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화. 혼원척(混元尺)
*
독 구렁이는 몸을 튕겨 은색 불새를 향해 쇄도했고, 불새도 물러서지 않고 우윳빛 화염으로 응수했다. 마금산맥에서 집어삼킨 금조진화였다. 우윳빛 화염은 독 구렁이와 충돌하자 기름을 부은 것처럼 거세게 타올랐다.
하얀 불길 속에서 독 구렁이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사라져갔다. 이 때 한립은 은색 불새를 향해 법결을 날렸다. 그러자 거대한 불새의 날개에 기이한 빛이 흐르고 은색 화염으로 이루어져 있던 것이 점점 우윳빛으로 바뀌었다.
쾅!
불새가 제 몸을 터트려 무수히 많은 불씨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엄청난 수의 녹색 액체들이 불씨에 닿아 연달아 폭발을 일으켰다. 비홍어들의 공격이 멈추자 녹아내렸던 회색빛의 보호막도 점차 복구되었다.
한립이 열손가락을 튕겨 법결들을 날려 보내자 푸른빛이 도처에서 반짝이고 사라졌던 비검들이 다시 떠올랐다.
수백 개의 검빛으로 불어난 비검들은 다시 비홍어들을 가르기 시작했다. 비홍어들은 아직도 독액을 뿜어댔지만 무수히 많은 하얀 불씨가 뒤덮고 있어 큰 위협이 되지는 못했다.
수백 개의 비검들이 괴어들 사이를 종횡무진 했고 서령진화와의 공조로 일다경 만에 4만여 마리의 비홍어들을 참살했다. 한립은 서령진화를 거둬들이고 텅 빈 허공을 둘러보다 아래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런…….’
호수 표면에 비홍어는 물론이고 다른 어류의 사체들까지 가득 떠올라 있었다. 아주 멀리까지 배를 뒤집고 죽은 어류의 사체가 끝없이 이어졌다.
한립은 그제야 주변 호수물이 연한 녹색을 띄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비홍어가 분출한 독액의 대부분을 서령진화가 없애기는 했지만 튕겨져 나간 것들은 고스란히 호수에 떨어진 것이다.
괴어의 독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같은 광경에는 소름이 돋았다. 서령진화가 없었어도 어떻게든 죽일 수야 있었겠지만 의식을 크게 소모해 서금충을 불러내거나 현천잔보를 이용해야 했을 것이다.
한 번 발동하면 후유증이 있는 신통들이었다. 한립은 곰곰이 생각하다 소매 속에서 하얀 빛덩이를 불러냈다. 그러자 곡아가 배시시 웃으며 나타났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괴어들의 머리에서 내단을 모아 오거라. 일부러 머리를 온전하게 남겨 두었으니 내단도 멀쩡할 것이다.”
“예!”
한립의 차분한 분부에 곡아가 즉시 어깨를 털었다. 그러자 곡아의 등에서 한기가 어린 칼날들이 수도 없이 튀어 올라 호수 표면으로 날아갔다.
곡아가 내려가자 한립은 둔광을 일으켜 멀리 보이는 거대 섬으로 향했다. 잠시 후 둔광이 가시고 회색 산봉우리 상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산봉우리를 살피고는 금빛 원반을 꺼내들었다. 석충족에서 출발 전 사람을 보내 가져다준 법기였다.
입에서 푸른 기운을 뿜어 흡수시키고 하얀 법결을 날리자 금색 원반이 소리를 내며 금빛을 방출했다. 금색 원반은 은색 주술문자가 떠오르자 한립의 손을 벗어나 아래로 쏘아져 나갔다.
펑-!
금색 원반에서 은색 주술 문자가 뻗어 나가 산봉우리 속으로 들어갔고 주술문자들은 은빛을 반짝이며 암석속을 드나들었다. 한립은 허공에 떠서 조용히 기다렸다.
일다경 후, 한립은 금색 원반을 끌어와 살피고는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잠시 후 거대한 동굴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금색 원반이 허공에 떠서 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금색 원반이 방출한 은색 주술문자들이 뭉쳐 형성된 빛이었다. 한립은 둔광을 거두고 동굴 내부에 구불구불한 여러 통로가 연결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그 중 한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통로 내부는 칠흑같이 어두워서 손을 펼쳐도 다섯 손가락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한립은 하얀 수정돌 몇 개를 소매 속에서 꺼내 머리 위에 띄웠다. 이제 통로 안은 대낮처럼 밝았다.
한참 걸어가던 그가 울퉁불퉁한 석벽을 의식으로 훑고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푸른빛을 뿜어 석벽을 갈라 구멍을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
탱!
