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7화. 동선금광(洞漩金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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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이 슬쩍 살피니 저 멀리 고공에서 여인과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은 약간 눈에 익은 정도였지만 여인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운성에서 출발할 때 다른 무리를 이끌고 광한계로 진입한 월 선자였다.
여인은 여전히 얼음장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뜻밖이라는 눈빛을 보냈다. 노인은 한립을 보고 크게 한시름을 놓았다. 그가 있으면 융족을 물리칠 수는 없어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한립은 다른 무리를 이끌고 광한계에 들어온 수사였으니 수수방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립도 뜻밖이었지만 두 사람을 향해 살짝 고개를 까닥하고는 네 명의 이족인에게 자 그림자를 쏘아 보냈다.
이에 전차 속 융족인 수사 두 명이 빠르게 공격을 개시했다. 한 명은 검은 깃발을 꺼내 펄럭여 검은 밧줄을 쏘아 보냈고, 다른 한 명은 입에서 청록색 거울을 분출해 녹색 화염 덩이들을 분사했다.
그리고 나머지 둘은 한립을 싸늘하게 쳐다볼 뿐 나서지 않았다. 두 명만으로도 충분할 거라 믿는 눈치였다.
한립은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혼원척을 든 손에서 푸른빛을 일으켰다. 정순한 영력이 미친 듯이 보물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이에 모호하던 자 그림자들이 영기의 빛을 번득였고 표면에는 은색 뇌전이 일었다.
콰르릉!
수많은 은색 자들이 검은 밧줄과 녹색 화염 속을 헤집고 다니며 융족인들의 공격을 멸했다.
“저런!”
은색 자의 공격에 전차 위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융족인 한 명이 눈살을 찌푸리고 소매 속에서 붉은 구슬을 날렸다. 구슬 표면에서 붉은 주술문자가 나타나 불 구름을 형성했다.
그 모습에 한립은 새까만 손으로 허공을 쥐었다.
쉭!
새까만 산봉우리가 괴이하게 붉은 구슬 위에 나타나 추락했다. 막 구슬을 방출한 융족인은 무척 당황스러웠다. 구슬 보물은 직접적인 공격을 하도록 제련된 것이 아니라서 이런 타격에 약했던 것이다.
융족인이 급히 법결을 발동해 열두 개의 구슬 환영을 만들었다. 똑같이 생긴 구슬 환영들이 새까만 산을 피해 여기저기로 달아났다.
이에 한립은 명청령안을 발동했고 검은 산은 회색 기운에 휩싸여 종적을 감추었다. 다음 순간 달아나던 구슬 중 하나가 느닷없이 나타난 검은 산에 짓눌렸다.
쾅!
회색빛과 붉은빛이 번득이고 구슬이 깨져 불 구름으로 흩어졌다.
“감히 내 보물을 깨트려!”
구슬을 부리던 융족인이 열 받아 열댓 개의 붉은빛을 쏘아 보냈다. 그러나 한립은 피식 웃고 조용히 통보결의 수결을 바꾸었다.
그러자 검은 밧줄과 녹색 화염을 밀어붙이던 은색 자들이 일순 방향을 바꾸어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거대한 은색 자로 합쳐진 보물이 찬란한 빛을 발산했다.
이 때 열댓 개의 붉은 빛은 한립의 코앞까지 와있었다.
한립은 새까만 손에서 회색 기운을 뿜었고 회색 보호막에 휩쓸린 붉은 빛들은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며 새빨간 비도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한립은 들고 있던 혼원척을 횡으로 그었다. 이에 멀리 거대 은색 자가 용울음 소리를 내더니 기세등등하게 전차를 갈랐다.
그러나 전차 위의 융족 수사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검은 밧줄로 그물을 만들어 전차 앞을 막았고 녹색 화염을 내뿜는 거울은 방향을 틀어 은색 자를 향해 굵은 녹색 빛기둥을 방출했다.
콰쾅!
거대 자는 녹색 빛기둥에 종잇장처럼 뚫려나갔다. 이전에 보여준 위력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 모습에 검은 깃발과 거울을 조종하던 융족인이 소리를 높였다.
“조심!”
융족인이 회색 검기를 날려 허공을 때렸고 그곳에서 거대 은색 자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기이한 일이 펼쳐졌다. 회색 검기가 분명 은색 자를 갈랐는데 환영을 벤 것처럼 스쳐지나가고 만 것이다.
