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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030화 (787/2,000)

1030화. 격전

*

한립은 십자로(十字路)에 도착했다. 마지막 동굴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을 둘러보다 그가 돌연 백여 개가 넘는 진법깃발들을 뿜어냈다. 그것은 그가 지닌 진법법기 중 가장 강력한 것으로 연허기 수사도 한동안 가둬둘 수 있었다.

그리고 구궁천건부를 방출해 거대한 궁궐 환영을 진법 위에 펼쳐두었다. 구궁천건부를 제련하기 위한 재료가 희소했지만 운성에 있을 때 그럭저럭 모을 수 있어 두 장을 만들어 왔다.

이렇게 하면 바깥의 융족인들이 낌새를 채고 몰려들어도 두 가지 금제에 잠시 시간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진법이 모두 설치되자 그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삼두육비 금신을 불러냈다.

그의 입에서 검은 기운이 나와 금신 속으로 흡수되었다.

“가라.”

금신의 얼굴 중 하나가 매섭게 눈을 번뜩이고 귀신처럼 허공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이어 한립의 손에 은색 화염과 은색 부적 두 장이 나타났다.

화륵.

화염이 은색 불새로 변하고 부적들이 은색 그림자로 바뀌어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마지막으로 한 손으로 수결을 맺자 하얀 여인이 나타나 종적을 감추었다.

그는 빠져나갈 구멍을 여러 곳에 마련해두고 태일화청부를 발동해 날아갔다. 연달아 모퉁이를 돌자 드디어 우윳빛 석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멈추지 않고 동굴 입구로 다가가 안을 살폈다. 동굴 안은 기이할 정도로 넓어 광장 같았다. 그 중간에는 은색의 반원형 보호막이 펼쳐져 있어 멀리서보면 거대한 사발을 엎어 놓은 듯했다.

그리고 그 보호막 안에 금전문 석벽이 들어 있었다. 광장 네 모서리에는 융족인이 한명씩 가부좌를 틀고 있었는데 누군가는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 있었고, 몇몇은 눈을 크게 뜨고 은색 보호막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립은 그들을 살피다 두 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눈을 감고 있는 거한을 보고 흠칫 놀랐다. 얼굴에 흐릿한 보랏빛이 도는 거한은 등 뒤로 정체모를 거대 칼날을 메고 있었다.

칼날은 그것을 메고 있는 거한보다 더 컸다. 하지만 한립의 시선을 끈 것은 융족인 거한을 둘러싼 흐릿한 핏빛이었다. 핏빛은 아주 진한 살기(煞氣)를 띠고 있었다.

나머지 융족인들은 녹색 가죽 갑옷을 입은 청년과 회백색 수염의 노옹과 노파였다. 이들은 몸에 기다란 털이 난 것을 제외하면 다른 융족인들과 달리 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립은 서늘한 눈빛으로 거한을 응시했다. 그가 느끼기에 다른 셋보다 거한이 강력했고 그를 죽인 다음에 나머지를 처리하는 것이 훨씬 수월할 거란 판단이 들었다.

허상화 된 그의 몸이 점점 융족인 거한에게 다가갔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거한은 아직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한립이 가까이 다가가 법력을 끌어올리자 이변이 일어났다.

웅!

거한 등 뒤의 거대 칼날이 몸을 떨고 울어댄 것이다.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고요하던 동굴 안이 웅! 하고 울렸고, 다른 융족인들도 재빨리 고개를 돌려 거한이 있는 방향을 노려보았다.

거한 역시 눈을 번쩍 뜨고는 전광석화처럼 손을 뻗었다. 그러자 거대 칼날이 그의 손에 나타나 검은 돌풍으로 변하고는 전방으로 휘몰아쳤다.

검은 바람 속에서 쿠르릉 소리가 크게 울리고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지닌 괴수를 품은 것처럼 매섭게 날아들었다.

‘이런…….’

한립은 속으로 혀를 찼다. 하필 운 나쁘게도 적이 다가오면 알려주는 보물을 건드린 것이다. 거대 칼날은 혼돈만령방에 이름을 올린 보물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금빛을 반짝이며 모습을 드러내 은색 자를 손에 들고 흔들었다. 무수히 많은 은색 그림자들이 튀어나가 거대한 은색 그림자로 뭉쳐져 검은 바람을 갈랐다.

쾅!

은빛 그림자와 검은 바람이 충돌해 사방으로 충격이 퍼져나갔다. 은색 자와 거대 칼날이 놀랍게도 대치 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둘 사이에 주술문자가 깜빡거렸고 놀라운 영기의 압력에 주변 공간이 흔들렸다.

한립은 다른 손에서 검은 산을 방출했다. 다음 순간 거한의 머리 위로 공간 파동이 일고 사람만 한 검은 산봉우리가 떨어져 내렸다.

