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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034화 (791/2,000)

1034화. 우연

*

한립이 통령전에서 나오자 문밖에 거대한 은색 비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화려한 문양의 네모난 비차를 여섯 마리의 사마귀 괴수들이 끌고 있었다.

비차에는 월 선자와 류수아 등이 먼저 올라 타 있었고, 새까만 얼굴의 거한이 맨 앞에 서서 통령전 대문을 주시했다. 한립이 나오자 그가 눈을 번뜩였다.

“한 수사, 바로 출발해야하니 어서 오르게.”

“감사합니다, 선배님!”

새까만 거한이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 의외였지만 한립은 내색하지 않고 비차에 올라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새까만 거한이 휘파람을 불자 여섯 마리 사마귀 괴수들이 날개를 펄럭이며 출발했다.

마차가 떠오르는 순간 청록색 보호막이 펼쳐졌다.

각치족이 운성을 침공했어도 아직 함락당한 것은 아니었다. 운성 후방을 천운인들이 장악하고 있었기에 비차는 순조롭게 나아갔다.

*   *   *

보름 후, 한립은 천운 지역의 또 다른 거대성인 복교성에 도착했다. 하늘에 떠 있던 운성과 달리 복교성은 끝없이 펼쳐진 산맥 위에 위치했다.

성벽 절반이 산맥과 연결되어 있었고 성 안에도 크고 작은 산봉우리가 천여 개는 되는 듯했다. 성 안 산봉우리에는 건물이 가득했고, 봉우리를 따라 타원형의 길이 나있어 독특한 풍경을 자랑했다.

그러나 복교성도 전쟁의 영향을 받아 긴장된 분위기가 느껴졌다. 강력한 금제의 파동이 전해지는 것은 물론 열댓 명 혹은 백여 명으로 이루어진 순찰대가 수시로 주위를 날아다녔다.

한립이 탄 거대 비차는 천운 표식이 분명하게 새겨져 있었음에도 몇몇 병사들이 에워싸고 검사를 하곤 했다. 물론 새까만 거한이 신분을 증명하는 영패를 보이면 공손히 물러났지만!

이렇게 비차는 별 탈 없이 성문 밖에 내려섰다.

“병 선배님 오셨습니까! 이분들은 광한계에서 복귀한 수사들이시죠. 운성의 장로들께서 수사들이 오시는 대로 성운각(星云閣)으로 모시라 명을 내리셨습니다.”

성문 밖에서 검문을 맡은 연허기 병사가 새까만 거한을 알아보고 공손히 인사했다.

“알겠네! 어서들 성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저는 일이 있어 운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새까만 거한이 곧바로 전언을 받아들이고, 월 선자와 중년인 등에게 말했다. 수사들이 내리자 그는 지체 없이 휘파람을 불어 비차를 돌려 운성으로 다시 날아갔다.

성 안으로 들어가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복교성은 운성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거대성이었고 운성에서 퇴각한 각 종족들이 모여들어 있을 테니 복작거리는 것도 당연했다.

그들은 두 대의 영수 마차를 불러 성운각으로 가자고 했고, 두 대의 영수 마차는 어느 산봉우리를 향해 내달렸다.

마차에 올라 창문을 내려다보던 한립이 돌연 누군가를 보고 표정이 달라졌다. 회색 장포를 입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병환이 깊은 얼굴로 재료 상점 입구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는 옅은 보랏빛 얼굴에 노란 장포를 걸친 인상이 험악한 사내였다. 한립이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마차를 멈추어 주십시오. 저는 따로 처리할 일이 있으니 먼저 성운각에 가 계시면 곧 따라가도록 하지요.”

같이 마차를 타고 있던 이들은 어리둥절했으나 말릴 명분이 없었다. 마부가 마차를 세우자 한립은 홀로 내려 어딘가로 걸어갔다. 문가의 두 사람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지 조금씩 목소리가 커졌다.

“아무튼 사흘 내로 영석을 갚지 못하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황 수사, 노부의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왜 이러십니까. 사흘 내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영석을 모은단 말입니까?”

사내의 협박에 병색이 완연한 노인이 난색을 표하며 사정했다.

“사정이 어찌 됐든 내 알바 아니니 제 때에 영석이나 갚으란 말입니다. 안 그랬다간 어찌 되든 내 탓하지 마시오.”

“그것이…….”

보랏빛 사내의 냉정한 언사에 노인은 무어라 하려다 상대가 의아한 얼굴로 어딘가를 바라보는 것을 발견했다. 이어 뒤에서 차분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향 사형의 빚이 얼만가? 내가 대신 갚지.”

