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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029화 (786/2,000)
  • 1029화. 비밀동굴 속 융족인들

    *

    이름 모를 대협곡 상공에 평범해 보이는 구름이 둥실 떠 있었다. 구름 속에 온몸에 털이 난 융족인들이 숨어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상의하고 있었다.

    “훤 형, 폭렬족들이 떠난 지 하루가 넘었습니다.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이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겠지요?”

    이마에 푸른 반점이 있는 융족인이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생길 일이 뭐가 있습니까? 달아난 천운인은 겨우 두 명에 원기도 크게 상했는데요. 폭렬족이 네 명이나 쫓고 있으니 잘 처리할 겁니다. 아마 달아난 자들이 특수한 비술을 사용해 잡는 데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지요.”

    새빨간 갑옷을 입은 또 다른 융족인이 대수롭게 않게 답했다.

    “괴이한 비술에 정통한 자들 같기는 하더군요. 그렇지 않았으면 달아나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그나저나 금전문의 마지막 구결이 광한령이 필요한 금제 속에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이들이 올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리게 생겼지 뭡니까. 광한령 두 개로 충분할지도 모르겠고요. 세 개 혹은 그 이상이 필요하다면 더 걸리거나 불완전한 공법을 갖고 돌아가야 할 겁니다.”

    “다른 곳보다 마지막 구결이 공법에서 가장 중요한 게 분명합니다. 아무리 선계 공법이 현묘해도 가장 중요한 구결을 빼놓고 어찌 수련하겠습니까. 우리 중에 금전문을 아는 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나머지 내용을 연구해보면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는데요.”

    푸른 반점 융족인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고 금전문으로 적힌 공법을 두고 그냥 갈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무리들이 오는데도 나흘은 걸릴 것이니 더 많은 광한령이 필요하다면 모으는 데 몇 개월이 걸릴 수도 있겠어요. 그럼 일을 마치고도 수련의 고비를 넘길 시간이 사라질 겁니다.”

    붉은 갑옷의 융족인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허나 금전문 법결이 듣던 대로 큰 쓸모가 있다면 본 족의 세력을 키울 수 있을 겁니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쉽게 포기할 수는 없지요.”

    “그 말도 맞지만 성계에 올라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밤에 잠이나 오겠습니까?”

    “이제와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저 소식을 들은 다른 무리들이 얼른 광한령을 가져다주기만을 바라야지요. 그런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합니다. 줄곧 광한령은 광한계로 진입하기 위한 열쇠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곳의 몇몇 금제를 깨는 데 쓰일 줄이야……. 돌아가는 대로 이 일을 알려 다음 광한계 개방을 대비해야겠습니다.”

    이렇게 두 융족인들은 구름 속에 숨어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신기한 것은 그들의 말소리가 구름 밖으로는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현묘한 금제가 만들어낸 구름 속에서 경계를 서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희미한 그림자가 하얀 구름 위를 지나고 있다는 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그 희미한 그림자는 반나절을 날아 겨우 도착한 한립이었다. 그는 명청령안을 발동해 구름 속의 이족인들을 발견했고 멀리서 태일화청부를 사용해 천천히 이동했다.

    그는 강대한 의식을 지니고 있어 두 융족인의 낮은 대회소리가 금제를 뚫고 똑똑히 들려왔다.

    융족인들이 아직 금전문 법결을 완전히 손에 넣지 못했다는 사실에 안심했지만 곧 비밀동굴의 금제를 깨는데 광한령이 필요하다는 소리에 안색이 살짝 달라졌다.

    그러나 곧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한립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이족인들은 그가 지척에 이르렀음에도 눈치 채지 못했다.

    이에 간단히 처리할 수도 있었지만 혹시 융족인 무리가 본명패를 지니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머뭇거렸다.

    ‘괜히 동굴 속 융족인들이 눈치채면 성가시겠지.’

    그는 금전문 공법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조용히 움직일 생각이었다. 한립은 조용히 협곡으로 내려가 남색빛이 일렁이는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순간 그의 표정이 달라지며 석벽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암석은 누런색에 갈라진 틈이 있었지만 무척 평범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갈라진 모양이 북두칠성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한립은 희색을 드러내며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팟!