“엇!”

융족 거한이 놀라 순식간에 표정을 수습하고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한 손으로 수결을 맺은 그의 몸에 농염한 핏빛 살기가 떠올라 핏빛 거대 손을 만들어냈다.

핏빛 거대 손과 검은 산봉우리가 맞부딪쳐 둔중한 폭음이 터졌다. 거대 손은 묵직한 무게에 금방이라도 눌려버릴 것만 같았다. 원자극산의 중량을 얕본 탓이었다.

거한의 안색이 달라지며 몸을 바르게 세우고 위쪽으로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다. 핏빛 빛기둥이 분출되어 거대 손으로 흡수되었고, 핏빛 수정의 거대 손은 몇 배로 커졌다. 그리고 손끝에서 핏빛 연꽃들이 피어났다.

다섯 개의 연꽃은 빙글빙글 돌며 수없이 많은 주술 문자를 토해냈고 거대 손을 도와 검은 산봉우리를 들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한립은 수정 날개를 펼쳤다. 작은 천둥소리를 남기고 그가 사라지자 융족인 거한도 눈을 가늘게 뜨고 입에서 금빛을 분출했다.

펑!

폭음이 들리고 한립이 비틀거리며 허공에서 튀어나왔다. 새하얀 손에 오색 한염을 두르고 등 뒤에는 날개가 돋은 금색 뱀의 목을 틀어쥔 채였다.

오색 한염 속의 뱀은 혀를 날름거리며 요동쳤다. 그러나 한립은 달아나려는 뱀을 향해 코웃음을 치며 오색 한염을 더욱 키웠다. 이에 금색 뱀이 겁에 질려 버둥거렸지만 결국 온몸이 꽁꽁 얼어 오색 얼음 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콰릉!

한립은 주저 없이 손바닥에서 금빛 뇌전을 일으켜 얼음 덩어리를 가루로 만들었다. 그 모습에 융족 거한은 단단히 열이 받았다.

오랜 세월 공들여 키운 영수 파허사(破虛蛇)는 허공을 뚫는 강력한 신통과 단단한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한립의 괴이한 둔술을 깨려고 방출하자마자 죽임을 당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에 융족 거한이 분노해 씩씩거리더니 불교 의식에 쓰이는 둥근 놋쇠 타악기인 자바라 보물을 꺼내들었다.

표면에 아름다운 주술문자가 새겨진 자바라는 모서리가 굉장히 날카롭고 희미하게 핏빛을 머금고 있었다.

휙!

바람 소리와 함께 날아간 자바라는 거대한 핏빛 칼날로 변해 한립을 노렸다.

한립은 빠르게 수결을 맺어 검은 갑옷을 걸쳤다. 이에 핏빛은 한립에게 닿지 못하고 갑옷이 내뿜는 검은 주술문자에 막혀버렸다. 그 틈에 한립은 날개를 펄럭여 청백색 뇌전을 남기고 사라졌다.

융족인 거한은 주변의 핏빛 살기를 응결해 거대한 연꽃을 만들어 몸을 보호했다. 방어를 하며 다른 일행들을 슬쩍 바라보았다가 거한의 얼굴이 굳었다.

녹색 갑옷을 입은 청년과 노옹과 노파가 불시에 나타난 하얀 그림자와 두 개의 은색 그림자에게 붙들려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지금은 융족인들이 우위를 점하고는 있었지만 당장 상대를 죽이고 도움을 주러 올만큼 여유가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하얀 그림자와 두 개의 은색 그림자는 한립이 미리 숨겨둔 통령괴뢰와 그림자 꼭두각시들이었다.

한립의 수행이 높아지자 그림자 꼭두각시들의 실력도 강해져 충분히 연허 후기 수사를 상대할 수 있었다. 이전의 그림자 꼭두각시들이었으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노옹과 노파에게 박살났을 것이다.

통령괴뢰인 와와는 한 손에는 부채를 들고 푸른빛을 방출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한기(寒氣)를 뭉쳐 하얀 실로 쏘아 보내 청년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나 거한이 어찌된 영문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머리 위에서 검은 산봉우리가 나타났다. 산봉우리는 회색빛을 방출하며 동산만 해졌고 은빛 주술문자를 반짝였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아래쪽 핏빛 거대 손이 깨졌다.

융족 거한이 기겁해 작은 은색 도끼를 불러내 휘둘렀다. 처음에는 손바닥만 했던 도끼가 거대하게 변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한립은 이미 법결을 발동해 원자극산과 함께 모호하게 변해 종적을 감췄다. 이에 거대한 도끼는 허공을 갈랐고, 다음 순간 한립과 검은 산이 융족 거한을 내리쳤다.

