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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038화 (795/2,000)
  • 1038화.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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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립은 이제야 어째서 합체기 수사도 대륙을 가로지는 일에 대해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실력에도 수차례 죽을 뻔했으니 평범한 합체기 수사라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이런 경험은 최상급 수사에게 꼭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평소 안정된 지위를 누리는 그들이 위기 속에서 심기를 굳건히 하고 기연을 찾아 수행을 높일 수 있는 기회였다.

    마찬가지로 고생한 만큼 한립이 얻은 것도 적지 않았다.

    진귀한 재료들을 모은 것은 물론이고 가끔 마주치는 이종족 거주지에 몰래 들어가 그들의 특별한 비술이나 법결을 익히기도 했다.

    발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는 항상 이종족 거주지의 변두리나 작은 성을 택했다. 그런 곳은 최상급 수사가 머물지 않아 감수해야 할 위험도 크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매번 일이 잘 풀렸던 것은 아니었다. 한번은 명족(鳴族)이라고 불리는 이종족의 작은 성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스스로를 ‘뇌운자’라 밝힌 이족인을 만났다.

    분명 연허 중기밖에 안 되는 그는 놀랍게도 한눈에 그의 정체를 간파했고 둘은 뜨겁게 맞붙었다. 그 결과 속전속결을 하려던 한립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분명 연허 중기의 수사였는데 그와 붙어도 밀리지 않았던 것이다.

    뇌운자는 전설 속의 오뢰체(五雷體)를 지녀 태생적으로 다섯 가지 뇌전의 힘을 다뤘고, 상고시대 때 실전된 벼락 관련 신통을 수련해 몸을 뇌전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었다.

    수행의 한계로 오래 지속하지는 못해도 한립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능력이었다. 더욱 대단한 것은 뇌운자가 명족 진법종사(陣法宗師)라 자신의 벼락 신통을 응용해 독자적인 ‘뇌광진법(雷光陣法)’을 개발했다는 것이다.

    체내의 뇌전을 각종 진법으로 변화시켜 적을 가두거나 공격하고 심지어 방어까지 할 수 있는 참신한 신통이었다.

    당연히 뇌운자도 강력한 신통들을 지닌 한립을 쉽게 압도하지 못했고 그들의 싸움은 한 달 넘겨 이어졌다. 그러다 그들은 예상 외로 친분을 쌓기에 이르렀다.

    한립은 상대의 뇌광진법이 신기했고, 뇌운자는 한립의 벽사신뢰와 뇌문(雷紋)에 흥미를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의기투합해 아예 자리를 옮겨 서로의 깨달음을 교환했다.

    한립은 굉장히 실용적인 뇌광진법 중 몇 가지를 배우고, 뇌운자는 약간의 벽사신뢰를 얻어감과 동시에 뇌문술(雷紋術)을 익혀갔다.

    그런데 만족한 얼굴로 뇌운자와 헤어진 후 한립은 뇌광진법에서 문제점들을 발견했다. 원래 익히기 극히 어려운 신통인지 아니면 뇌운자가 몰래 몇 군데를 손보아 놓았는지 수련하면 할수록 이런저런 문제들이 많았다.

    한립은 수련 끝에 분명 뇌운자의 짓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욕설을 내뱉었다.

    그도 뇌문술에 장난을 쳐놓아 상대도 열 번 중에 한 번이나 뇌전 문양을 응결할까 말까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한립은 전수받은 뇌광진법을 부득이하게 개선해야 했다. 조금 전 바다거북과 수사들 위에 나타난  뇌전전송진(雷電傳送陣)이 그가 가장 중시하는 뇌광진법 중 하나였다.

    뇌전의 힘을 이용해 단거리 전송진을 만들어내는 신통으로 만 리 정도를 이동할 수 있었다. 뇌운자가 펼쳤으면 전송되는 장소도 정확하고 짧은 시간 안에 전송이 완료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립은 법결이 완전하지 않아 아무리 수정해도 만 리 범위 내에서 무작위로 전송되었다. 또 신통을 펼치는 시간이 열 배는 더 걸렸다.

    방금 전에도 개선한 뇌전전송진을 펼쳐 보았지만 여전히 아무 곳으로나 전송되었다. 그래서 방금 전에도 전송되자마자 뇌운자를 떠올리며 열을 낸 것이었다.

