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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041화 (798/2,000)
  • 1041화. 선역(仙域)과 금술(禁術)

    *

    거대 법상이 번득이며 사라지고 한립 곁에는 두 개의 빛구슬만이 남았다. 한립은 진중한 얼굴로 각각의 빛구슬을 향해 손을 뻗었다.

    쉭! 쉭!

    금색 빛구슬이 그의 미간 속으로 파고들어 사라졌다.

    그때부터 한립은 이마에 굵은 땀방울들을 흘렸고 몸이 부어오른 상태로 사지를 떨어댔다. 무언가가 엄청난 힘으로 그의 비늘 피부밑에서 울룩불룩 튀어나오려 했다.

    몸을 헤집고 다니는 엄청난 힘에 그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한립의 머리에 자금색 기운이 어려 깜빡거렸고, 얼굴에는 금은색 주술문자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립은 두 눈을 감고 수결 모양을 바꿔가며 필사적으로 법결을 발동했다.

    같은 시각, 한립의 동부가 위치한 산봉우리 위로 놀라운 현상이 벌어졌다. 쾌청하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들어 바람이 몰아쳤고 그 일대가 어두컴컴하게 변했다.

    거센 바람이 지나간 뒤에는 차가운 기운이 밀려들어 남색 우박이 떨어지고 함박눈이 퍼부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천지는 빙하지대를 방불케 했다.

    폭설이 아직 멈추지도 않았는데 이번에는 갑자기 뜨거운 바람이 불어왔다. 거대한 먹구름이 밀려나고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누군가 산 정상에 올라 이 광경을 보았으면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이다.

    영계의 오시(午時)에는 몇 개의 태양이 하늘 위에 남아 있어야 했는데 지금은 단 한 개의 태양만이 떠올라 있었다.

    하나의 태양은 황금색 빛을 머금었고 하늘은 어느 순간 은색으로 변해있었다. 금색과 은색이 서로를 비추는 통에 마치 딴 세상이 된 것만 같았다. 그러나 기이한 천기현상은 아주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하얀 운해와 푸른 하늘 위의 여러 태양들이 제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주변에 거주하던 수사들이 산봉우리 쪽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분분히 동부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자신들이 머무는 산 정상에 오르거나 보물을 방출해 고공으로 올라간 수사들은 하얀 운해 쪽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운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고공에서도 역시 열댓 명의 수사들이 운해 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청수한 외모의 젊은 백의인이 가장 신분이 높은지 하얀 거검을 밟고 맨 앞에 서 있었다. 십여 명의 남녀들은 그 뒤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백의인의 분부만을 기다렸다.

    “정말 욱일봉(旭日峰)을 차지했단 말이더냐?”

    “예, 숙조(叔祖)님! 사흘 전에 욱일봉으로 와 강력한 의식으로 주변 수사들을 쫓아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알고 지내던 원영 후기 수사도 그때 이곳에서 빠져나왔고요. 의식의 힘만으로 법력과 몸이 완전히 제압당해 얌전히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하얀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허리를 굽히고 공손히 대답했다.

    “의식의 힘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원영기 수사를 제압하는 것은 나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열댓 개의 동부에 퍼져 있는 수사들을 동시에 제압하는 것은 연허기 수사라도 능력 밖의 일이야. 연허기 최고봉이라 해도 가능할지 모르겠구나.”

    “그 말씀은 저곳에 합체기 선배님이 계시다는 뜻입니까?”

    노인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다른 수사들도 식겁해 헛바람을 들이켰다.

    “의식의 힘만으로 놓고 따져본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강력한 보물로 발휘한 능력이거나 의식만 유달리 강한 수사일 수도 있겠지.”

    “그런 것이었군요.”

    그 말에 하얀 수염 노인은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전부 내 추측일 뿐이니 그리 안심할 것 없다. 상대는 합체기 수사가 아니라도 분명 연허기 수사일 터! 연허기 수사라면 십중팔구 수행을 대성한 상태일 테니 절대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이야. 저런 고계 수사는 우리 진령세가라 해도 최선을 다해 친분을 쌓아야지 절대 관계를 악화시켜서는 안 된다.”

    백의인이 얼굴을 굳히고 냉랭히 명했다.

    “질손(姪孫)이 어찌 감히 저 선배님의 심기를 건드리겠습니까. 숙조님께서 우연히 이곳을 지나시던 길이 아니었으면 일가를 이끌고 아예 이곳을 떠날 작정이었습니다.”

