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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039화 (796/2,000)
  • 1039화. 천연성에 들어가다

    *

    ‘허 선자가 아직 성에 머물고 있단 소리군!’

    탁충의 말에 한립의 눈이 반짝였다. 빙백 선자의 후인인 그녀는 천운족 비 씨 청년이 맡긴 일을 해결할 실마리였기에 당연히 관심이 갔다.

    “저와 마찬가지로 허 선자도 화신기에 이르렀고 지금은 벌써 화신 중기 수사입니다. 흑철위 부대를 이끌고 있고요. 그러고 보니 그간 여러 번 대장님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이전에 지도해 주신 은혜로 지금의 경지에 이른 것이라고요.”

    탁충이 웃음을 흘렸다. 마치 한립과 남모를 인연이라도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딱히 지도라 할 것도 없었는데 그녀의 자질이 뛰어나 좋은 결과에 이른 것이겠지.”

    한립은 고개를 저으며 담담히 중얼거렸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중년인 등 네 명의 수사들은 한결 안심했다. 보아하니 그가 천연성 출신이라는 말은 사실이었다.

    행여나 이종족이 변신해 천연성에 섞여 들어가려는 것이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년인도 탁충과 아는 사이라 눈치를 보다 얼른 포권을 했다.

    “탁 형께서 한 선배님과 아는 사이셨습니다. 저희는 선배님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성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위험한 일이라도 겪으신 것입니까?”

    “위험하다 뿐입니까! 연허급 석원구를 만나 그 자리에 뼈를 묻을 뻔했습니다.”

    “하하, 대장님이 나서셨는데 그깟 석원구가 대수겠습니까! 우리 대장님은 화신급 수행으로도 연허급 이종족들을 격살하던 분이신걸요.”

    탁충이 웃음을 터트렸고, 다른 수사들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한립의 실력을 치켜세웠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세. 급한 일이 있으니 바로 성으로 들어갈 수 있겠나?”

    그때 한립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이런, 제 실수입니다. 먼 거리를 오시느라 피로하실 텐데 이렇게 서계시게 하다니요.”

    탁충이 얼른 비켜서서 뒤쪽의 전송진을 이용할 수 있게 길을 내주었다. 한립은 그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저하지 않고 전송진으로 들어갔다.

    웅!

    전송진에 빛이 번지고 한립과 중년인 일행은 성 안으로 전송되어 사라졌다.  탁충이 텅 빈 전송진 위를 아쉽다는 얼굴로 응시했다.

    “탁 형, 아는 분입니까?”

    “정말 예전에 탁 형의 대장이셨습니까? 그때부터 화신기 수행으로 연허급 존재를 격살했고요?”

    “어쩐지 경지를 헤아리기 어렵다 했습니다. 특수한 신통이라도 익히신 분인가 봅니다.”

    한립이 자리를 뜨자 끼어들지 못하고 있던 다른 청명위들이 탁충에게 질문 공세를 던졌다.

    “물론이지요! 한 대장님은 당시에도 청명위 중에서 유명인사셨습니다. 평범한 천연위도 저 분의 적수는 되지 못했으니까요. 저도 당시 여러 번 신세를 졌었는데 그렇지 않았으면 아직 화신기에 이르지도 못했을 겁니다. 오랜 만에 뵈었지만 과연 연허기 경지에 이르셨더군요. 지금은 실력이 어떠하실지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탁충은 대답하며 속으로는 한립의 그간 행적을 추측해 보았다. 그러나 한립이 다른 대륙에 다녀왔다는 것은 전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같은 시각, 영기의 빛이 가시고 평범한 전당 안에 한립이 도착했다. 중년인과 다른 수사들도 잠시 후 전송되었다.

    “천연성에 도착했으니 우리도 헤어질 때가 되었구만.”

    한립이 뒤를 돌아보며 담담한 시선으로 네 명을 훑었다.

    “선배님의 큰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임시로 춘면각(春眠閣)에 머물 예정이니 심부름이라도 시키실 일이 있다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중년인은 깊이 허리를 숙이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알았네. 혹시 자네들에게 도움을 구할 일이 있으면 춘면각으로 찾으러 감세.”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년인을 지긋이 바라보다 전당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중년인과 나머지 수사들은 그를 배웅하며 고개를 숙였다.

    전당을 나서자 더욱 넓은 대청이 나타났고, 몇몇 사람들이 주변에 위치한 다른 전당들을 바삐 드나들고 있었다.

