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2화. 합체기 진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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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의 손짓에 두루마리 화폭이 서서히 풀렸다. 강력한 살기(煞氣)가 하늘을 찌르고 그림 속에서 금빛이 번져 일시적으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한립은 눈동자에서 남색빛을 일렁이고 영목 신통을 발동하고서야 그림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크고 작은 금색 비검들이 빼곡하게 그려진 그림은 기운이 남달랐는데 괴이하게도 그림 안의 비검들이 무한하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
똑같은 비검들이 크기만 달랐는데 아무리 작은 비검도 지척에 있는 것처럼 선명해 보였다. 그것은 바로 광한계 금제 유적에서 가져온 만검도였다.
한립은 연신술을 수련하면서 만검도에도 적잖은 관심과 시간을 들였다. 그 시간을 통해 그는 검결에 관한 것과 의식을 부리는 방법에 대해 조금 깨달았다.
한립은 수행이 높아지고 청원검결의 마지막 검진인 ‘청반검진(靑蟠劍陣)’도 펼칠 수 있게 되었는데, 춘려검진(春黎劍陣)과 비교해 강하기는 했지만 합체기 수사를 상대하기에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만검도에서 얻은 깨달음을 청반검진에 섞어 보았고, 그 결과 검진의 위력을 대폭 끌어올렸고 순식간에 검진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한립은 만검도를 펼치고 유심히 그림을 응시했다.
지금까지 그림을 보고 깨달은 것을 ‘염검결(念劍決)’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그것이 만검도가 지닌 진정한 능력의 10분의 1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은 깨달음은 너무 어려워 연허기 수사인 그가 익힐만한 것이 못되었다. 한립은 우두커니 한참을 서 있다 소매를 휘저어 만검도를 접어 거둬들였다.
‘광한계에서 얻은 것이 많았지!’
연신술과 만검도 외에 허령단(虛靈丹)도 있었다. 채류앵과 단천인 같은 합체기 수사들이 눈독을 들일 정도라면 얼마나 값어치가 있는 물건일지 예상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단약에 대한 정보를 접하지 못해 합체기 수사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 추측만 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약재 밭에서 채취한 다양한 영약들도 꺼내보았다.
천기자 등에게 넘겨준 영약들도 재배를 위해 한두 개씩은 여분을 챙겨두었었다. 단 하나뿐인 꽃과 과실은 아직 정체를 모르지만 영계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임이 확실했다.
그 중 가장 마음이 쓰이는 것은 마지막에 얻은 은색 연방(蓮房)이었다. 분명 약재 밭에서 가장 진귀한 영약이었을 텐데 아직까지 어떻게 사용하는 줄을 몰라 그냥 두고 보고만 있었다.
한립은 앞으로 기연이 닿아 용도를 알게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중이었다.
홍라과(紅羅果)는 먼저 홍라선주(紅羅仙酒)를 담아도 될 것 같았다. 수명을 늘려주고 체질을 개선해 준다니 장기 복용하면 큰 효과는 없어도 나쁜 점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자랐는지 모를 홍라과로 술을 빚으면 특수한 효과를 낼지도 모르지 않은가. 식독초는 합체기 수행을 높여줄 단약의 주재료였으니 당연히 귀하게 모셔놔야 했다.
그 외에도 부적 몇 장과 병풍의 수미공간에서 찾은 성공도로 부적과 진법에 대한 지식을 쌓을 수 있을 듯했다. 이 모든 것들을 백 년간 연신술과 다른 비술에 집중하느라 저물대에 고스란히 담아 두고만 있었다.
한립은 밀린 과제들을 떠올리며 잡생각을 떨쳐냈다. 누가 뭐래도 합체기에 진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의식이 배로 증폭되고 뇌명대륙에서 고비를 넘기는 데 도움이 되는 단약들을 여러 개 구했으니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준비해야할 단약과 법기들이 아직도 많았다.
합체기 고비는 이전과는 또 다르기에 대량의 단약은 물론이고 따로 진법을 펼쳐 대량의 천지원기를 끌어 모야야 했다.
이 진법은 천연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익히게 된 것인데, 원래 외부인에게는 전수되지 않는 것이라 인연이 닿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진법 구조가 복잡하고 섬세해서 여러 법기를 진법의 눈 삼아 사용해야 했고, 당연히 이 법기들은 한립이 직접 만들어야 했다. 천연성 시장에서 대량의 재료를 구입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파앗-
한립이 저물탁을 허공에 띄우고 그 안에서 옥갑이며 옥병 같은 용기들을 잔뜩 불러냈다. 그리고 붉은색 작은 화로 솥을 꺼내 푸른 법결을 던져 넣었다.