얼마 되지 않아 구멍 안에서 푸른 비검이 어두운 보라색의 광석을 꿰뚫고 돌아왔다.
“매장량이 꽤 되는 것을 보니 전부 가져가려면 시간이 걸리겠어.”
한립은 비검을 회수해 광석을 쥐고는 중얼거렸다. 그는 직접 남아 광석을 채취하지 않고 저물대에서 다양한 모습의 꼭두각시들을 불러냈다.
인계에서 제련한 것들이라 수행은 낮았지만 암벽을 파서 광석을 채취하는 단순 노동에는 적격이었다.
한립은 제2원영을 방출해 꼭두각시들의 작업을 관리하게 하고 다시 토둔술을 펼쳐 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곡아가 이미 수만 개의 비홍어 내단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립은 요단이 가득 찬 저물탁을 받아들고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주인님, 섬에 적잖은 영약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가서 가져올까요?”
“영약? 네 본체가 천지영물이니 확실하겠구나. 이곳엔 강력한 흉수가 살고 있지 않으니 다녀 오거라.”
“예,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곡아는 활짝 웃으며 하얀 빛덩이로 변해 비취색 산봉우리로 날아갔다. 이에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 주위에 금제를 펼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웅.
오색 보호막이 산 정상을 둘러싸고 괴이하게 사라졌다. 하늘 위에서 보면 아무도 한립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안심하고 범성진마법상을 불러냈다. 삼두육비의 법상 표면에 보라색 주술문자가 반짝이고 금신 법상이 그 앞에 섰다. 한립이 법결을 날리자 금신의 세 머리 중 하나가 입에서 은빛에 휩싸인 물건을 뱉어냈다.
금각 청년에게서 빼앗은 은색 자였다. 현천의 보물은 아니지만 그날 보니 위력이 남달라서 통천령보 급의 보물은 되는 듯 했다. 한립은 눈을 감고 은색 자에 의식을 불어넣었다.
“혼원척(混元尺).”
그는 눈을 번쩍 뜨며 중얼거렸다. 그의 예상대로 은색 자는 통천령보였고 기재된 통보결을 익혀야 부릴 수 있었다. 한립은 정순한 영력을 불어넣어 보았다.
웅.
은색 자가 진동하자 표면에 은색 장막이 어렸다. 혼원척의 통보결을 외운 그는 은색 빛의 장막을 흩어버리고 금신 법상도 회수했다. 그리고 혼원척의 통보결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앉은 자리에서 3일이나 흘러갔다.
그는 연허 최정상에 올랐기 때문에 허천정 때보다 더 빨리 통보결을 익혀냈고 은색 자를 몸속에 넣어둘 정도로 수련을 마쳤다.
그동안 산속의 꼭두각시들도 매장된 광석을 거의 다 파내 한나절 후면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곡아도 섬 곳곳에서 꽤 많은 약초를 찾아냈는데, 일부는 영계에서 보기 드문 귀한 영초였다. 뜻밖의 수확이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곡아는 자신감이 붙었는지 호수 밑바닥에서 은밀하게 자생하는 영초를 찾아 조금씩 멀리 나가기 시작했다.
통보결 수련에 집중하던 한립은 몇 마디 당부를 하고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물론 의식 한 줄기를 아이의 몸에 부착해 만일의 사태를 대비했다.
그가 선견지명이 있는 것인지 결국 성가신 일이 벌어졌다. 통보결을 수련하고 반나절 후, 명상을 하던 한립이 갑자기 눈을 뜨고 서늘한 눈빛으로 어딘가를 노려보았다.
“죽고 싶은 게로구나!”
그는 곧바로 푸른 빛줄기로 날아올랐다.
* * *
같은 시각, 섬에서 조금 떨어진 호수 위에 세 줄기 둔광이 허둥지둥 지나가고 있었다. 그중 하얀 빛 속의 조그만 인영이 바로 곡아였다.
그들 뒤로 네 대의 삼각형 전차가 바짝 쫓고 있었다. 전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녹색 얼룩이 여기저기 묻어있었고 영기의 빛이 암담해져 있었지만 속도는 굉장히 빨랐다.
둔술에 정통한 곡아도 조금씩 뒤쪽 전차에게 따라잡히고 있었다. 다만 앞쪽에서 날아가는 다른 두 빛은 곡아보다 조금 더 빨라 간신히 전차와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월 수사, 원기를 크게 상하고도 잘도 도망가십니다. 그냥 구염초를 내놓으시지요. 그러면 깔끔하게 죽여 혼백이 환생할 길을 열어드리리다.”
