로 두 명도 곧 대천겁을 앞두고 있어 어찌 될지 모르는 형편이라네. 급히 합체기 전력을 보충해야 하는 상황이란 말일세.”

“그러셨군요. 허나 저도 곡 씨 가문의 명예가 걸린 일이라 가볍게 물러설 수 없으니 양해해 주십시오.”

청포 노인의 말에 여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사실 합체기 수사가 이제와 아무렇게나 다른 세력에 의탁을 하겠는가. 우리 둘 다 허탕을 치고 돌아갈 공산이 제일 크니 일단 당사자나 만나보고 다시 이야기를 나누세.”

“맞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같이 가보시겠습니까?”

여인의 제안에 청포 노인은 거절하기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함께 날아올라 운해 가장자리에 멈춘 청포 노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낭랑하게 외쳤다.

“천연성 척후빙과 곡 가의 효풍 선자입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노인의 목소리는 영력이 담겨 멀리까지 또렷하게 퍼져나갔다. 이에 한립도 눈을 뜨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하얀 진법 원반을 꺼내 입술을 달싹였고, 청포 노인과 수려한 여인의 귓가에 한립의 담담한 목소리가 울렸다.

“귀한 분들이 찾아와 주셨습니다! 제가 아직 폐관 수련중이라 직접 마중할 수는 없고, 괜찮으시다면 동부로 와서 기다려 주시지요. 출관하는 대로 찾아뵙겠습니다.”

곧 아래쪽 운해가 열리고 널따란 통로가 열렸다. 청포 노인과 효풍 선자는 시선을 마주치고 통로로 들어갔다.

그들이 산중턱의 동부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가 대청에 따로따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때 백의 여인이 쟁반을 들고나와 향기가 진한 영차(靈茶)를 내주고 한쪽으로 물러났다. 청포 노인과 효풍 선자는 무심코 백의 여인을 훑고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척 선배님, 제가 잘못 본 것은 아니지요? 저 여인은 아무래도 꼭두각시인 듯합니다.”

여인이 미심쩍은 목소리로 전음을 보내왔다.

“선자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 저 여인은 꼭두각시가 맞네. 게다가 연허급으로 보이는군. 이상한 것은 누군가의 조종을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일세.”

청포 노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단번에 여러 가지를 알아보았다. 이에 놀란 여인이 백의 여인을 살펴보고 있을 때, 대청 바깥에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젊은 청년이 걸어 들어왔다.

시선을 돌려 청년을 발견한 여인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를 했다.

“곡 가를 대표해 합체기에 이르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청포 노인도 미소를 머금고 몸을 일으켜 포권을 했다.

“저는 천연성에서 장로직을 맡고 있는 척후빙이라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멀리서 와주셨는데 직접 마중하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허허, 괜찮습니다. 이제 막 합체기에 이르러 한창 경지를 안정시킬 때라는 것을 노부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노인의 말을 끝으로 세 수사는 다시 대청에 앉아 이야기를 이어갔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처음 선배님께서 합체기 경지에 이르셨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믿기 어려웠습니다. 얼마 전에 본 족의 곡운 장로가 돌아와 선배님의 소식을 전할 때까지만 해도 연허기 수행을 지니고 계셨으니까요.”

“하하, 그 당시 이미 더 높은 수행으로 넘어가기 위해 준비를 하던 차였네. 다만 한 번의 시도로 합체기에 이른 것은 나도 의외였지. 곡운 수사를 속일 생각은 없었으니 오해하지 말게.”

곡 가 여인의 말에 한립은 미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합체기 고비를 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신중하게 처신하신 것이 당연합니다!”

“노부 역시 합체기 고비를 돌파할 때 아주 외진 곳을 찾았었지요. 다들 같은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여인과 청포 노인이 이해한다는 듯 웃음을 머금었다. 그들은 곧 특별한 주제 없이 한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홀로 두 대륙을 떠돌아다닌 한립의 경험과 견문은 말할 것도 없었고, 오랜 세월 합체기 수사로 살아온 천연성 장로 척 노인과 진령세가 가주 효풍 선자의 식견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아주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특히 노인과 여인은 한립 덕분에 시야가 확 넓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한 수사께서는 이종족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계십니다그려! 인족 경전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정보도 많을뿐더러 다른 대륙의 사정에도 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설마 다른 대륙에 다녀오신 경험이 있는 것입니까?”

“영민하십니다. 만황세계를 돌아다니다 이제 막 돌아와 이종족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편입니다. 다른 대륙도 요행이 다녀온 일이 있고요.”

한립의 솔직한 대답에 청포 노인과 여인이 동시에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어쩐지 이렇게 수행이 높으신데 이전에 선배님에 대해 들은 바가 없다 하였습니다. 줄곧 외지를 돌아다니다 얼마 전에 인족으로 돌아오신 것이로군요! 그러나 곡운 장로의 말을 들으니 일전에 진령세가인 엽 가와 농 가를 언급하셨다고 하던데, 그에 관해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오, 무슨 일인데 그러는가? 편하게 말을 해보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곡운 장로에게 선배님에 대해 전해들은 후 선배님과 동명의 수사들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수백 년 전 천연성 청명위를 맡았던 한립이라는 수사가 있었더군요. 그분이 혹시 선배님이신지요?”