    “그럴 것은 없다. 저자가 의식의 힘만으로 저계 수사들을 쫓아낸 것은 손속이 잔인한 부류는 아니라는 뜻이다. 천기현상만 보아도 그저 이곳에 잠시 머물며 모종의 신통을 수련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이런 외진 곳을 택해 수련한다는 것은 다른 세력에 소속되지 않은 산수라는 말인데, 우리 곡 씨 가문으로 끌어들여 객경장로로 삼는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아무래도 내가 잠시 여기 머물며 친분을 다져봐야겠구나.”

    “숙조님이 이곳에 머물러 주신다면 저희 일맥의 영광일 것입니다.”

    백의인의 말에 하얀 수염 노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가 조언 한두 마디만 해줘도 일가의 제자들은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곡 가의 방계 혈족에 불과해서 족장인 하얀 수염 노인도 아직 원영 후기 수사에 불과했다. 백의인은 노인의 공손한 태도에 고개를 끄덕이며 멀리 운해를 바라보았다.

    그는 더 이상 천기현상에 변화가 없자 청년 한 명을 근처 산에 남겨 두고 산 아래 동부로 돌아갔고, 주변에 거주하던 수사들도 한참 천기현상을 구경하다 동부로 돌아갔다.

    * * *

    운해 중심부는 아직도 하늘이 은빛으로 반짝였고 황금색 태양이 떠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고 모든 것이 신비한 힘에 의해 고정된 것처럼 변화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도 운해 중심부의 기이한 현상은 유지되었다.

    이튿날, 황금색 태양에 검은 반점이 나타나 번들거렸고, 셋째 날에는 반점이 태양 중심에서 응결해 검은 그림자를 형성했다. 그리고 넷째 날에는 검은 덩어리가 점점 길쭉하고 가늘어졌다.

    다섯째 날에는 기다란 검은 실이 태양을 가로질러 멀리서 보면 눈을 감고 있는 커다란 눈처럼 보였다. 여섯째 날에는 태양의 금빛이 점점 더 강렬해졌다.

    그리고 일곱째 날, 동부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한립이 눈을 떴다. 동시에 태양이 변한 금색 거대 눈이 천천히 눈을 떴고 동공이 일곱 가지 빛을 내며 떠올랐다.

    일곱 가지 구슬 표면에 화려한 기운이 흘러 천지만물을 꿰뚫어 보는 듯한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잠시 후 산봉우리 쪽에서 짐승의 포효가 길게 울려 퍼졌다.

    * * *

    허공에 뜬 새하얀 궁전 속에서 모호한 인영들이 각각 높은 기둥 위에 앉아 멀리서 무어라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영기의 빛으로 얼굴을 가린 그들 뒤로는 다양한 복색의 제자들이 시중을 들고 있었다. 기둥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공간에는 흑백의 기이한 꽃이 떠올라 그윽한 향기를 퍼트렸다.

    “이상한 일입니다.”

    “현명 수사, 무슨 일입니까?”

    일곱 빛깔 영기의 빛을 두른 인영이 입을 열자 하얀 기운의 인영이 이상하다는 듯 물어왔다.

    “누군가 연신술 공법을 익히고 있군요. 1성을 대성해 일으킨 천기현상을 제 감찰 선기(仙器)가 포착했습니다.”

    “연신술이라면 진작 각 선역(仙域)에서 금지한 공법인데 누가 감히 수련을 한단 말입니까? 누군가 수련한다 쳐도 잡아 오면 될 일을 그리 놀랄 것은 무엇입니까.”

    “정말 그렇게 간단한 일이었으면 빈도도 언급하지 않았을 겁니다. 감찰 선기에 따르면 어떤 작은 영계에서 천지 반응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하계 사람이란 소립니까? 이상한 일이긴 합니다. 보아하니 몰래 하계로 넘어간 누군가가 비술을 가져갔나 보군요. 허나 신경 쓸 것 없습니다. 연신술은 선계 사람도 수련하기 어려운데 겨우 영계에서 어찌 마지막까지 대성을 하겠습니까.”

    하얀 빛을 두른 인영이 조금 놀라다 피식 웃어버렸다.

    “저도 선역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요행이 연신술을 익혀도 비승할 때 접인태(接引台)에서 걸릴 테고요.”

    일곱 빛깔 인영도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아무도 하계에서 연신술을 익히는 수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 * *

    한립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의식이 두 배로 증폭된 것을 느끼고 기꺼워했다. 마침내 연신술 제1성을 수련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아직 합체기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의식은 합체 후기 수사를 뛰어넘었다.

    동부 밖으로 의식을 퍼트린 그는 미간을 좁혔다. 천기현상이 사라진 후에도 산맥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우박과 폭설 때문에 화초들은 물론이고 나무들도 상당히 피해를 당했던 것이다.

    얼어 죽은 풀과 나무들 그리고 이리저리 꺾이고 상한 나뭇가지들 때문에 녹음이 푸르던 산이 황량해졌다.