화르륵!
몇 배로 커진 화로에 불길이 치솟고 밀실 온도가 후끈 올라갔다. 한립은 늘어놓은 재료들을 훑으며 옥갑 중 하나에서 금속성 재료를 불러냈다. 새까만 표면에서 영기의 실들을 희미하게 흩날리는 금속은 한 번 공정을 거친 반제품이었다.
쉭!
검은 금속이 화로로 들어가고 한립의 조종에 따라 다른 재료들도 앞 다투어 날아들었다. 이렇게 한립은 장장 두 달을 제련에 매달려 필요한 모든 법기와 단약을 구비했다.
이어 보름간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대형 진법을 펼쳤다. 이제 반년 정도 정기를 비축해 최상의 상태를 만들면 합체기 고비에 도전할 수 있었다.
* * *
곡 가 지부의 하얀 수염 노인이 동부에서 조용히 수련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땅이 진동하고 동부 전체가 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노인이 눈을 번쩍 뜨더니 안색이 급변해 다른 수사들에게 큰 소리로 무어라 명을 내리고 빛줄기로 변해 날아올랐다.
산 정상에 오른 그의 뒤로 다른 수사들도 잇달아 날아들었다. 얼마 전과 비슷한 일이 운해 위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아니, 또 천기현상이!’
운해 속에서 열댓 개의 은빛 찬란한 빛기둥들이 솟아올랐고, 하늘을 받치는 기둥처럼 거대한 은색 기둥 표면에 금색 주술문자들이 반짝였다.
하얀 운해가 극심하게 요동치고 오색찬란한 영기의 빛들이 아주 멀리서부터 밀려들었다.
천지원기가 미친 듯이 운해 중심부로 응집되자 영맥에서도 대량의 영기가 솟아올라 강력한 흡인력에 의해 빨려 들어갔다.
콰르릉!
하늘에 오색구름이 떠올라 그 안에서 천둥소리가 울렸다. 보라색 뇌전들이 한줄기씩 번뜩이기 시작하더니 보라색 뱀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름 속을 배회했다.
돌연 긴 포효소리가 울리고 거대한 영기의 압력이 폭발적으로 퍼져나갔다.
“헉!”
상상을 초월하는 영기의 압력에 수백 리 내의 인족 수사들은 몸이 묵직해졌다. 심지어 수행이 낮은 수사들은 기절을 해버리거나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기도 했다.
수행이 그리 높지 않은 하얀 수염 노인도 눈앞이 침침해져 무릎이 꺾였다.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괴현상에 놀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리고 갑자기 오색구름에서 불경 소리가 퍼지고 다양한 색의 주술문자들이 어른거렸다. 이때 운해 중심부의 산봉우리에서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쿵!
금빛이 터지고 그 안에서 거대한 금색 거대 원숭이가 흉악한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 원숭이가 나타난 순간, 오색구름 속의 뇌전이 그것을 감지한 듯 수많은 보라색 뇌전 뱀들을 방출했다.
뇌전 뱀들은 하나로 뭉쳐져 거대 원숭이에 맞먹는 보라색 거대 교룡을 형성했다.
콰르르릉 콰콰쾅!
엄청난 소리와 함께 보라색 교룡이 거대 원숭이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거대 원숭이는 씩씩거리며 커다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치다 보라색 교룡을 향해 펄쩍 뛰어올랐다.
거대 원숭이가 커다란 손으로 교룡의 목을 쥐고 비틀자 놀랍게도 교룡의 머리가 떨어져 나갔고, 몸통은 뇌전으로 변해 흩어졌다.
거대 원숭이는 빠르게 입을 벌려 금빛을 분출했고 그 금빛은 도처로 흩어지는 뇌전을 휘감아 다시 거대 원숭이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번쩍번쩍 빛나던 뇌전들이 순식간에 모조리 사라졌다. 그러나 거대 원숭이는 멈추지 않고 전신의 기운을 끌어 모아 입에서 금빛 빛기둥을 쏘아 올렸다.
콰르릉! 쿠쿵!
이에 잇달아 굉음이 울리고 빛기둥에 뚫린 부분을 중심으로 오색구름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각양각색의 주술문자들이 거대한 흡입력에 의해 오색구름에서 빛기둥으로 흘러들어갔고 결국 거대 원숭이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빛기둥을 가득 채운 주술문자들이 물밀듯이 아래로 쏟아져 내렸지만 거대 원숭이는 수많은 주술문자를 흡수하고서도 끄떡없었다.