거대한 산봉우리가 순식간에 이동하자 융족 거한은 대경실색했다. 순간 주변의 핏빛 연꽃들이 꽃잎을 떨구고 층층이 뭉쳐져 총 일곱 겹의 핏빛 보호막을 이루었다.

그리고 핏빛 살기는 거대 호랑이로 변해 떨어져 내리는 거산을 향해 발톱을 휘둘렀다.

콰르릉!

검은 산에 닿자마자 거대 호랑이는 힘없이 부서졌고, 거산은 곧장 핏빛 보호막으로 향했다.

퍼퍼퍼펑!

육중하게 내려치는 검은 거산에 폭음이 잇달아 울렸다. 다섯 겹의 핏빛 보호막이 깨지고 여섯 번째 보호막이 빛을 번뜩이며 겨우 버텨냈다.

융족 거한은 입술을 끌어올리고 허공을 향해 거대 도끼를 내리쳤다. 은색 거대 도끼가 굵직한 뇌전이 되어 내리친 것은 검은 거산 위의 한립이었다.

그러나 한립은 피하지 않았다. 그의 주변에서 치직 소리가 들리고 은색 화염 구슬이 나타나 거대 도끼가 변한 뇌전에 내리꽂혔다.

쿵!

원형을 드러낸 거대 도끼는 순식간에 은색 화염에 삼켜졌다. 놀란 거한이 재빨리 거둬들이려 했으나 한립의 등 뒤에서 삼두육비의 금신이 나타나 금빛을 일으켰다.

금신이 여섯 개의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합장을 하자 금빛이 하나로 뭉쳐져 금빛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동시에 금신의 두 머리가 눈을 감고 각각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소용돌이 속에서 천둥소리가 들리고 희미하게 불경 읊는 소리가 퍼져나갔다. 금색 소용돌이를 감지한 융족 거한은 곧바로 소매 속에서 수천 개의 핏빛 수정실을 내뿜어 뒤쪽의 금신을 휘감으려 했다.

핏빛이 크게 번지고 기세 또한 대단했다. 그러나 핏빛 수정실들은 금신에 닿자마자 가닥가닥 끊어져 없어져 버렸다. 그때 금색 소용돌이가 무형의 흡인력을 만들어 지척의 융족 거한을 끌어당겼다.

“윽!”

거한은 주변 공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불길한 직감에 그는 의식으로 은색 자와 겨루고 있는 거대 칼날을 불러들이려 했다.

그러나 은색 자 그림자가 하늘을 뒤덮은 꽃송이들처럼 피어나 거대 칼날을 마구 공격하기 시작했다. 검은 거대 칼날이 아무리 위력이 대단해도 폭풍처럼 몰아치는 공격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강력한 흡인력이 융족 거한의 등 뒤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났고 그는 쉭! 하고 빨려 들어갔다.

참혹한 비명과 커다란 폭음이 함께 터져 나왔다. 금색 소용돌이가 바르르 몸을 떨고 난 후에는 융족 거한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금신이 주문 외우기를 멈추고 한 손가락을 뻗어 금색 소용돌이를 가리켰다. 소용돌이는 빠르게 수축하며 마지막에는 사라져버렸다.

주인을 잃어버린 거대 칼날은 애달피 울며 검은 교룡으로 변해 미친 듯이 기운을 토해냈다. 놀랍게도 촘촘하게 둘러싼 은색 자 그림자의 환영을 뚫고 날아올랐다.

이에 한립은 날개를 펄럭여 거대 칼날 위에 나타났다. 그리고 입을 벌려 푸른 솥을 방출했다.

댕!

솥뚜껑이 열리고 셀 수없이 많은 푸른 실들이 튀어나와 순식간에 검은 교룡을 구속했다. 교룡을 묶은 푸른 실들이 팽팽하게 당겨졌고 푸른빛 속에 거대 칼날이 원래 모습을 드러냈다.

한립은 수결을 맺어 푸른 실과 함께 칼날을 솥 안에 가두었고, 작은 솥은 빙글 돌아 그의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한립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은색 거대 도끼는 서령천화가 변한 은색 화염 속에서 녹아내려 거의 사라지기 일보직전이었고, 나머지 융족인들은 거한이 당하자 황급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거한을 죽였으니 자신들이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란 걸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한립이 도망가려는 융족인들을 그냥 놔둘 리 없었다.

한립은 서늘한 눈빛으로 날개를 펄럭여 청백색 실로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삼두육비의 금신이 펄쩍 뛰어올라 괴이하게 종적을 감추었고, 그림자 괴뢰와 통령괴뢰 와와 역시 급히 그들을 쫓았다.

잠시 후 동굴 밖에서 녹색 갑옷을 입은 청년의 절규 소리가 들려왔고 폭음이 울리고 노호성이 터진 후에는 노옹과 노파의 처절한 비명도 연달아 울려 퍼졌다.

비밀통로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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