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4화. 거대 원숭이의 위용
*
“설마 저 보물은…….”
한립의 표정이 수차례 바뀌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명청령안으로 그 일대를 샅샅이 뒤지다가 어딘가를 노려보며 미간에서 검은 눈을 불러냈다.
손가락 굵기의 검은 빛줄기가 검은 눈에서 날아가 허공을 강타했다.
쿵!
금각 청년이 비틀거리며 허공에서 튀어나왔다.
“파멸법목(破滅法目)!”
청년은 한립 미간의 제3의 요목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그의 몸에는 어느샌가 남색 갑옷이 걸쳐져 있었고 등 뒤로 거대한 남색 법상이 두 개의 보물을 들고 다시 등장했다.
파앗.
금각 청년이 허공을 쥐자 일곱 빛깔의 빛이 반짝이고 새하얀 작은 종이 들렸다. 그는 작은 종을 들고 차분해진 눈길로 한립을 응시했다.
이에 한립도 무표정하게 금신과 서령불새를 불러 모으고 72자루의 푸른 비검을 금각 청년에게로 날려 보냈다.
쉬쉬쉬쉭.
음산한 푸른빛으로 변한 비검들이 파공음을 내며 날아가 청년을 정신없이 베었다. 청죽봉운검의 빠른 속도에 금각 청년은 눈꼬리를 끌어올리며 들고 있던 작은 종을 울렸다.
댕!
하얀 파동들이 너울너울 퍼져나가 푸른 검빛을 덮쳤다. 파동과 검빛이 접촉하는 순간 수십 개의 비검들이 원래 형태로 돌아갔고, 잇달아 밀려드는 파동에 모든 비검이 가루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한립의 안색이 급변해 동공을 수축했다. 명청령안을 사용한 그는 똑똑히 보았다. 작은 종에서 퍼져 나온 것은 하얀 파동이 아니라 아주 미세한 공간균열이었다.
평범한 공간균열과 달리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청죽봉운검이 아무리 날카로워도 공간의 힘이 발산하는 날카로움에는 비할 수가 없었다.
일격에 비검들을 박살낸 금각 청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댕! 댕!
작은 종이 두 번 울리고 하얀 파동이 다시금 너울너울 퍼져나갔다. 동시에 청년 뒤의 법상이 두 개의 보물을 발동해 삼색 화염과 불 구름이 밀려들었다.
청년은 입에서 검은 기운을 뿜어 몸을 감쌌다. 진한 녹색의 실들을 함유한 검은 기운 속에서 귀곡성과 비린내가 진동했다. 한 번에 이렇게 많은 신통을 펼쳤다는 것은 이번에야말로 한립을 죽이겠다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한립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다른 건 몰라도 하얀 종이 방출하는 공간 신통만은 정말 꺼림칙했다. 그리고 아직 법력을 전부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싸움을 오래 끌 생각이 없었다.
금신 법상이 자금색 빛을 방출하자 불경 소리 속에서 보라색 주술문자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법상의 손에서 칼날 조각이 나타나 맑은소리로 울었다.
쿠릉.
일대의 천지원기가 부름을 받은 것처럼 거세게 밀려들어 주변이 오색 빛의 장막으로 둘러싸였다. 광한계에 천지원기가 풍부했기에 가능한 현상이었다.
빛의 장막이 함유한 막대한 영력에 정면의 금각 청년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가 반응을 보이기 전에 금신 본체의 영기의 빛이 금색 칼날 조각으로 미친 듯이 주입되었고, 두 장 크기의 금신은 괴이하게 체격이 줄어들었다. 조각나 짤막하던 칼날 조각이 모호하게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미세하게 떨었다.
울음소리가 그치고 하늘을 뒤덮은 오색 빛의 장막이 금색 칼날로 몰려들었다. 몇 호흡 만에 천지원기를 깡그리 흡수한 금빛 칼날은 기다랗게 자라나 소리 없이 정면을 베었다.
그러자 팔뚝만한 금빛이 칼날을 빠져나가 금색 물줄기처럼 뻗어나갔다. 금각청년은 금색 물줄기에 기겁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당하고 있지는 않았다.
불 구름과 삼색 화염, 검은 기운 그리고 하얀 파동이 금색 물줄기를 들이받았다. 굉장한 폭음을 냈지만 분분히 소실되어 버렸다.
하얀 파동만이 금색 물줄기 속에 뛰어들어 대치하는 중이었다. 두 기운의 교전에 폭음이 끊이지 않았다.
“현천법기(玄天法器)!”
안 그래도 의심스런 마음을 품고 있던 청년은 가슴이 철렁했다. 현천의 보물 조각인 칼날 조각을 작은 종과 동급의 현천법기로 오해한 것이다.
조각 난 현천의 보물은 위력 면에서 현천법기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청년은 들고 있던 작은 종을 허공에 띄우고 손가락을 연달아 튕겼다.
