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6화. 거령부(巨靈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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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이 영초들이면 오랜 세월 갇혀 있던 수련의 고비를 넘어설 수 있겠습니다.”
단천인은 옥갑을 챙기며 뿌듯하게 중얼거렸다.
“그 녀석에게 아직 영초 일부가 남아 있을 텐데, 그것에는 관심이 없으신지요?”
천기자 포동포동한 얼굴을 씰룩이며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다. 단천인과 채류앵은 단번에 그의 말뜻을 알아들었지만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다.
“우리 셋이 힘을 합치면 그 녀석 하나 처리하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비 선배님이 친히 내린 명령을 잊으신 겝니까? 특별히 우리에게 전송진 봉쇄를 풀고 녀석을 보내주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비 선배님과 인연이 있는 것이겠지요.
게다가 제자에게 들은 약재 밭의 규모로 보아 이것들만 해도 거의 전부를 내놓은 것과 같습니다. 남겨 놓았다고 해도 아주 약간일 텐데 그걸 위해 비 선배님을 분노케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또한 녀석의 신통이 제법이고 눈치도 빨라 일을 그르칠 가능성도 있고요.”
동요하던 단천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거절했다.
“저도 단 형의 말씀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일로 비 선배님의 심기를 상하게 한다면 아무리 저희가 성족 수사라도 감당하기 어려울 겁니다.”
채류앵도 신중하게 단천인의 의견에 힘을 실었다.
“그렇다면 노부가 방금 한 말은 없던 것으로 하시지요. 저도 욕심이 앞서 그냥 해본 말입니다.”
천기자가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기며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 * *
한립은 푸른 장포를 펄럭이며 산길을 따라 산봉우리를 내려가고 있었다. 담담한 겉모습과 달리 그는 속으로 이번 거래의 손익을 계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겉으로는 대량의 선계 영초를 겨우 몇몇 재료와 단약으로 교환했으니 큰 손해를 본 것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가 손해 본 것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크게 남는 장사였다.
광한계에서 채취해온 영초를 전부 하나씩 따로 챙겨 놓았으니 돌아가는 대로 신비한 병으로 재배하면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다. 홍라과와 식독초는 신비한 병이 통할지 확신할 수 없어 몇 개만 내놓고 대부분은 남겨 두었다.
거기다 단 하나뿐인 영초와 신비한 은색 연꽃은 아예 꺼내놓지도 않았고 말이다. 한립은 기분이 퍽 좋아졌다. 그는 인근의 다른 산봉우리를 찾아가 객잔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3일 동안 복교성 곳곳의 재료 상점을 바삐 돌아다니며 대량의 재료들을 구매했다. 그다지 진귀하진 않지만 뇌명대륙에서만 구할 수 있는 특산품들이었다. 풍원대륙으로 돌아가면 언제 다시 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미리 챙겨두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나흘 째 되는 날 아침 한립은 객잔을 떠나 복교성 밖으로 나섰다. 청교봉은 복교성 서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봉우리였다.
거대한 산맥 속에서 청교봉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산에 교룡을 닮은 구불구불한 나무들이 자라지 않았으면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푸른 둔광을 거두고 청교봉 상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한립은 강대한 의식으로 아래쪽을 훑었다. 아직 향지례는 오지 않은 듯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소매 속에서 열댓 개의 진법 깃발을 쏘아 보냈다. 깃발들이 산봉우리 쪽으로 스며들어 사라지고서야 그도 아래로 내려갔다. 한립은 깨끗한 바위를 찾아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
몇 시진이 흘러 한립이 눈을 번쩍 뜨고 복교성 방향을 바라보았다. 하늘 끝에서 빛줄기 하나가 날아들고 있었다.
“한 사제, 내가 조금 늦었네. 많이 기다렸는가!”
빛이 가시고 노란 장포를 입은 향지례가 미안하다는 얼굴로 한립 곁에 내려섰다.
“오래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이제 하려던 말씀을 하시지요.”
“그래야겠지! 그전에 이것 좀 봐주게.”
향지례는 커다란 소매 속에서 녹색으로 반짝이는 옥함을 건넸다.
“이것이 제게 주시겠다는 물건입니까? 어떤 물건인지 궁금합니다.”
한립이 옥함을 살피려하자 뜻밖에도 의식이 튕겨 나왔다. 옥함 내부에 현묘한 금제가 걸려 있었다.
“허허, 열어보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일세.”
향지례가 눈짓으로 옥함을 열어볼 것을 재촉했다. 이에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 녹색 옥함을 손으로 저울질해 보았다. 마치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것처럼 가벼웠다.