효풍 선자가 나긋나긋 묻는 말에 청포 노인은 깜짝 놀랐다.

한립이 천연성의 일원이었다는 것도 뜻밖이었지만 겨우 수백 년 만에 화신기 수사가 합체기 수사가 된다는 것은 무척 놀라운 일이었다.

“진령세가의 명성이 헛되지 않군! 짧은 시간에 내 출신을 다 파악하다니 말이야. 맞네, 나는 천연성에서 복무하다 임무를 수행하고 자유의 몸이 되어 그곳을 떠났다네.”

한립이 미미하게 안색이 달라졌다가 평온하게 답했다.

“그렇다면 농 가와 엽 가에서 찾아다니던 수사가 한 선배님이셨군요.”

“엽 가와 농 가가 나를 찾아다녔다고?”

“엽 가는 그나마 백 년 간 찾다가 포기한 것 같은데 진령제일세가라 불리는 농 가는 아직도 명령을 거두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근간에 엽 가와 농 가의 관계가 꽤나 악화되어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 일은 없지만 마찰은 적지 않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두 가문이 선배님을 찾기 시작한 후로 그렇게 된 것이고요.”

여인은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한립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바로 대답하지 않고 침음했다.

“큼, 수사께서 이전에 천연성의 청명위였단 말입니까? 잘 되었습니다! 그럼 말 돌릴 것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겠군요. 노부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는 짐작하시리라 봅니다.”

그것을 본 청포 노인이 헛기침을 하고 얼른 입을 열었다.

“척 형께서는 저를 천연성으로 청하시는 것이 아닌지요.”

“맞습니다! 노부는 장로회를 대표해 정식으로 수사를 청하는 바입니다. 물론 합체기 수사로서 장로회의 일원으로 모시겠다는 것이고요. 천연성 장로가 어떤 대우를 받는지는 수사께서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일은…….”

한립이 단칼에 거절하지 않고 고려해보려 하자 여인이 눈을 반짝이고 서둘러 끼어들었다.

“저 역시 척 선배님과 비슷한 제안을 드리려 합니다. 선배님께서 태상객경장로 직을 맡아 주신다면 만족스러운 대우를 해드릴 것이며, 곡 가의 흥망이 걸린 일이 아니고서는 절대 귀찮게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효풍 선자는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그를 회유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청포 노인이 약간 불편한 표정을 지었지만 여인에게 무어라 하지는 않았다. 진령세가 가주인 그녀의 권위가 합체기 수사 못지않았던 것이다.

“인족과 요족에 합체기 존재가 많지 않아 삼황칠지 어디라도 천연성처럼 많은 합체기 수사들이 모여 있는 곳은 없을 겁니다. 장로회 수사들은 평소 자주 서로의 수련 심득을 교류하는 편이고, 만황세계에서 힘을 합쳐 강력한 상고 짐승을 사냥하기도 하지요! 다른 곳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본 성의 장로회에 들어오는 것을 심사숙고해 주시지요.”

잠자코 있던 청포 노인은 한립을 향해 말했고, 한립도 관심이 간다는 눈빛을 보냈다.

“저희 곡 가에는 합체기 태상장로가 한 분뿐이지만 진령세가 중 일가로 진령의 피를 운용하고 부리는데 있어서만은 독특한 비술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듣자니 한 선배님께서 합체기 고비를 뚫으실 때 산악거원의 법상을 드러내셨다 들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인족의 진령세가 중 산악거원의 혈맥을 이어받은 곳은 없습니다. 아마 선배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진령의 혈맥을 얻으셨을 겁니다. 저희 곡 가로 와주신다면 진령의 피를 연화시키고 다루는 법을 익히실 수 있을 겁니다. 또한 만 년 후, 선배님이 따로 진령세가를 창립하고자 하시면 말리지 않고 응당 힘을 보태드릴 것이고요.”

여인은 최후의 한 수를 두었고 청포 노인은 한립이 진령혈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서 한 번, 여인이 내건 조건에서 또 한 번 놀랐다.

“새로운 진령세가라!”

한립 마저도 의외라는 얼굴이었다.

“진령혈맥을 계승하신 선배님을 어찌 태상장로라는 허명으로 오래 잡아둘 수 있겠는지요. 만년 동안만 곡 가의 태상객경장로 직을 맡아 주시다 새로운 진령세가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뛰어난 실력을 지니신 선배님이라 해도 혼자 힘으로 가문을 세우는 것이 쉽지는 않으실 테니, 저희가 지원을 해드리겠습니다. 이권을 나눠가진 여러 세가들이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달가워하지 않을 테니까요.”

여인이 웃으며 하는 말에 한립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척 장로는 절로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직 상대가 대답하지 않았지만 만일 다른 세력에 들어간다면 절대 천연성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곡 가 가주인 여인도 태연한 겉모습과 달리 좌불안석하고 있었다. 자신의 가장 강력한 조건이 상대에게 통할지 도통 확신할 수 없었다.

어쨌든 모든 고계 수도자들이 가문을 건립하거나 세력을 키우는 데 흥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오직 수련에만 매진하기를 원하면 명의상이라도 불필요한 구속을 받는 것을 꺼려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같은 이유로 천연성도 지금까지 합체기 장로를 보충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