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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025화 (782/2,000)

1025화. 비홍어(飛虹魚)

*

그 때 한립은 거대 원숭이로 변해 주먹을 날리던 순간을 되새기고 있었다. 거대 원숭이로 변했을 때는 힘이 어찌나 세졌는지 합체기 수사와 싸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행이 성공도 환술 속에서 마음을 단련한 끝에 심지를 굳건히 할 수 있었다. 그 덕에 갑작스런 수행의 증가에도 마음이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나저나 종은 어째서 부서진 걸까?’

한립은 하얀 종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아쉬움이 남았다. 그것을 얻었으면 앞으로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한립은 금각 청년이 남긴 보물들을 챙겨 푸른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 * *

얼마 후, 그는 둔광 속에서 앞으로의 행보를 고민하고 있었다. 류수아와 석곤을 도와 채류앵과 단천인이 원하는 물건은 찾았지만 아직 석충족(石茧族)에게 약속한 재료를 얻지 못했다.

단천인은 자신의 일만 제대로 처리해주면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한립은 괜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석충족이 이 일을 구실삼아 그가 초대형 전송진을 이용하지 못하게 반대할 수도 있었다.

그는 광석이 매장된 곳의 거리와 남은 시간을 가늠해 보고 시도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그 전에 법력을 회복하는 것이 먼저였다. 이렇게 드넓고 위험한 광한계에서는 아무리 수행이 늘어났어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한립은 방향을 틀어 반나절 후 작은 숲 위에 나타났다.

그는 명청령안을 발동해 숲을 한 바퀴 돌아보고는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아 있는 굵직한 거목 한 그루를 찾아 뿌리 쪽으로 들어갔다. 밑동에 형성된 큰 굴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한립은 여러 개의 진법 깃발을 내뿜어 동굴 입구를 가리고 간단한 은신 결계를 펼쳤다. 그리고 소매 속에서 표린수를 불러냈다. 삼목암수의 요단을 여러 개 삼키고 줄곧 영수환 속에서 잠들어 있다 막 깨어난 참이었다.

표린수는 요단을 연화한 후 몸에 검은 문양이 생기고 무언가 색다른 기운을 뿜어냈는데 한립에게도 위협감을 주는 그런 기운이었다.

겉모습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가 위협감을 느끼는 기운이라면 뭔가가 있을 것이다. 한립은 의식으로 표린수에게 경계를 서라 명하고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았다.

그는 각치인과 싸우느라 얼마 없던 법력까지 모두 써버려서 굴 안에서 일주일을 보내고서야 겨우 9할을 회복했다. 처음에는 법력을 최고치까지 회복한 다음 길을 나서려 했는데 8일째 되는 날 귓가에 표린수의 나지막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한립은 눈을 뜨고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폭음과 혼잡한 영기 파동을 감지했다. 마치 누군가 위쪽에서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한립은 조심스럽게 의식을 퍼트려 거목 주변을 훑고는 표정이 묘해졌다. 체형이 다른 두 마리의 짐승이 그가 머무는 숲 고공에서 쫓고 쫓기며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앞에서 쫓기는 것은 금털에 새까만 눈을 지닌 암수왕이었다. 암수삼림에서 동족들에게 쫓겨 달아나던 바로 그 암수왕이었다. 암수왕은 지금 털 곳곳이 타들어가고 기다란 꼬리마저 반 토막이 나 있었다.

그래도 사나운 맹수의 본성은 그대로인지 금빛으로 변해 달아나면서도 뒤쪽으로는 금색 바람의 칼날을 퍼부었다.

뒤쪽의 짐승은 금색 바람의 칼날을 거침없이 튕겨내며 엄청난 방어 신통을 보여주었다. 암수왕에 열 배나 되는 괴수는 돼지 머리에 뱀의 몸을 하고 있었다.

괴수가 내뿜는 기운은 금색 암수왕을 능가했다. 암수왕이 제대로 싸워볼 생각도 못하고 도망치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한립은 표린수를 거두고 숨죽인 채 기다렸다. 잠시 후 두 머리 짐승이 앞 다투어 숲을 벗어나 자취를 감추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의 수행에 두 괴수를 두려워할 까닭은 없었다. 단지 괜히 성가신 일이 생길까 기운을 숨기고 피했을 뿐이다.