노인은 지척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움찔했다. 누군가 이렇게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눈치채지 못한 것에 놀란 것이다. 그는 황급히 몸을 돌려 푸른 장포를 입은 젊은 청년을 바라보았다.

“한 사제!”

그를 알아본 노인이 반갑게 소리쳤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향 사형.”

“사제도 복교성에 와 있었구만. 내 떠나기 전 사제를 찾아갔지만 행방을 알 수 없어 걱정하였네.”

“제 행적을 찾기 어려웠을 텐데 괜한 수고를 하셨습니다. 그건 그렇고, 향 사형이 자네에게 빚진 영석이 얼마나 되는가?”

한립은 향지례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고 보랏빛 사내를 향해 다시 물었다. 상대는 향지례와 엇비슷한 경지의 결단기 수사였다.

사내는 한립이 의식으로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심오한 수행을 지니고 있자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보랏빛 얼굴 사내가 허리를 깊이 숙이며 속사포처럼 읊조렸다.

“아, 아닙니다. 향 수사가 선배님과 이렇게 친분이 깊은 줄 모르고 제가 결례를 범했습니다. 그깟 영석이 무엇이라고 굳이 받겠습니까. 제 성의라고 생각하시고 그냥 없는 셈 치셔도 됩니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성의를 받아 챙기는 사람으로 보이는가? 됐으니 얼마인지 말하게.”

한립이 정색하며 차갑게 말했다.

“많지는 않습니다. 액수가 그러니까…….”

보랏빛 사내가 가슴이 철렁해 서둘러 액수를 말했다. 한립에게는 언급할 가치도 없는 적은 액수였다. 한립은 작은 보따리를 건네주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가보게.”

보랏빛 사내는 보따리를 받자마자 허리를 숙이고 쏜살같이 자리를 떠났다.

“이렇게 못난 모습을 보여 부끄럽게 되었군. 괜히 사제의 영석만 축내었어.”

그제야 향지례가 쓴웃음을 지으며 한립을 향해 포권을 했다.

“영석은 별 것 아닙니다. 다만 이곳에서 다시 향 형을 만난 것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일전에 풍원대륙으로 돌아가게 되면 다시 찾아와 달라 말씀하셨는데 무슨 일인지 지금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한립이 손을 저어 주위에 회색 보호막을 쳤다. 원자신광을 이용한 임시 금제로 다른 이들이 엿듣는 것을 차단한 것이다. 향지례는 회색 보호막이 무슨 신통인지는 몰랐지만 대충 눈치채고 격동해 물었다.

“그 말은 풍원대륙으로 돌아간다는 뜻인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간 천운이들을 위해 몇 가지 일을 해주고 초대형 전송진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뇌명대륙을 떠나게 될 듯 싶습니다.”

“너무 잘 되었네! 허나 사제에게 전해줄 물건을 지금 지니고 있지 않다네. 그러지 말고 3일 후에 성 밖 청교봉(靑蛟峰)에서 기다려 줄 수 있겠나? 그 때 만나 이야기를 마저 하겠네.”

향지례는 자기 일처럼 무척 기뻐했다.

“청교봉이요? 알겠습니다, 사형의 뜻대로 하지요.”

“그럼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하세. 그런데 사제의 수행이 또 크게 늘었구만! 정확한 경지는 모르겠지만 기운이 달라졌어.”

“깨달음을 얻어 약간의 진전이 있었습니다.”

그는 잠시 향지례와 한담을 나누다 원자신광을 거두고 영수 마차 한 대를 잡아타고 그곳을 떠났다. 향지례는 멀리 사라지는 마차를 보며 입가를 씰룩였다. 뜻밖에도 괴이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복교성은 거대했지만 운성에 비하면 규모가 작은 편이었다. 마차에 앉은 한립은 겨우 반 시진 만에 어느 산봉우리 아래에 도착했다. 누각과 전당 등이 연이어 세워져 산봉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마부가 알려준 대로 산길을 따라 올라가던 한립은 중턱에 이르러 병사들을 마주쳤다. 병사들은 조금 전 지나간 류수아 등과 일행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바로 통과시켜주었다.

잠시 후, 한립은 산정상의 거대한 누각 앞에 도착했다. 커다란 금색 현판에 ‘성운각(星云閣)’이라는 은색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고, 대문 양쪽으로 은색 의복을 입고 등에 장검을 멘 여덟 명의 수사들이 보였다.

그러나 한립을 놀라게 한 것은 노란 장포를 입은 포동포동한 노인네였다. 그를 보고 웃으며 다가오는 노인은 만고족 천기자였다.

“천기자 선배님을 뵙습니다.”