한립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향지례를 힐끔 살피고는 별안간 옥함을 허공에 던지고 소매 속에서 푸른 검기를 방출해 갈랐다.
“아!”
향지례는 깜짝 놀랐지만 말릴 틈이 없었다.
서걱!
옥함이 푸른 검기에 잘려 떨어지고 허공에 금빛 찬란한 부적이 날아올랐다. 은색 문양이 가득 그려진 부적 주위로 금은색 주술문자들이 희미하게 떠올라 있어 신비한 느낌이 들었다.
“이 거령부(巨靈符)는 노부가 인계에서 우연히 구한 것인데, 화신기 이상의 존재만이 부릴 수 있다네. 공간접점을 통과할 때도 이 부적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 그러나 이미 결단기 수준으로 떨어진 마당에 남겨 두어 무엇 하겠나. 한 사제에게 넘겨 줄 터이니 인족으로 돌아가면 내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게. 약속하건데 절대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야!”
향지례는 한립의 돌발행동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진심어린 어조로 부탁했다. 그러나 한립은 미간을 좁히며 손을 뻗어 금색 부적을 끌어왔다.
거령부에서 느껴지는 정순한 영력에 그는 미간 사이에서 몇 줄기 수정실을 뿜어냈다.
“의식정화(意識晶化)!”
놀란 향지례가 소리를 높였다. 바로 그때 이변이 발생했다.
웅!
영기를 가득 머금고 있던 거령부가 진동하더니 금색에서 점점 검은색으로 바뀌어갔다. 그리고 부적 속에서 회백색 실 뭉치가 쏘아져 나와 극히 빠른 속도로 한립에게 쇄도했다.
그러나 한립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동요하는 기색 없이 두꺼운 금색 보호막을 둘렀다. 아주 단단해 보이고 실제로도 강하기 그지없는 보호막이었다.
범성진마공으로 만들어낸 보호막은 최상급 보물이 아니고서는 뚫을 수 없었다. 그런데 괴이하게도 회백색 실들이 아무렇지 않게 보호막을 통과해 한립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서늘한 기운이 퍼진다고 느낀 순간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쾅!
그 순간 향지례가 교활한 웃음을 머금고 수결을 맺어 자기 몸을 터트렸다.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고 핏빛 그림자가 그 안에서 튀어나와 한립에게 달려들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광경이었다.
한립의 몸에 검은 기운이 몽실몽실 피어올라 새까만 갑옷으로 변했다. 천외마갑에서 무수히 많은 검은 주술문자들이 떠올라 괴이한 핏빛과 충돌했고, 핏빛은 비틀거리며 튕겨나가 원형을 드러냈다.
눈에서 남색빛을 번득인 한립은 핏빛 그림자의 본모습을 꿰뚫어 봤다.
‘저건!’
오랜 세월 풍파를 겪어온 그의 안색이 확 달라졌다.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악귀가 향지례의 얼굴을 했다가 모호하게 또 다른 사내의 얼굴로 변해갔다.
마지막 사내는 향지례와 함께 공간접점에 들어간 호 노마였다. 핏빛 악귀는 물 흐르듯 얼굴이 변해 세 가지 모습을 반복적으로 드러냈다.
“천마갑? 말도 안 돼. 어찌 천마(天魔)만이 지닐 수 있는 갑옷을 입고 있는 것이냐!”
핏빛 악귀는 몸을 가누며 노호성을 터트렸다. 분명 향지례의 목소리였는데 아주 낯설었다. 한립이 코웃음을 치며 피부에 금색 비늘 갑옷을 드리웠다.
“천마갑을 입으면 내가 너를 어쩌지 못할 것 같더냐!”
핏빛 그림자가 괴이한 소리를 내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핏빛 돌풍이 생겨나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돌풍 속에서 콰르릉 거리는 소리와 함께 핏빛 뇌전들이 번득였다.
핏빛 그림자가 중얼중얼 괴이한 소리를 내자 돌풍이 수축해 핏빛 주술문자로 변해 떠올랐다. 그 안에서 광포한 파동이 느껴졌다. 핏빛 부적은 핏빛 뇌전으로 변해 허공을 갈랐다.
쾅!
뇌전과 검은 주술문자의 충돌로 영기의 빛이 요란하게 반짝였고, 뜻밖에도 검은 주술문자가 먼저 흩어져 핏빛 뇌전에 길을 내주었다.
펑!