    암석 표면이 은은하게 빛나고 그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안으로 스며들었다. 한립은 눈앞이 밝아지는 느낌을 받으며 넓은 통로 속에서 나타났다.

    사각형의 통로에는 벽마다 수정돌이 박혀 있어 굉장히 밝았고 전방에 보이는 반달 모양의 푸른 나무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거대한 나무문이 너덜너덜해진 것이 누군가 강제로 뜯고 들어간 모양이었다. 한립은 가만히 문을 살펴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나무문 가장자리에 금색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군데군데 떨어져 나가 거의 보이지도 않았지만 금전문이었다. 그리고 거대 문 양쪽에는 융족인 두 명이 서있었다. 둘 다 털이 나있었는데 한쪽은 새하얗고 다른 한쪽은 까만색을 띠고 있어 굉장히 눈에 띄었다.

    한립은 흑백 융족인들 사이에 벌어진 문틈을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연허 초기때보다 수행도 늘고 태일화청부 역시 믿었지만 그래도 동급 수사 곁을 몰래 지나가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숨죽인 채 조심스레 거대 문으로 다가갔다. 여기서 주춤거리기보다는 둘을 제거하고서라도 서둘러 움직이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융족인들에게 한곳에 모여 있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있으면 각개 격파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융족인들이 궁지에 몰리면 금전문을 훼손해 버리고 달아날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금전문 몇 자만 획득하지 못해도 연신술을 익히지 못할 수도 있었다. 물론 법력과 의식을 아낌없이 사용하고 현천잔보와 서금충을 이용해 융족인들을 순식간에 척살하는 방법도 있었다.

    한립은 이해득실을 따져보며 흑백 융족인들 사이를 지나쳤다. 이때 온몸이 새까만 털로 뒤덮인 융족인이 눈꺼풀을 꿈틀하고 사방을 주시했다.

    놀란 한립은 즉시 제자리에서 멈추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백모(白毛) 융족인이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흑모(黑毛) 융족인은 대답 없이 의식을 방출해 한립이 멈춰있는 곳을 포함해 통로 전체를 훑었다.

    “아닙니다. 그냥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요. 아마 착각이었나 봅니다. 요즘 수련을 할 때마다 마음이 불안한데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랬군요. 노부도 광한계에 들어온 후 비슷한 증상을 겪고 있습니다. 요 며칠 너무 신경을 곤두세우기도 했고요.”

    “그것뿐이라면 다행이고요.”

    흑모 융족인이 골똘히 생각하다 은색 실들을 방출해 전방 통로를 꽉 채웠다. 한립은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은실이 그의 몸을 통과해 지면에 박혀 원형을 드러냈다.

    서늘한 빛을 반짝이는 것은 은침이었다.

    “정말 괜한 걱정이었나 봅니다.”

    흑모 융족인이 은침이 날아가 박히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허허, 이제 마음 놓고 다시 수련이나 합시다.”

    백모 융족인이 미소를 머금고 눈을 감았고 흑모 융족인도 고개를 끄덕이고 수련에 들어갔다. 한립은 슬쩍 몸을 움직여 그 둘 사이를 완전히 지나쳤다. 이번에는 아무 일도 없이 푸른 거대 문을 지나올 수 있었다.

    운 좋게도 흑모 융족인이 실체가 있는 은침으로 공격해 허상화 된 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법술로 공격했다면 간단한 불덩이라도 금방 들키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통로 모퉁이를 돌아 소리 없이 종적을 감추었다.

    비밀동굴의 크고 작은 통로는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대부분이 자연적으로 형성된 지하 동굴이었다. 다행히 서씨 노인이 건네준 동굴 지도가 있어 방황할 필요 없이 동굴 앞에 도착했다.

    ‘저건!’

    널찍한 동굴 안에는 하얀 석벽이 세워져 있었고 금색 문자가 한 줄씩 나열되어 신비한 빛을 반짝였다. 한립은 가슴이 뛰었지만 곧 석벽 앞에 삿갓을 푹 눌러쓰고 앉아 있는 융족인을 발견했다. 그의 표정을 봐서는 석벽의 문자를 연구하는 것 같았다.

    한립 역시 석벽의 문자를 원했다. 그러나 석벽 위 구결을 복제하려면 저 융족인에게 들키지 않을 수 없었다. 한립은 조용히 동굴 입구에 서서 고민하다 결정을 내렸다.