    한립은 산맥을 넘어 더 멀리까지 의식을 퍼트렸다. 그의 의식에 어떤 산 아래 동부에 있는 연허기 수사의 파동이 감지되었다. 층층이 금제로 둘러싸인 곳이었지만 그의 강대한 의식 앞에서는 종잇장을 둘러놓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 줄기 의식을 응결해 금제를 뚫고는 동부의 밀실에서 청수하게 생긴 백의인을 발견했다. 백의인도 금제가 깨지는 파동을 느꼈기에 눈을 뜨고 미소를 머금었다.

    “저는 월남산(月南山) 곡운이라 합니다. 신통을 대성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월남산이라면 진무성(塵舞城) 주변이 아닙니까?”

    “하하, 그렇습니다. 수사께서도 저희 곡 가를 아시는지요?”

    한립의 반문에 백의인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곡 씨 가문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월남산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습니다. 월남산에 은거한다는 수사들이 곡 가 분들이셨군요.”

    “아마 진령세가에 대해 들어보셨을 겁니다. 저희 곡 가도 상고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진령세가 중 하나로 혈맥을 이어가기 위해 외부와 접촉을 삼가고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으나, 수사의 신통에 언제고 알게 될 일이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엽 가와 농 가도 잘 아시겠습니다.”

    한립이 침묵하다 다른 가문 이야기를 꺼냈다.

    “엽 가와 농 가는 진령세가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큰 가문들이지요. 저희 곡 가도 두 가문에 비하면 모자란 감이 있습니다. 혹시 두 가문의 자제들과 안면이 있으십니까?”

    백의인은 조금 머뭇거리다 물었다.

    “만나본 일은 있는데 친분이 깊은 사이는 아닙니다. 그나저나 곡 수사께서는 어찌 이곳에 와계시는 것입니까?”

    “이곳에 곡 가의 자제 한 명이 살고 있어 가끔 지나는 길에 들르고는 합니다. 그러다 우연히 수사가 강력한 신통을 수련중인 것을 듣고 인사나 나눌겸 기다리고 있었지요.”

    한립의 차분한 물음에 백의인이 만면에 웃음을 띠우고 답했다.

    “그러셨군요. 괜찮으시다면 제 거처로 와 이야기를 나누시겠습니까? 저도 진령세가에 관해 관심이 많습니다. 서로 교류하며 깨달음을 나누시지요.”

    “바라던 바입니다. 바로 건너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기다리고 있지요.”

    한립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의식도 밀실을 빠져나갔다.

    일다경 후, 하얀 빛줄기가 날아올라 운해 가장자리에 도착했다. 은색 주술문자 몇 개가 번득이자 움직임이 없던 하얀 안개가 양 쪽으로 갈라지며 통로가 만들어졌다.

    곡운은 고민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고 곧 안개가 다시 꿈틀꿈틀 대며 통로를 봉했다. 한립이 동부 대문을 걸어 나와 웃음을 머금고 곡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곡운은 정말 상대가 연허 후기 수사인 것을 보고 미소가 짙어졌다. 그들은 예의바르게 인사를 주고받고 동부로 들어갔다.

    반나절 후, 한립과 이야기를 주고받던 곡운은 아쉬운 기색으로 운해를 떠났다. 그때 한립은 동부 밀실에서 하얀 옥간을 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농 가가 진령제일세가(眞靈第一世家)라고 불릴 정도로 세가 크고, 합체급 존재가 버티고 있었다니. 앞으로 주의를 기울여야겠구나!”

    곡운이 준 옥간에는 진령세가에 관한 정보가 들어있었다. 물론 기밀이 적힌 것은 아니라서 연허기에 오른 수사라면 자연히 알게 될 정보들이었다.

    곡운은 그저 약소한 성의를 보인 것에 불과했다.

    한립이 상대를 동부로 청한 이유는 이전에 진령세가 중 하나인 농 가에 크게 밉보인 일이 있어서였다. 그들이 엽 가를 노리고 꾸민 음모에 훼방을 놓은 일이었다.

    수백 년 세월이 흘러도 수도자들은 원한을 잘 잊지 못했다. 인족으로 돌아와 오랫동안 거주할 계획을 세웠으니 정보를 모으고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의 예상대로 곡운은 객경 장로가 되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왔다. 그러나 한립은 완곡하게 제안을 거절했다.

    지금 그의 신통에 겨우 곡 씨 가문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까닭이 없었고 그들이 제시하는 조건도 전혀 끌리지 않았다.

    ‘이건 나중 일이고…….’

    팟.

    그가 저물탁에서 팔뚝 길이의 두루마리를 방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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