댕댕댕…….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그의 얼굴은 한층 창백해졌고, 일곱 번 울리고는 아예 핏기가 가셨다. 종을 울리는 것은 원래 원기 소모가 심해 연허기 최고봉인 그라도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연달아 종을 울린 보람이 있었다.
첫 번째 종소리가 울린 순간 한립은 알 수 없는 힘에 허공으로 빨려 올라갈 뻔했다. 그는 화들짝 놀라 법결을 발동해 천외마갑에서 검은 주술 문자들을 겹겹이 띄웠다.
주술문자들이 검은 돌풍을 이루어 무형의 힘으로부터 그를 보호했다. 천지법칙의 힘은 괴이했지만 검은 돌풍을 압박할 뿐 한립을 해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두 번째 종소리가 울리고 천외마갑이 방출한 검은 돌풍이 위태롭게 울어댔다. 몇 번이나 현천의 보물을 사용해본 한립이 법칙의 힘을 모를 리 없었다.
그가 서둘러 수결을 맺자 그의 등 뒤로 수정 날개 한 쌍이 나타났다. 그때 세 번째 종소리가 유유히 울려 퍼졌다. 마갑이 방출한 검은 기운이 응결해 실체를 지닌 것처럼 갈가리 찢겨나갔다.
한립은 입술을 실룩이며 날개를 펄럭여 청백색 뇌전을 남기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다음 순간 그가 서있던 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한립이 세 번의 종소리가 지닌 공간의 힘을 그냥 피해 버린 것이다.
네 번째 종소리가 울렸을 때는 허공 어딘가에서 퍽, 하고 한립이 뇌전에 휩싸여 튀어나왔다. 풍둔술이 종소리에 간단히 흩어졌던 것이다.
그때 다섯 번째 종소리가 울려 한립이 또 천지법칙의 힘에 둘러싸여 거꾸로 뒤집혀졌다. 강력한 힘이 그의 몸을 사방에서 잡아당겨 몸이 찢겨나가는 것 같았다.
그 순간 한립이 눈을 번쩍 뜨고 고함을 터트렸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눈부신 금빛이 터져 나오고 황금색 털이 자라나 거대 원숭이로 변했다. 흉악한 생김새의 거대 원숭이는 다리통이며 팔뚝이 비정상적으로 굵어 딱 봐도 엄청난 괴력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거대 원숭이가 사지를 힘차게 뻗어 펑! 하고 주위에서 끌어당기는 힘을 끊어냈다. 그리고 금각 청년이 있는 곳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금각 청년은 원기를 상해가며 펼친 작은 종의 현묘한 공격이 통하지 않자 눈을 부릅떴다. 한립이 거대 원숭이로 변해 법칙의 힘을 이겨내는 모습은 직접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거대 원숭이가 괴이하게 나타나 거대한 손을 휘둘렀기에 작은 종을 불러올 시간도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재빨리 수결을 맺어 남색 법상의 남색 칼날을 불러내 던졌다.
서늘한 남색 빛 두 개가, 거대 원숭이의 손과 가슴팍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러나 거대 원숭이는 남색 빛이 날아들든 말든 개의치 않고 손아귀로 목표물을 쥐는 데만 집중했다.
챙!
금속성의 충돌음이 경쾌하게 터져 나왔다. 거대 손을 막으려던 남색 빛이 거대손에 충돌하자 가루가 되어 흩어졌고, 가슴을 노린 남색 빛은 가볍게 튕겨 나갔다. 거대 원숭이의 털끝 하나 베어내지 못한 것이다.
“헉!”
그 모습에 금각 청년은 겁에 질려 등 뒤의 법상을 움직였다.
남색 법상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거대 원숭이를 향해 뛰어오른 순간, 청년은 입에서 진한 녹색의 실을 함유한 검은 기운을 분출해 새하얀 종을 울리려 했다.
그러나 남색 법상은 금색 거대 손과 닿자마자 엄청난 괴력에 빛으로 흩어졌고 검은 기운도 전혀 막아내지 못하고 소실되었다. 결국 거대 원숭이의 손이 금각 청년의 보호막을 뚫고 상대의 머리를 꽉 쥐었다.
콱!
원숭이의 엄청난 괴력에 청년의 머리가 터져 나가고 머리 잃은 시체는 밑으로 추락했다.
쿵!
시체는 바닥에 충돌하자마자 크게 핏빛을 터트렸다. 피와 살이 화살처럼 변해 사방으로 튀었는데 무언가가 재빨리 허공을 갈랐다.
청년의 원영이 하얀 종을 노리고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청년은 육체를 잃고서야 한립의 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새하얀 종에 의탁해 달아나고자 했다.