거대 은색 자는 돌연 깃발을 조종하던 융족인 머리 위에 나타난 사납게 떨어져 내렸다.
깃발을 조종하던 융족인이 대경실색해 자신의 뒤통수를 쳤고 온몸의 굵은 암녹색 털들이 슉! 하고 뽑혀 날아올랐다.
하지만 은색 자는 또 다시 녹색 빛들을 통과시키고 거침없이 융족의 머리를 내리쳤다. 융족인의 보호막은 은색 자 앞에 소용이 없었고 머리가 터져 선혈이 낭자했다.
머리 잃은 시체가 전차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푹!
녹색 그림자가 시체를 뚫고 나와 겁에 질린 얼굴로 거울을 조종하는 융족에게 날아들었다.
“요 형, 저 좀 살려주십시오!”
그러나 녹색 그림자는 말을 내뱉자마자 펑 하고 터져버렸다. 자 그림자 하나가 순간이동을 하듯 나타나 융족인의 원영을 없앤 것이다.
이어 거대 은색 자는 똑같이 생긴 세 개의 환영을 만들어내 나머지 세 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희미한 자 그림자에서 천둥소리가 새어나왔다.
동족 수사가 눈앞에서 당하자 나머지 수사들은 서둘러 자 그림자를 막으려고 여러 가지 술법을 펼쳤다.
그 중 두 명이 회색 손수건과 검은 방패를 꺼내 공격을 막았는데 폭음이 들려오고 자 그림자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그들을 공격한 자 그림자는 속임수에 불과했던 것이다.
‘제길!’
‘그렇다면.’
나머지 융족 수사들이 기겁해 경고하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거울을 부리던 융족인은 고리 형태의 보물을 꺼내 자 그림자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자 그림자는 고리 앞에서 모습을 감추고 흉악한 얼굴의 융족인 앞에 나타나 은색 뇌전을 뿜었다. 이에 융족인은 육신은 커녕 원영조차 살아남지 못했다.
은색 자가 허공을 선회해 또 다시 열댓 개의 그림자를 만들어 그들을 둘러싸자 융족인 중 하나가 난색을 표하며 소리쳤다.
“달아납시다!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에요!”
융족인이 전차를 구르자 마름모꼴 전차가 웅! 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빛으로 변해 자 그림자의 포위를 뚫으려 했다.
또 다른 융족인이 퍼뜩 상황을 깨닫고 전차 앞 괴수에 법결을 던져 넣었다. 전차의 잠자리 날개에서 오색 주술문자가 떠올랐다. 달아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때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와서 자리를 뜨려하시다니 늦었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전차 위에 새까만 거산이 등장했고, 산꼭대기에는 한립이 고고하게 서있었다. 이에 아래에 있던 융족인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러나 융족인 한 명이 비장한 결심을 하고 손바닥 사이에서 녹색 화염을 불러냈고, 화염은 거대한 불 속성 교룡이 되어 치솟았다. 그리고 또 다른 융족인은 체구가 배로 커져 길게 자라난 열 손가락으로 위쪽을 베었다.
쉬쉬쉬쉭.
날카로운 손톱들이 빽빽하게 날아올랐다.
한립을 물리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 달아날 기회를 벌어보려는 것이었다. 그가 등장하자마자 동족 수사가 둘이나 죽어나갔는데 누가 전의를 불태우겠는가.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 발로 산봉우리를 밟았다.
우웅.
원자극산이 회색빛을 내뿜고 떨어지다 표면에 은색 주술문자를 방출하고 사라졌다. 이에 화염과 손톱들은 텅 빈 허공을 스쳤다.
그리고 잠시 후 융족인들 머리 위로 검은 빛이 번득이고 새까만 산봉우리가 나타나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앞서 죽은 수사보다 수행이 높은지 원자극산이 빠르게 떨어지는 데도 전차를 박차고 날아올라 각기 다른 방향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그들이 탈출하자마자 전차는 원자극산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박살나 오색 영기의 빛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새까만 거산 위에 서있던 한립이 보이지 않았다.
꽈광.
달아나던 융족인 중 하나가 천둥소리를 듣고 급히 검은 방패를 들었다. 방패가 먹구름으로 변해 몸을 보호하고 몸에서 녹색 화염이 흘러나와 또 다른 보호막을 펼쳤다.