    오가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대청 출구 쪽에서 두 무리의 청명위들이 이령반(異靈盤)을 들고 드나드는 이들을 일일이 검문했고, 금색 갑옷을 입은 천연위 노인 한 명이 팔짱을 끼고 대청 안을 주시하고 있었다.

    ‘연허 중기!’

    천연위의 수행을 알아본 한립은 그를 향해 걸어갔다.

    성 바깥에서 만난 청명위들은 이종족과 괴수들에게 전송진을 지키는 것이 주 임무였고 이곳이 출입자의 신분을 정식으로 검사하는 책무를 맡고 있었다.

    원래 천연성은 만황세계로 나가는 모든 수사들에게 임시로 통행영패를 발급했다. 그러나 한립은 오랫동안 천연성으로 돌아오지 않아 통행영패가 없었다.

    대청 안을 살피던 천연위가 내부를 살피다 한립을 발견하곤 바로 그를 응시했다. 이에 한립은 비술로 숨기고 있던 기운을 풀어놓았다. 그러자 천연위가 당장 안색이 달라져 그를 향해 먼저 다가왔다.

    “저는 옥령자라 합니다. 성함을 알 수 있을 지요?”

    옥령자라 스스로를 칭한 천연위는 한립을 향해 예의 바르게 포권을 해보였다.

    “한립이라 합니다. 3백 년 전, 저도 천연성의 일원이었습니다.”

    “농담하는 것은 아니시지요? 제가 천연위로 성에서 머문 지 수백 년째인데 어찌 같은 천연위를 몰라보겠습니까.”

    천연위가 얼굴을 굳혔다.

    휙!

    그 말에 한립이 푸른 옥패를 꺼내 던졌고 수척한 천연위가 그것을 끌어와 살펴보았다. 옥패 한 쪽에는 은과문으로 무어라 적혀 있고, 다른 병(丙) 56이라는 금색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립이 예전에 지니던 청명위 영패였다.

    “청명위?”

    천연위가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옥패를 들여다보았다.

    “맞습니다. 문제가 있는지요.”

    “그건 아니지만 확인을 해봐야 할 듯합니다.”

    “그러시죠.”

    태연한 한립의 대답에 천연위가 헛웃음을 짓고는 두 손 사이에 옥패를 두고 영기를 불어넣었다. 금방 희미한 푸른빛이 번졌다.

    “확실히 청명위 영패입니다. 그러나 수사의 청명위 번호는 백여 년 전 삭제가 되었군요. 수사는 이미 자유의 몸입니다.”

    천연위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영패를 확인해 주었다.

    “당시 어려운 임무를 맡아 임무를 성공하면 더 이상 복무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듣기는 했습니다.”

    “3백 년 전에 어려운 임무라면…….”

    “그때 일을 기억하십니까?”

    “당시 특수임무를 맡았던 수사들 중 하나셨군요! 괜히 실례를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신분에 문제가 없으니 지나가셔도 됩니다. 다만 청명위 영패는 제가 회수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저도 오래 성을 떠나 있던 터라 딱히 신분을 증명할 길이 없어 내놓았을 뿐입니다.”

    한립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고, 수척한 천연위가 손을 들자 청명위들이 길을 비켜섰다.

    대청이 위치한 어느 석탑 꼭대기에서 푸른 빛줄기가 빠져나갔다. 푸른 빛줄기는 몇 번 번득이고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이령반은 아무 이상 없겠지?”

    수척한 노인이 한립의 둔광이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상 없습니다. 한 선배님은 인족이 분명합니다.”

    청명위 한 명이 당차게 답했다.

    “청명위 영패도 반납하지 않고 어딜 다녀온 것인가. 설마 내내 만황세계를 돌아다녔단 말인가! 하긴 3백 년 만에 화신기에서 연허 후기의 수행에 오르려면 엄청난 기연을 얻기는 했을 텐데……. 쯧, 인족인 것을 확인한 것으로 되었으니 굳이 괜한 일에 신경 쓸 것은 없겠지.”

    수척한 천연위가 푸른 둔광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저었다.

    수백 년 만에 연달아 경지가 상승하는 경우는 없었으나 수많은 기연들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만일 상대가 이전에 청명위가 아니었다면 천연위로 들어오라고 제안했겠으나 어렵사리 자유를 되찾은 마당에 포섭될 리 없었다.

    수척한 천연위는 대청에서 걸어 나오는 네 명의 화신기 수사들이 눈에 띠었다.