운해 주변의 수사들이 이 광경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특히 하얀 수염노인의 머릿속에는 산악거원과 진령혈맥이 떠올라 더욱 깜짝 놀랐다.
그는 진령세가인 곡 가를 이끄는 족장으로서 보통의 수사들보다는 견문이 넓었다. 그래서 한 눈에 운해 위로 떠오른 거대 원숭이가 산악거원 법상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어쩐지 우리 곡 가에 들어오기를 원치 않더라니, 따로 진령혈맥을 지니고 있었구나! 허나 법상의 기운이 정말 대단하구나. 이렇게 먼 거리에서도 수많은 수사들을 압도하는 힘이라니. 게다가 이번 천기현상은 지난번 것을 초월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천기원기가 몰려든다는 것은 설마 합체기 고비라도 넘고 있단 말인가…….’
하얀 수염의 노인은 수행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머리가 비상한 편이라 순식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했다.
그때 주술문자뿐 아니라 오색구름도 꿀렁꿀렁 빛기둥을 타고 거대 원숭이의 입안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색구름을 전부 먹어치운 거대 원숭이의 허상은 더욱 선명해져 주먹을 쥐고 가슴을 힘차게 두들겼다.
그 순간 금빛을 발산하는 거대 원숭이 주변으로 하얀 돌풍이 일었다. 동시에 만 리 내의 천지원기가 요동치며 콩알 크기의 빛의 점으로 변해 운해로 미친 듯이 몰려들었다.
크아아악!
돌풍 안의 거대 원숭이는 다급히 괴성을 지르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나 오색빛의 점들이 많아질수록 거대 원숭이의 괴성은 잦아들었고, 마지막에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찌 이런 일이…….”
운해 주변의 인족 수사들은 긴장감에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평범한 수사의 몸에 이렇게 많은 천지원기가 몰려들었다면 벌써 터져 죽었을 것이다.
크악!
한식경이 지나 하얀 돌풍 속에서 또 한 번 거대 원숭이의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고,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굉음이 울렸다. 하얀 돌풍이 폭발해 사방으로 흩어지자 거대 원숭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전과 다르게 거대 원숭이의 몸은 다채로운 색깔로 빛났고, 두 눈이 붉게 달아올라 끙끙거리는 것이 광증(狂症)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거대 원숭이의 육체가 조금 모호해지고 주술문자들이 불안정하게 깜빡거렸다. 멀리서 구경하던 수사들은 그것을 직접 보면서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다.
그저 하얀 수염의 노인만이 겁에 질려 있었다.
‘분명 심마(心魔)가 찾아든 것이다!’
여기서 마음이 흔들려 이성을 잃으면 심마의 통제를 받아 엄청난 살육을 자행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은 이전에도 여러 번 보았었다. 이에 하얀 수염의 노인은 더욱 두려움에 떨었고 다급히 법력을 끌어올려 몸을 일으키려 했다. 지금이라도 가솔들을 데리고 떠나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다리를 세우자마자 압력에 의해 무릎을 꿇고 말았다.
거대 원숭이가 내뿜는 영기의 압력은 대단해서 겨우 원영기 수사가 감당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체내의 법력을 끌어올리는 것도 어려워서 다른 수사에게 소식을 전할 수도 없었다.
노인이 떨리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을 때, 한립은 산봉우리 속 밀실에서 소형 진법을 발동해 그 자리에 앉아 죽은 사람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그 위로 금청색 원영이 떠올라 괴이하게도 밀실 한구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원영은 품에 금색 칼자루를 꼭 끌어안고 있었는데 그 주위를 72자루의 푸른 비검들이 물샐틈없이 보호하고 있었다.
비검들 외에도 은색 자와 푸른 솥 그리고 새까만 거검 역시 원영 주위를 천천히 맴돌았다. 괴이한 것은 원영의 한쪽 눈동자는 남색빛으로 일렁이고, 나머지 한쪽은 피처럼 붉었는데 코를 기준으로 얼굴 양쪽의 표정이 달랐다.
한쪽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차분한 태도를 취했다면, 다른 한쪽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원영 체내에 두 명의 한립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래의 한립은 한 손으로 수결을 맺고, 다른 손에는 청동 향로를 들고 있었는데 절반쯤 남은 향초에는 불이 붙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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