전차 중 하나에서 사내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염초를 불살라 버리는 한이 있어도 네 놈들에게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남색 둔광 속에서 여인이 서늘하게 소리쳤다.
“월 선자, 뭐 하러 저런 자들과 말을 나누십니까! 보물을 얻자마자 약속을 깨고 암습하는 비열한 자들과는 상종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다른 회색 둔광 속에서 노인이 울화가 치밀어 오른 듯 했다.
“그 일을 겪고 어찌 저들의 말을 귀담아듣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인이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노인에게 답했다. 동시에 노인의 귓가에 여인의 은밀한 전음이 전해졌다.
“서 수사, 이 방향이 틀림없는 것입니까? 이대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맞을 겁니다. 법기의 반응으로 보아 저쪽에 천운 사람이 있는 것이 확실해요. 뒤따르는 여자 아이도 기운이 특수한 것이 무언가가 사람의 형상을 한 것 같은데 그 주인이 어딘가에 있지 않겠습니까. 저들이 표식을 심어 놓아 달아날 길이 없으니 모험을 해야 할 때입니다.”
서 노인도 조심스럽게 전음으로 답했다. 그 말에 탄식한 여인은 어쩔 수 없이 전력을 다해 전방으로 날아갔다.
휘익!
뒤쫓던 네 대의 전차가 갑자기 한 곳으로 모여들어 거대한 전차로 변했다. 마름모꼴의 전차 앞에 교룡과 구렁이 중간쯤 되어 보이는 괴수의 머리가 솟아올랐다.
거대 전차는 머리가 생긴 순간 노을빛 기운을 흩날리며 두 쌍의 잠자리 날개를 펼쳤다. 전방의 여인과 노인이 그것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을 마주쳤다.
“자네도 어서 달아나게!”
그 와중에도 노인은 뒤쪽의 곡아에게 경고를 남기고, 여인과 둔광을 합쳐 허공을 갈랐다. 속도가 이전의 배이상이었다.
그 때 거대 전차가 두 쌍의 잠자리 날개를 흔들었고 괴수머리의 눈에선 핏빛이 번득였다.
쉭!
노인의 당부에 곡아도 진작 뒤를 경계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괴상한 거대 전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소스라치게 놀란 진원을 상하는 일이 있더라도 비술을 펼쳐 속도를 높이려는데 한발 늦고 말았다.
머리 위에 공간 파동이 일고 괴이한 웃음소리가 울려퍼진 것이다. 푸른 빛 속에서 거대한 손톱이 날아들어 곡아를 죽이려 들었다.
하얀 빛덩이 속에서 곡아가 이를 악물고 수결을 맺는 동시에 몸에서 수백 개의 얇은 칼날을 방출했다.
“엇!”
전차 속에서 누군가 의외라는 듯 소리를 냈지만 거대 손톱은 멈추지 않고 손바닥에서 녹색 기운을 뿜어내 얇은 칼날 대부분을 튕겨냈다. 거대 손톱이 그대로 곡아를 덮치기 직전이었다.
‘아…….’
거대한 손톱 때문에 주위가 어둑해지자 곡아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그녀도 자신이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공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어디선가 서늘한 코웃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허공에 은색 거대 인장이 나타나 거대 손톱을 쳐냈다.
꽝!
거대 손톱은 인장의 일격에 버티지 못하고 눈 녹듯 녹아 사라졌다.
“누구냐! 감히 융족(戎族)의 일에 나서다니!”
푸른 빛 속에서 노호성이 들리고 전차가 나타났다. 그 위로 초록빛에 둘러싸인 네 명의 인영이 올라와 있었다. 얼핏 보면 평범해 보였지만 인족과 달리 전신에 암녹색 털이 길게 자라나 있었고 머리는 승냥이나 이리를 닮아 있었다.
“함부로 남의 시녀를 건드리시면 안 되지요.”
냉랭한 사내의 목소리가 울리고 수정 날개가 달린 청년이 은색 자를 쥐고 나타났다. 풍뢰시를 전력으로 발동해 거의 순간이동 하듯 나타난 한립이었다.
조금 전 거대 손톱을 막은 은색 인장은 천강인(天罡印)이었다. 그는 이제 법력도 다 회복했고 혼원척의 통보결까지 수련을 마쳤으니 겨우 이족인 네 명을 두려워할 까닭이 없었다.
게다가 곡아를 죽이려했으니 살심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손에 들고 있던 혼원척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은색 그림자들이 흘러나와 그를 완전히 감쌌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님!”
“한 수사!”
한립의 등장에 곡아의 감격스런 목소리와 전방에서 날아가던 노인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