거대 원숭이는 날아드는 핏빛 화살을 무시하고 두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포효했다. 벼락과 같은 포효소리에 하늘이 울리고 음파가 공간을 변형시켜 그물 모양의 흔적들이 생겨났다.
거대 원숭이의 우렁찬 울부짖음에 공간이 진동하며 잘게 찢겨나간 것이었다. 이에 핏빛 화살들이 무(無)로 돌아가고 음파의 영향권에 있던 흐릿한 그림자는 짧은 비명을 남기고 폭발했다.
문제는 청년의 원영이 사라진 순간, 새하얀 종도 자폭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흠…….’
그 모습에 한립은 남색 빛을 번득이고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
거대 원숭이는 눈을 돌려 거대 구렁이와 도마뱀이 있는 곳으로 이동해 거대한 주먹으로 도마뱀 괴수를 강타했다.
연허 중기의 영수는 불쌍하게도 피범벅이 되어 한립에게 요단도 빼앗기고 달아나던 혼백마저 하얀 구렁이에게 잡아먹혔다. 거대 원숭이는 마지막 적까지 완벽하게 처리하고는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한립은 새하얀 종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 * *
같은 시각 멀리 영계의 궁전 안.
첩첩이 금제로 둘러싸인 누각의 꼭대기에서 노기 어린 목소리가 소리쳤다.
“어찌 이런 일이!”
누각 입구에 선 금색 갑옷 병사들은 갑작스런 노호성에도 무표정했다.
누각 꼭대기에는 각치족 인물들이 탁자 위의 새하얀 거대 종을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소리친 이는 비취색 뿔이 난 미부인으로 얼굴에 노여움이 가득했다.
탁자 위 거대 종은 크기를 제외하면 금각 청년이 부리던 것과 꼭 닮아 있었는데 탁자 밑으로 금빛이 찬란한 소형 진법이 다섯 개나 펼쳐져 있었다.
네 개의 진법은 텅 비어 있었는데 유일하게 거대 종과 가장 가까이 있는 소형 진법 위에만 하얀빛이 떠다녔다.
“현천법기가 망가지고 주재료인 신종의 진령(眞靈)마저 되돌아오다니! 이것을 지니고 있던 제자는 죽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도 아닙니다. 광한계에 수많은 이종족 수사들이 진입해 있으니 그중에 역천의 신통을 지닌 적수를 만났다 해도 이상하지 않지요. 아니면 광한계에 서식하는 상고흉수를 만나 화를 당했을 수도 있고요.”
미부인의 말에 미간에 푸른 반점이 찍혀 있는 노인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래도 이상하긴 합니다. 미천종(迷天鐘)을 복제한 현천법기가 있으면 성계 존재를 만나도 목숨을 부지할 수는 있었을 텐데요. 게다가 절대 단독행동을 하지 말고 현천법기를 지닌 제자를 꼭 보호해야한다고 단단히 일러두었는데 말입니다. 게다가 이미 반년이 지났으니 아무리 멀리 전송되었어도 목적지에 도착해 계획을 수행할 때가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남색 장포 중년인이 미소를 머금고 의견을 밝혔다. 그 말에 노인도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어찌 되었든 현천법기를 잃은 부대는 임무에 실패했습니다. 이러면 본족의 대계(大計)에 영향이 미칠 텐데요.”
평정을 회복한 미부인이 냉랭히 말했다.
“괜찮습니다. 물건은 총 다섯 개로 나뉘어 있으니, 나머지 네 부대가 임무에 성공하면 다음번 광한계 개방일에 본족의 계획을 진행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다른 부대도 문제가 생길까 걱정인 게지요. 하나 정도는 어떻게든 수습한다지만 이 이상 임무에 실패하면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겁니다.”
중년 사내의 말에 생각에 잠겨 있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아직 본족이 흥할 운명이 아니라고 받아들여야지요.”
“말이야 쉽지만 이번 일을 위해 수많은 노력과 자원을 소비했습니다. 다섯 개의 현천법기는 봉인을 풀기 위해 만든 것이라 1년이 지나면 스스로 허물어져 사라지게 되고요.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면 이번 일을 맡은 우리들의 체면은 어찌합니까?”
노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체면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 원래부터 일거양득(一擧兩得)을 노린 계획이라 광한계 쪽이 실패해도 영계에서는 십중팔구 성공할 테니까요.”
“맞는 말씀입니다. 슬슬 천운과의 전쟁을 마무리 지을 때입니다.”
미부인의 말에 중년 사내가 노인과 눈을 마주치고는 미소 지었다. 미부인은 이야기를 마치고 금색 진법 위에 떠 있는 하얀 빛덩이를 가리켰다.
댕!
맑은 종소리가 들리고 하얀 빛덩이가 유유히 날아 거대한 종으로 스며들었다. 거대 종이 맑게 울리고 표면에 은색 주술문자들이 겹겹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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