    그는 표표히 몸을 달려 융족인에게 다가갔다. 융족인은 석벽의 문자를 연구하느라 정신이 팔려 고개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지!’

    기쁜 마음에 한립은 과감히 공격에 들어갔다. 그는 회색 기운에 쌓인 작은 산을 쏘아 보내고 등 뒤로 삼두육비 금신을 불러냈다. 금신의 여섯 개의 팔이 모호하게 움직여 지척의 융족인을 가리켰다.

    이상을 감지한 융족인이 그제야 무언가 비술을 펼치려 했지만 여섯 개의 금색 거대 손이 나타나 그를 억눌렀다. 융족인은 주변 공기가 꽁꽁 얼어붙은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했고 몸속의 법력마저 응결되었다.

    검은 산이 그의 머리 위에서 빙글 돌아 회색 기운을 날렸고, 무수히 많은 은색 주술문자들이 앞 다퉈 검은 산 아래로 흘러내려 갔다.

    휘이익!

    삿갓 융족인은 겁이 났으나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뜻밖에도 자신의 안위를 뒤로하고 다른 동료들에게 침입자가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그러나 휘파람 소리는 사방에 흩어진 회색 기운에 막혀 벗어나지 못했고 융족인이 다른 대책을 강구하기 전 여섯 개의 금색 거대 손에서 금실들이 분출되었다.

    금실들이 삿갓 융족인을 꽁꽁 묶자 원자극산이 흘려보낸 은색 주술문자들이 각각 은색 진법으로 변해 들이닥쳤다.

    펑.

    빛의 진법이 소실되고 융족인의 모습도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한립은 순식간에 원자극산으로 융족인을 빨아들였고 금신의 공격이나 원자극산의 방출도 소리 없이 이루어졌다.

    금실로 꽁꽁 묶인 융족인은 의식을 잃고 그 안에 갇혀 있었고 원영도 몸에 잔뜩 들러붙은 은색 주술문자 때문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상대가 죽지 않았으니 한동안 다른 융족인들이 눈치채기 어려울 것이다.

    다행히 삿갓 융족인은 혼자였고 석벽의 금전문을 연구하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두세 명이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면 이렇게 조용히 처리하기는 어려웠다.

    원자극산으로 사람을 빨아들이는 신통은 새로 제련한 원자극산에 생긴 공간 신통이었다. 원합오극산을 제련하는 데 성공하면 심지어 강과 바다를 통째로 빨아들일 수도 있다고 적혀 있었다.

    파앗.

    한립은 금신과 검은 산을 회수하고 저물탁을 날려 그 안에서 푸른빛을 방출했다. 영기의 빛 속에서도 석벽 위 금색 문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역시.’

    한립은 내심 안도했다. 금전문을 이렇게 쉽게 취할 수 있었으면 아직까지 남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저물탁 속에서 하얀 옥간이 날아올라 석벽으로 향했다. 그가 법결을 날리자 옥간에서 은색 영기의 빛이 퍼져 석벽표면을 감쌌다.

    석벽 위 금색 주술문자들이 꿈틀거리고 은빛이 살아 있는 것처럼 그 위를 돌아다니다 옥간 속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 은빛을 거둔 한립은 옥간을 들고 의식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금색 주술문자가 똑같이 복제되어 있었다. 그는 옥간에 보라색 부적을 붙이고 허상화 된 몸으로 다시 출발했다.

    그는 비밀동굴을 돌아다니며 세 곳의 동굴 안에서 금전문이 적힌 석벽을 발견했다. 그중 한 곳만 누군가 지키고 있었고 나머지 두 곳은 텅 비어있었다.

    한립은 석벽 앞을 지키는 또 다른 융족인 한 명을 원자극산으로 기습해 빨아들이고 세 곳의 금전문을 복제했다.

    서씨 노인의 지도에 따르면 한 곳만 더 찾아 복제하면 연신술 구결을 모두 모을 수 있었다. 마지막 목표를 앞둔 그는 더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아직까지 만나지 못한 융족인들은 모두 마지막 장소에 모여 있을 가능성이 컸다.

    마지막 금전문을 지키고 있는 이들은 금제가 깨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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