    풍원대륙을 가로지르느라 백여 년을 헤맨 그가 인족 수사들을 보고 기뻐한 것은 당연했다. 대륙 지도를 통해 인족 지역과 가까워졌다는 것은 알았지만 정확히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오랜만에 동족 수사들을 만나니 기분이 남달랐다.

    오랜 세월 이종족과 괴수들에게 시달리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도 커졌고 더욱이 남궁완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녀가 영계로 비승해 이미 천연성에 있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많은 생각들이 파도처럼 출렁였지만 한립은 무표정하게 푸른 비차를 방출했다. 날개달린 늑대 두 마리가 끄는 커다란 비차에는 오묘한 주술문자들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심한 부상을 당한 것 같은데 그대로 장거리를 이동하는 것은 무리일세. 비차에 올라 요양하며 길을 안내해 주는 게 어떻겠나?”

    “감사합니다, 선배님!”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화신기 수사들은 밝은 얼굴로 득달같이 대답했다. 한립이 스스로 합체기 수사가 아니라고 했지만 평범한 연허기 수사가 동급 석원구를 손쉽게 처리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명에 따라야 했고 솔직히 요양도 그들이 원해 마지않던 일이었다. 수사들이 비차에 오르고, 한립은 푸른 늑대 꼭두각시들에게 법결을 흡수시켰다.

    그러자 꼭두각시들이 낮게 울부짖고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꼭두각시들은 날개를 펄럭이며 전방을 향해 질주했다.

    파앗.

    곧바로 주술문자가 꿈틀거리며 떠올라 비차를 푸른 보호막으로 감쌌다.

    “자네들은 3경 중 어디 출신 수사들인가? 이곳에서 천연성은 얼마나 걸리지?”

    한립은 비차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수사들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저희는 모두 현무경의 종문(宗門) 출신입니다. 이곳은 천연성에서 대략 반 년 쯤 떨어진 곳이고요.”

    중년인이 아무래도 네 명 중 수행이 가장 높은지 앞서 대답을 했다.

    “반 년 거리라면 천연성의 최근 정황에 대해 파악하고 있겠군.”

    “천연성에서 몇 년간 머문 터라 그곳 사정을 알기는 합니다. 하지만 수행이 높지 못해 기밀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한립의 의도를 파악한 중년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하, 걱정할 것 없네! 나도 천연성 출신이라 최근 정황을 들으려는 것뿐일세. 그나저나 천연성이 멀쩡하다는 것은 이종족 침공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소리로군.”

    상대가 경계하는 바를 알고 한립이 미소 지었다.

    “이종족 침공이요! 그때부터 천연성을 떠나계셨습니까? 당시 몇몇 이종족들이 연합해 성을 공격하는 바람에 인족과 요족에서 상당한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소문으로는 합체기 수사도 목숨을 잃었다고 하고요. 그런데 웬일인지 전쟁이 한창 격렬한 와중에 이종족 대군이 퇴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천연성은 무사할 수 있었지요.”

    놀란 중년인이 성실하게 그때의 일을 이야기했다.

    “퇴각?”

    “예, 당시에도 그 이유에 대해 말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요족의 정예병들이 이종족들의 근거지를 급습해 퇴각했다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새로운 현천의 보물이 출현해 그것을 쫓아 이종족들이 군사를 물렸다는 소리도 있었습니다.”

    홍갑 거한이 말을 이어받아 설명했다.

    “현천의 보물에 대해서는 또 어떤 소문이 돌았는가?”

    한립은 흠칫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온갖 기이한 소문이 다 돌았습니다. 다른 이종족 영토에 갑자기 현천의 보물이 생겨났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다른 대륙의 성계 수사가 보물을 들고 저희 대륙으로 온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고요. 더욱 희귀한 소문은 하계에서 비승한 수사가 현천의 보물을 지니고 올라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중년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하하, 하계에서 비승한 수사라!”

    한립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선배님께서도 황당한 소리라 생각하시는군요. 현천의 보물이 어떤 물건인데 하계에서 들고 올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런 이상한 소문을 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 수사 중 한 명이 빙긋 웃으며 끼어들었다.

    “확실히 믿기 어려운 소리구만. 됐으니 백여 년간 삼경칠지(三境七地)에서 일어난 굵직한 사건들에 대해 들려주게.”

    “인요족을 떠들썩하게 만든 일들이 한 둘이 아니라 시간이 조금 걸릴 것입니다.”

    한립의 분부에 중년인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갈 길이 멀지 않은가. 될 수 있으면 상세히 들려주면 좋겠군.”