쉬쉬쉬쉭!
그 순간 머리 위에 날개 달린 인영이 나타나 수백 개의 푸른 검기를 쏟아 부었다. 푸른 검기가 먹구름과 녹색 보호막을 조각내고 푸른 실로 변해 거대한 그물을 쳤다.
그러나 융족인은 처량한 비명을 남기고 청죽봉운검이 변한 검실 아래서 힘없이 잘려나갔다. 육신과 원영 그리고 방출한 보물들까지 남김없이 잘려 산산이 흩어졌다.
처절한 비명 소리에 달아나던 나머지 융족인이 식은 땀을 흘렸다. 그는 죽을 힘을 다해 둔광의 속도를 높이느라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공간 파동이 일고 금색 그림자가 길을 막아섰다.
“……!”
융족인은 이를 악물고 한 손에는 새까만 칼날을 들고, 다른 한 손은 거대하게 부풀렸다.
새까만 칼날에서 열댓 개의 도기(刀氣)가 뻗어나갔고 거대해진 손은 금색 그림자를 내리치려 했다. 거대 손에서 검은 기운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무시무시한 위력을 품은 것 같았다.
모호하던 금색 그림자가 삼두육비의 실체를 갖추더니 범성금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한립이 풍뢰시를 이용해 날아가며 제2원영과 금신을 방출해 퇴로를 차단해 둔 것이다. 검은 도기들이 몰려들고 녹색 거대 손이 떨어지는 데도 범성금신은 피할 생각이 없이 흉흉한 웃음을 머금었다.
두 손에 금색 칼날을 불러낸 금신은 검은 도기를 베어내고 또 다른 두 손은 주먹을 불끈 쥐고 녹색 거대 손을 공격했다.
남은 두 손을 가슴 앞에서 합장했다가 펼치자 금색 빛덩이가 서서히 떠올랐다. 머리 중 두 개가 눈을 감고 주문을 외자 금색 빛덩이가 빠르게 회전해 금색 소용돌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검은 칼날은 금색 칼날과 부딪쳐 대치중이었고 녹색 거대 손은 금신의 주먹질에 영기의 빛으로 붕괴한 지 오래였다.
그 틈에 융족인은 금신 뒤에서 공간 파동을 만들어 멀리 달아나려고 둔광을 키웠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범성금신의 머리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동선금광(洞漩金光).”
두 손 사이의 금색 소용돌이가 불현듯 사라지더니 다음 순간 융족인 뒤로 금색 소용돌이가 나타나 천둥소리와 불경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필사적으로 달아나던 융족인은 갑자기 주변 공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
놀란 융족인은 다른 신통을 써보지도 못하고 강력한 흡인력에 뒤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금색 소용돌이 속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지고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금색 소용돌이는 금신이 주술을 멈추고서야 차츰차츰 줄어들어 펑! 하고 사라졌다.
바람을 가르며 범성금신(梵聖金身)의 옆에 나타난 한립은 흡족한 얼굴로 소매를 털었다.
펑!
금신(金身)은 금빛으로 흩어지고 제2원영은 검은 기운에 싸여 그의 몸속으로 돌아갔다. 제2원영을 방출하기는 했지만 너무 빨리 경지를 뛰어넘어 심마(心魔)가 생길까봐 마공을 쓰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온전히 금신의 힘만으로 적을 상대했다. 물론 이렇게 되면 금신이 제 위력을 전부 발휘할 수는 없지만 연허 후기에 이른 한립은 범성진마공(梵聖眞魔功)을 마지막까지 깨쳤기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신통을 발휘했다.
동선금광(洞漩金光)도 그 중 하나였다. 합체기 수사도 금빛에 빨려들어가면 죽을 수 있는 무서운 신통이었다.
월 선자와 서씨 노인은 나서서 그를 도와야 하나 고민하다 놀란 눈길을 보냈다. 그들의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한립이 융족인 넷을 순식간에 처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에서 기쁨보다는 왠지 모를 두려움이 느껴졌다.
한립은 여인과 노인을 놔두고 곧바로 곡아에게로 갔다. 얌전히 제자리에서 그를 기다리던 곡아는 그와 전음으로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는 흰색 빛덩이로 변해 그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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