“허허, 그리 예의 차릴 것 없네. 한 수사, 이미 9계에 이른 것인가!”

천기자는 의식으로 한립을 훑고는 안색이 미미하게 달라졌다.

“광한계에서 작지만 기연을 얻어 그렇게 되었습니다.”

한립은 속으로 탄식하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답했다. 그는 비술을 이용해 연허기 최정상에 오른 것을 가려 동급 수사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월 선자와 응 중년인도 막 합체기 수사가 되어 경지가 안정되지 못했고, 의식의 힘도 한립에 못 미쳐 알아보지 못했다. 그런데 합체 후기 수사인 천기자는 단번에 알아 본 것이다.

“한 번에 두 경지를 넘어서다니 대단한 기연이구만! 허허, 노부가 특별히 이곳에서 한 수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자네를 보고 싶어 하는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네. 그곳으로 함께 가보세.”

천기자가 놀란 기색을 지우고 미소를 떠올렸다.

“다른 두 분이요?”

“한 수사가 잘 아는 이들이니 걱정할 것 없네.”

“선배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옳지, 어서 가보세!”

노인은 바로 몸을 돌려 누각으로 걸어갔고 한립도 그 뒤를 따랐다. 만고족 장로가 앞장서니 은색 의복을 입은 시위대들도 막지 않았다.

1층 대청은 작은 전송진 몇 개를 제외하면 텅 비어 있었다. 천기자는 한립을 데리고 그 중 하나로 들어갔다. 눈앞에 빛이 번지고 또 다른 대청 안으로 이동했다.

대청 한가운데에는 그가 밟고 선 전송진이 펼쳐져 있었고, 주위에는 탁자와 의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네 명의 수사들이 앉아 있었다.

사내 둘과 여인 둘 모두 한립이 아는 이들이었다. 채류앵과 단천인, 그들의 제자인 석곤과 류수아였다.

“단 선배님과 채 선배님이셨군요. 인사 올리겠습니다.”

한립은 두 성계 수사를 향해 예를 올렸다.

“하하, 인사는 되었네! 이번에 나와 채 수사가 자네 덕에 원하던 물건을 구할 수 있었다지?”

단천인이 웃음을 터트린 후 한립을 보는 눈빛에 이채가 어렸다. 만고족 천기자와 마찬가지로 그의 수행이 달라진 것을 눈치챈 것이다. 곁의 채류앵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놀란 기색이었다.

“약조한 대로 이행했을 뿐입니다.”

한립이 미소를 띠우고 겸손하게 답했다. 이상하게도 천기자가 당연하다는 얼굴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한 수사와 신통이 예상보다 뛰어난 덕에 광한계에서 순조롭게 일을 처리했다고 들었네. 이제 수행까지 크게 진보했으니 아마 성족 초계 존재와 맞먹는 실력을 지녔겠지. 우리와 동등하게 교류해도 될 정도로 말이야.”

채류앵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에 한립이 슬쩍 천기자와 단천인의 기색을 살폈으나 아무도 표정변화가 없었다. 이에 한립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 굳이 부정하지 않고 반문했다.

“세 분이 저를 보자고 하신 데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대륙 간 전송진을 이용하는 것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요?”

“노부와 몇몇 장로들이 공동을 수락한 일을 이제와 어찌 뒤집겠는가. 게다가 비 선배님께서 친히 분부를 내려주셨네. 그러니 더더욱 차질이 생겨서는 안 되겠지.”

천기자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럼 어째서 저를…….”

언뜻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기에 한립은 평온하게 물었다.

“제자에게 들으니 수사가 유적 내부 약재 밭 금제를 파훼하고 그곳의 영초들을 죄다 챙겼다고 들었네. 그곳에서 자라던 선계의 영초들은 영계에서 멸종되거나 보기 드문 것들이 대부분일 테지. 우리 같은 성족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야. 자네가 아무리 실력이 대단해도 아직 제대로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니 거래를 통해 서로 이득을 꾀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채류앵이 웃으며 제안했다.

“선배님께서 원하시는 거래란 무엇입니까?”

그의 태연한 모습에 천기자 등 합체기 수사들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시선을 교환하고 천기자가 나서서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했다.

“우리의 신분에 수사가 손해 볼 거래를 제안하지는 않을 걸세. 우리에게는 성계 고비를 넘겨줄 단약과 재료 그리고 보물들이 있다네. 이것들로 영초를 거래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아무리 선계의 영초들이 진귀해도 성족이 될 기회보다 귀할 수야 없겠지.”

‘성계 고비를 대비한 단약!’

그 말에 한립은 확실히 구미가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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