    * * *

    둔광 속의 한립은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3백 년이 훌쩍 지났는데 천연성은 거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전히 검은색과 흰색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저공비행을 하며 순찰을 돌았고 몇몇 건물은 바삐 드나드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한립은 편안한 마음으로 천연성 시장으로 향했다. 고생해서 돌아왔지만 천연성에 오래 머물 계획은 아니다.

    풍원대륙을 가로지르는 백년 간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의지를 다졌고 합체기에 이를 조건들도 완비를 해두었다. 일정 기간 기운을 비축한 다음 바로 고비를 뛰어넘을 시도를 해볼 작정이었다.

    그가 지닌 강력한 신통들과 보물을 고려해봤을 때 합체기에 이르면 합체 후기 수사와도 겨뤄볼만 할 것이다. 그 말은 인요족에서 그를 어찌할 자가 없다는 뜻이었다.

    한립은 천연성 인근에 조용한 장소를 찾아 폐관수련에 들어가기 전 백여 년간 소모한 재료들을 보충할 생각이었다. 그간 필요한 것들을 이종족 구역에서 구하긴 했지만 변두리만 돌아다녀서 충분한 수량을 찾지 못했다.

    뇌명대륙에서 출발하기 전 미리 물건을 구비해 두지 않았으면 몇몇 수련과 연구에 차질이 있었을 것이다. 천연성 시장이라면 충분한 재료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전에 여러 번 가본 곳이라 한립은 반 시진 만에 시장에 도착했다. 한립은 멀리 전당을 바라보며 요족 여인의 모호한 신영을 떠올렸다. 이름 모를 요족 여인과의 거래를 통해 자주 귀한 종자들을 얻고는 했었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종자들을 모으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을 것이다. 그녀는 나름 내력이 있는 요족 수사 같았다.

    당시에도 이종족의 침공에 대해 미리 알고 천연성을 떠나지 않았던가! 한립은 전당에서 시선을 돌려 비교적 규모가 있는 재료 상점으로 들어갔다.

    “저희 상점은 각종 재료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점포 안에는 점원만 대여섯 명은 되었고 그중 깨끗한 인상의 소년이 얼른 한립에게 다가오려 했다.

    “너는 물러가거라. 이분은 내가 안내할 것이다.”

    한립이 입을 떼기도 전에 대나무 의자에 앉아 있던 주인이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상점 주인은 결단기 수행으로 한립을 향해 공손한 어투로 인사했다.

    “아휴, 제가 선배님 같은 분이 찾아주시는 줄도 모르고 마중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조심스런 태도에 한립은 약간 의아해졌다. 성에 들어온 후로 경지를 감추지는 않았지만 결단기 수사가 그의 수행을 제대로 알아볼 리 없었다. 그러나 노인이 손에 들고 있는 진법 원반 법기를 본 순간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영압반(靈壓盤)을 지니고 있었군. 내 재료를 대량으로 구입하려 하니 모아 오게.”

    한립은 하얀 옥간을 꺼내 노인에게 던져주었다. 옥간을 받은 노인은 내용을 확인하고 그 수량에 놀라면서도 기뻐했다.

    “이렇게 많은 재료들을 원하십니까? 저희 점포에서 대부분을 충당할 수 있으나 일부는 다른 곳에서 구해 와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알겠네. 일각 주지.”

    한립은 담담하게 분부했다. 노인은 그를 자리로 안내하고 바삐 다른 점원들을 부려 창고의 재료들을 모아오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인근 상점들을 돌며 한립이 필요로 하는 다른 재료들을 구하러 나갔다.

    주인의 열띤 반응에 점원들도 그가 대단한 존재라는 것을 눈치 채고 공경스런 눈빛을 보내왔다. 한립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눈을 감고 기다렸다.

    일다경이 채 지나지 않아 주인이 저물탁을 들고 신이나 뛰어 들어왔다. 점원들도 크고 작은 상자며 병 등의 용기를 잔뜩 쌓아둔 후였다.

    한립에게는 아주 평범한 재료들이었지만 재료 상점에서는 귀하게 취급되는 고가품이었다.

    한립은 의식으로 저물탁과 용기 안의 내용물을 훑고는 가격을 물었다. 이에 노인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천문학적인 숫자를 제시했다.

    그러나 한립은 아무렇지 않게 주머니를 꺼내 던져주었고 주인은 연신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는 물건을 챙겨 바로 시장을 떠나 천연성의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몇 시진 후, 그는 당당하게 천연성을 떠나 끝없이 펼쳐진 산맥을 가로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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