    “그렇게 말씀하시니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중년인은 한 손에 영석을 들고 있었는데 서서히 원기를 되찾아가는 중이었다.

    “최근 삼경에 발생한 일 중 천령경의 천묘영황이 수십 년 전 대천겁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망한 것이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새로운 영황(靈皇)을 인족 전체에서 선발할 예정이고요. 다음으로 칠요왕 중 이화교왕(离火蛟王)의 어린 딸이 괴이하게 실종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화교왕이 수하들을 시켜 떠들썩하게…….”

    중년인은 주요 사건을 하나씩 언급했고 홍갑 거한과 두 여인이 때때로 세부적인 사항을 더하거나 빠트린 부분을 채웠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한립은 점점 생각이 많아졌다. 그가 떠나있던 백 년간 인요족에 놀라운 일들이 꽤 많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야기는 반나절 동안 이어졌고 비차 안에 침묵이 흘렀다. 화신기 수사들은 눈치 있게 입을 다물고 한립의 반응을 기다렸다.

    “남궁완이라는 하계 여인이 천연성에 나타나지는 않았는가?”

    한립이 곰곰이 생각하다 돌연 여인에게 한마디 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입니다. 천연성의 다른 수비병들은 몰라도 하계에서 비승한 수사들은 몇 되지 않아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들어봤을 것입니다.”

    중년인은 기억을 되짚으며 단언했다.

    “……혹시 다른 이름을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간 비승한 여 수사는 얼마나 되는가?”

    “많지는 않지만 있기는 할 것입니다.”

    “알았네. 오랜 시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느라 고생했으니 앞으로는 각자 요양하며 편하게 가면 될 것이야.”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고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남궁완의 온화한 목소리와 웃음기 어린 얼굴이 떠올라 평온한 겉모습과 달리 평정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녀가 아직 비승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리움이 사무쳤다. 가슴에서 희미한 통증이 느껴졌다.

    푸른 비차는 화신기 수사들이 둔광을 연결해 전속력을 다했을 때보다도 훨씬 빠르게 날아갔다. 반년 거리라던 여정은 한 달 반밖에 걸리지 않았고 산악처럼 거대한 천연성 성벽이 저 멀리 모습을 드러냈다.

    한립은 비차에 서서 복잡한 심경으로 천연성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외지를 떠돌다 다시 되돌아온 것이다.

    “선배님, 전송진을 이용해 성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곁에서 중년인이 조심스레 건의했다.

    비차 앞에 성벽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전송진법이 펼쳐져 있었고 그 곁을 푸른 갑옷을 입은 십여 명의 청명위들이 지키고 있었다.

    진법이 반짝이고 몇 명이 그 안에서 걸어 나와 청명위들과 잠시 담소를 나눈 다음 날아올랐다. 천연성으로 통하는 전송진이었다.

    만황세계와 맞닿은 성벽에는 성문이 아예 없었고, 보통 만황세계를 드나 들려면 전송진을 이용해야 했다. 다만 천연성에 상주하는 수비병들이 임무를 맡았을 때는 따로 숨겨진 전송진을 이용할 수 있었다.

    한립이 지그시 비차를 밟아 아래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래의 청명위들도 진작 커다란 비차를 감지하고 있었기에 여러 의식들이 뻗어 나왔다.

    한립은 비차를 거두고 나머지 네 명의 수사들과 함께 전송진 인근으로 내려갔다.

    “대, 대장님!”

    고개를 돌리자 어디선가 눈에 익은 이가 그를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는 천연성에서 그가 이끌던 흑철위 중 한 명인 탁충이었다. 그는 지금 화신 초기에 이르러 있었다.

    “누군가 했더니 탁 수사였구만. 늦었지만 청명위가 된 것을 축하하네.”

    한립이 미소를 띠우고 온화하게 말했다.

    “정말 대장님이셨군요! 와, 설마 벌써 연허기 경지에 이르신 것입니까!”

    반가운 얼굴로 그를 살피던 탁충이 놀라 물었다. 의식으로 훑어도 수행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어 추측한 것이다.

    “그렇게 되었네. 성에 들어가기도 전에 탁 수사를 만날 줄은 몰랐군. 다른 이들도 잘 지내고 있는가?”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대장님이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이종족 침공이 있었습니다. 대원들 중 절반이 전쟁 중에 사망하고 남은 몇몇도 천연성을 떠나 이제는 저와 허 선자 둘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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