핏빛 뇌전이 새까만 갑옷 표면에 손바닥만 한 구멍을 만들어내자 핏빛 그림자가 교활한 미소를 드러내고 그 속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인근 허공에 파문이 일고 금색 거대 손이 나타나 핏빛 그림자를 번개처럼 잡아챘다.
금색 거대 손 안에서 원형을 드러낸 핏빛 그림자는 입에서 맹렬히 핏빛 화염을 분출했다. 그러나 한립은 움직이지 못해 지척에서 날아드는 핏빛 화염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입 꼬리를 끌어올린 그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걸리더니 양 미간에서 검은 빛이 번득이고 세로로 길게 늘어진 새까만 동공이 나타났다. 그 안에서 검은 빛이 뻗어나가 핏빛 화염을 공격했다.
푸쉭!
인근 공간이 왜곡되고 핏빛 화염과 검은 빛이 동시에 종적을 감추었다. 놀란 핏빛 그림자가 다른 신통을 쓰려했지만 이미 기회를 놓쳤다.
금색 거대 손에서 은색 화염이 흘러나와 화륵! 하고 핏빛 그림자를 휘감았다. 그러자 핏빛 그림자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은색 화염 속에서 끈질기게 요동쳤다.
뼈가 없는 것처럼 길게 늘어났다가 동그랗게 뭉쳤다가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변해도 금색 거대 손의 힘은 풀리지 않았고, 은색 화염은 거세게 타올랐다.
순식간에 비명 소리가 그치고 핏빛 그림자는 사라져버렸다.
핏빛 그림자는 원래 형체가 없는 몸이라 일반적인 보물과 신통으로 가둘 수 없었는데 범성금신으로 만들어낸 금색 거대 손이 불가사의한 위력을 발휘해 핏빛 그림자를 잡아챈 것이다.
서령진화야 원래 무엇이든 잘 집어삼켰고 여러 종류의 화염을 흡수한 후에는 마물이나 사기에 극적인 효과를 보였으니 두 말 할 것도 없었다. 파멸법목이 서서히 감기고 한립의 미간에서 소실되었다.
그는 온몸에 금빛을 발산하며 주문을 외고는 입에서 주먹 크기의 빛구슬을 내뿜었다. 금빛으로 감싸인 빛구슬 안에 회백색 실이 뭉쳐있었다.
조금 전 체내에 스며든 이물질을 진원의 힘으로 강제로 밀어낸 참이었다. 회백색 실이 빠져나오고 그의 몸도 자유를 되찾았다.
한립은 주저하지 않고 은색 화염을 부려 금색 구슬 속 실 뭉치를 태워버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흩어져 있는 잔해들을 내려다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향지례가 무슨 일을 당해 체내에 핏빛 그림자와 같은 사악한 존재를 품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몸은 확실히 그의 것이었다. 핏빛 그림자의 괴이한 얼굴 변화로 보아, 향지례의 의식은 이미 그 마물의 원신에 잡혀 먹혔을 공산이 컸다.
운성에서 처음 향지례를 보았을 때 제혼이 안절부절 못하며 경고하지 않았으면 한립도 향지례의 이상을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에게 해만 끼치지 않으면 놔두려고 했는데 만날 때마다 흑심을 드러냈다.
그래서 무슨 속셈인지 알아보려고 일부러 약속을 잡아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광한계에서 수행이 높아진 그가 겨우 핏빛 그림자의 암습에 두려워할 까닭이 없었다.
핏빛 그림자는 향지례의 육신을 폭파해 정혈을 흡수한 대가로 단시간에 괴이한 능력을 발휘했지만 그를 어찌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 자리에 서서 향지례의 잔해를 보는 한립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인계에서 최정상에 서있던 향지례의 마지막이 이렇게 처참할 줄이야!’
그와 호 노마가 공간접점에서 위해를 당한 것인지 아니면 영계로 와서 핏빛 그림자에게 잡혀 먹힌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찌 되었든 한숨이 절로 나오는 일이었다.
한립은 새빨간 불덩이를 날려 향지례의 잔해를 재로 만들고 돌아섰다. 거령부라고 속였던 부적은 핏빛 그림자가 사라지고 재로 변해 없어진 지 오래였다.
회백색 실뭉치의 강력한 위력에 연구해 보려고 했는데 아쉬운 일이었다. 그는 주변에 미리 뿌려 놓은 진법 법기들을 회수했다. 그러자 영기의 파동을 숨겨 주는 진법이 흩어졌다.
향지례가 산봉우리에 내려선 순간 진법을 발동해 핏빛 그림자를 처리하는 동안 기운이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성에서 청교봉이 너무 가까워 누군가 눈치를 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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