두 괴수의 느닷없는 등장에 그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괴수들이 남긴 강한 기운에 이끌려 인근의 다른 흉수들이 몰려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괴수들이 향한 방향이 그가 가려는 방향과 달라 마주칠 걱정은 없었다.

한립은 굴 입구를 가린 금제를 거두고 푸른 빛줄기로 변해 날아올라 길을 재촉했다. 가는 동안 양손에 최상급 영석을 쥐고 나머지 법력을 채우는 것에 집중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앉아서 휴식을 취하지 않아도 법력이 완전히 회복될 것이다.

밤낮없이 날아가다 보니 금방 한 달이 지나갔다. 도중에 마주친 괴수 몇 마리를 제외하고는 그의 앞길을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다른 이종족 무리를 마주친 일도 없었다.

한립은 저 멀리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호수를 발견하고 미소를 머금었다. 푸른 바다처럼 넓고 잔잔한 호수와 쾌청한 하늘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지도를 살펴보니 그의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호수 상공으로 진입해 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몇 시진 후, 한립의 표정이 달라졌다.

호수는 끝도 없이 펼쳐져서 아무리 빨리 달려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지도가 없었다면 이름 모를 호수를 헤매고 다녔을 것이다. 그리고 기이한 것은 가도 가도 호수의 짐승들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드물게 보이는 몇몇 저계 괴수들은 은신술을 펼치고 호수 밑바닥에 숨이 있었다. 이에 한립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분명 호수에 강력한 흉수가 살고 있어서 다른 괴수들이 버티지 못하고 떠난 것이다. 석충족은 이곳이 안전하고 상고흉수 또한 살지 않는다고 장담했지만 그건 지난 번 개방 때의 일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강력한 흉수가 자리를 잡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석충족이 요구한 재료를 위해 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옳지 못했다.

어쨌든 재료를 구해가지 않아도 초대형 전송진은 알아서 처리해주겠다고 했으니 사소한 일로 허언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여기까지 고생해서 왔는데 그냥 돌아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고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재료를 구해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조금 더 날아가니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섬이 하나 보였다. 한립은 호수에 위치한 대형 섬을 발견하고는 둔광을 멈추고 조용히 바라보았다.

크고 작은 산봉우리가 두 개나 솟아 있는 섬은 주변 환경이 조금 특이했다. 높은 산은 회색빛으로 풀 한포기 자라지 않았고, 낮은 산은 풀과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있었다.

“바로 저곳이구나!”

한립의 시선이 회색 산봉우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섬의 모습이 지도에 묘사된 것과 완전히 일치했다. 석충족이 요구한 진귀한 재료는 높은 산봉우리에서 구할 수 있는 일종의 특수한 광석이었다. 광한계에서만 생산되기에 굉장히 진귀했다.

한립은 전방을 응시하다 돌연 푸른 비검을 분출했다. 그러자 호수에서 펑! 하고 터지며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푸른빛이 물기둥을 둘로 가르자 ‘꽥!’ 하는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물기둥 속에 숨어 있던 괴상한 물고기가 검기에 두 동강이 나 녹색 피를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독사의 머리를 한 청록색 물고기는 등에는 날개가 달려 있었고, 배 밑으로는 아주 작은 발이 달려있었다.

‘저게 뭐였더라?’

저 모습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데 순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잠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죽은 괴어(怪魚)의 시체가 호수에 떨어지자마자 사방에 꽥꽥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리고 호수 표면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기둥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물기둥이 흩어지고 크기가 제각각인 괴어들이 낮게 떠올라 한립을 주시했다.

물고기들은 죽은 괴어와 똑같이 생겼지만 비늘에 알록달록한 무늬가 있어 아름다운 빛을 발산했다.

“비홍어(飛虹魚).”

그제야 괴어의 이름이 떠올랐다. 천붕족(天鵬族) 성에 있을 때 아주 오래된 경전에서 이 물고기에 대해 본 적이 있었다.

비홍어는 이름도 예쁘고 생김새도 곱지만 해양에서 생활하던 고대 이종족에게는 애증의 존재였다고 했다.

괴어의 내단이 진귀한 상고단약 칠채단(七彩丹)의 주재료였던 것이다. 칠채단은 상고영충을 기르는데 특효인 단약으로 수시로 복용하면 성장이 촉진됐고 성체가 된 후에는 일정 확률로 변이를 일으키거나 수행이 높아졌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치를 떨었던 이유는 괴어가 극독을 품고 있었고 한 번 마주치면 그 수가 적게는 수천에서 많게는 수만 마리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비홍어는 상고시대에 멸종이 되었기에 극소수의 경전에만 그 존재가 기록되어 있었다.

한립은 광한계에서 비홍어 떼를 마주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야 이 거대한 호수에 영성을 지닌 고계 괴수가 없는 이유를 확실히 알았다.

전부 극독을 지닌 비홍어 떼에 잡아먹혔거나 그 전에 달아난 것이다.

비홍어의 희소가치가 그 무서움을 능가했던 것이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영계의 실력자들이 비홍어들을 찾아 죄다 죽였을 리 없었다.

한립은 경전에 적힌 비홍어의 독성에 대해서도 반신반의했다.

그는 회색 기운으로 빛의 장막을 만들어 앞을 막고 오색(五色) 한염을 방출했다. 그리고 주저 없이 소매를 털어 수십 자루의 푸른 비검들을 내뿜었다. 비검들은 몸을 떨며 수백 개의 검빛으로 불어났다. 푸른빛을 머금은 검빛이 여기저기로 퍼졌다.

비홍어 한 마리가 그것을 보고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그러자 모든 비홍어들이 한립을 향해 달려들었다.

“베어라.”

한립은 수결을 맺으며 음산하게 소리쳤다. 그의 명령에 수백 개의 검빛이 사방팔방에서 나타나 물고기 떼를 난도질했다. 검빛이 스치는 곳마다 비홍어가 두 동강이 나서 그 시체와 녹색 핏물이 떨어져 내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천여 마리 비홍어들이 죽어나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그러나 청죽봉운검의 매서운 공격에도 비홍어들은 아직도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백 개의 검빛으로도 그것들을 다 막을 수는 없었다.

몇몇 비홍어는 한립에게 접근해 괴성을 지르고 녹색 액체를 뱉었다. 이에 한립의 안색이 달라지며 수결의 모양을 바꾸었다.

수백 개의 검빛들이 모여들어 거대한 푸른 연꽃을 만들고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청죽봉운검은 한립을 철저히 가리고 방어태세에 들어갔다.

비홍어의 독액 공격만 이겨내면 괴어들을 몰살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경전에서 극독이라고 일컫던 독액 공격을 정말 막을 수 있을지 조금 불안했지만 시도해보지 않고는 물러날 수 없었다.

칠채단이 듣던 대로 그렇게 신묘하다면 서금충에게 주어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가게 도울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한 번쯤 위험을 감수할 가치는 있었다.

그 때 푸른 거대 연꽃이 서서히 피어나며 꽃잎들이 층층이 빛의 장막을 형성했다.

푸푸푸푹!

녹색 액체들이 연꽃 꽃잎에 닿을 때마다 놀랍게도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고 크고 작은 구멍이 뚫렸다. 비홍어의 독액이 청죽봉운검이 변한 빛의 장막마저 녹여낸 것이다.

한립은 놀랐지만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청죽봉운검은 어느 정도 손상당해도 금방 원래 상태를 회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녹색 액체가 그 뒤의 오색 한염을 녹여내는 것을 보고는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다시 수결의 모양을 바꾸었고 오색 한염은 빠르게 회전해 오색 회오리바람으로 변했다.

상당수의 녹색 액체들이 회오리바람에 튕겨 나갔다. 하지만 비홍어의 수가 너무 많았고 독액도 끊임없이 날아왔다. 극성으로 발휘한 오색 한염도 얼마 버티지 못했고 녹색 액체는 마지막 보호막인 회색빛 장막으로까지 들이닥쳤다.

츠츠츳!

녹색 액체가 닿는 순간 괴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립은 눈꼬리를 끌어올리며 입에서 주먹 크기의 은색 화염을 분출했다. 은색 화염은 화륵~ 하고 크게 타올라 거대한 불새로 변했다.

“가라.”

은색 불새는 날개를 펼쳐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쇄동했다. 그러자 녹색 액체가 천적을 만난 것처럼 증기로 변해 흩어졌다. 이에 한립은 기분이 좋아져 은색 불새를 부려 비홍어들을 싹 쓸어버리려 했다.

그런데 비홍어들 중 일부가 괴상한 울음소리를 내자 녹색 액체를 한 곳으로 분출하기 시작했다. 녹색 액체들은 허공에서 응결해 거대한 녹색 구렁이로 변해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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