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3화. 은색 자와 금색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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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빛의 속도로 달아난 한립은 둔광 속에서 미간을 좁혔다. 정체 모를 비술이 자신을 추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무언가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떼어낼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빨리 날아가도 추격을 따돌릴 수 없었다. 게다가 둔술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소모하는 법력도 컸다. 그는 아직 법력이 충분히 회복되지 않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는 뒤따르는 각치족을 제거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는 뒤따르는 수사가 한 명뿐이라는 것을 파악하고는 살심이 강해졌다. 연허 후기 최고봉이라면 법력이 조금 부족해도 수사 한 명쯤은 가뿐히 처리할 수 있었다.
한립은 단숨에 수만 리를 날아가고도 여전히 추격자가 따라붙자 허공에 멈춰 섰다. 소매 속에서 열댓 개의 푸른 비검이 쏟아져 나와 사방의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는 뒷짐을 지고 서서 하늘 끝에서 노란 바람이 몰려오는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뇌전을 동반한 노란 바람이 가시자 다리가 여섯 개 달린 두 쌍의 거대 도마뱀이 나타났다.
그리고 도마뱀 머리 위에는 금각 청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서 있었다.
“천운인은 아닌 것 같은데……. 어차피 죽일 거니 상관없겠지.”
청년이 명하기도 전에 육족 도마뱀이 먼저 포효하며 날개를 펼쳐 사라졌다. 허공에 홀로 남은 청년은 손을 뻗어 거무튀튀한 그림자 창을 쥐었다.
“…….”
한립은 말없이 입꼬리를 꿈틀하고 한쪽 방향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자 금색 주먹 그림자가 빠져나와 거대 주먹으로 변했다. 주먹이 지나는 곳마다 폭음이 들리고 공간이 왜곡되었다.
쾅!
금색 거대 주먹이 폭발해 금색 광채를 휘날렸다. 괴수의 포효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육족 도마뱀이 엉망이 되어 모습을 드러냈다. 입에서 노란빛을 뿜어 금빛 광채를 막았다.
그때 금각 청년이 한립의 주의가 분산된 것을 보고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금각 청년의 손에서 그림자 창 하나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다음 순간 한립 앞에 검은빛이 반짝이더니 거무튀튀한 창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한립은 이미 예상했는지 입을 벌려 금색 뇌전을 뿜었다.
창이 어떤 신통을 지녔는지는 모르지만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것으로 보아 십중팔구 사악한 기운을 함유하고 있었다. 마기나 사기에는 벽사신뢰만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무튀튀한 창이 순간 흐릿한 허상으로 변해 금색 뇌전을 통과했다. 벽사신뢰가 통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이에 창은 그대로 날아들었고, 한립은 피할 방법이 없었다.
펑-
창은 한립의 몸을 가격하고 검은빛을 내며 폭발했다. 한립은 거센 힘에 밀려 뒤로 물러났지만 멀쩡했다. 불시에 들이닥친 매서운 일격을 그의 몸에 떠오른 검은 갑옷이 막아낸 것이다.
검은 갑옷에 떠오른 주술문자들이 괴이하게 반짝거리며 거무튀튀한 창을 없애 버렸다. 이에 한립과 청년의 안색이 동시에 달라졌다.
한립은 벽사신뢰를 통과해 달려든 그의 창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천외마갑이 보호하지 않았다면 부상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금각 청년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음령모(陰靈矛)가 실패한 것이 무척 의외였다. 동급 수사들도 음령모에는 부지불식간에 죽어나가곤 했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이 한립의 검은 갑옷으로 향했다. 검은 주술문자들이 반짝거리는 갑옷을 보고 그는 내심 신이 났다.
“갑옷이 좋아 보입니다. 꼭 거둬야겠어요.”
“실력이 있으면 그래 보시지요.”
서늘한 청년의 말에 한립이 담담히 대꾸했다.
“그럼 당신의 목숨도 덤으로 거두어가 보죠!”
금각 청년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합장했다 펼쳤다. 그러자 짧은 은색 자가 굉장한 영기의 압력을 뿜으며 등장했다!
한립은 속으로 조금 놀라고 있었다. 명청령안으로 살펴보니 은색 자 표면에 쓰인 작은 주술문자들은 모두 은과문(銀蝌文)이었다. 이에 한립은 수결을 맺어 푸른 연꽃을 불러냈다.
우웅!
인근에서 무수히 많은 푸른빛의 점들이 떠올라 손바닥만 한 푸른 연꽃으로 피어났다.
한립이 춘려검진을 발동한 순간 소매 속에서 하얀 구렁이가 날아올라 금빛 광채를 뚫고 나온 육족 도마뱀을 휘감고 물어뜯었다.
그러자 육족 도마뱀도 분노하며 노란 기운을 내뿜고 발톱을 휘두르며 맞섰고 결국 하얀 구렁이와 도마뱀은 한 데 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한립은 통과괴뢰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았다. 도마뱀 괴수는 연허 중기였지만 와와는 그보다 수행은 낮아도 위력적인 얼음 속성 보물을 두 개나 지니고 있었다. 또한 육박전이라면 웬만한 상처에 끄떡없는 꼭두각시가 훨씬 유리하다.
그러나 금색 청년은 주위의 푸른 연꽃을 보며 멸시 어린 시선을 보냈다. 한립은 은색 자가 그림자를 방출하는 것을 보고 검결을 움직였다.
푸른 연꽃들이 빙글빙글 돌아 몇 배로 커지더니 하나로 연결되어 푸른색 빛의 장막을 만들었다.
금색 청년은 눈앞이 흐려지며 어느새 푸른 목초지 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파릇파릇한 풀들과 흐드러지게 핀 야생화가 어우러져 무척 평화로워 보였다. 그곳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새소리를 듣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졸음이 밀려왔다.
“환술!”
눈꺼풀이 무거워지려는 찰나 금각 청년은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굳혔다. 은색 자를 횡으로 베어내자 그림자들이 하나로 응결해 거대한 자로 변했다.
콰릉!
불현듯 천둥소리와 바람이 일고 거대한 은색 자가 떨어진 곳에 은색 주술문자들이 꿈틀거렸다. 그러자 주변 공간이 일그러지고 모든 것이 푸른 기운으로 변해 흩어지더니 주변 풍경이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푸른 초원에서 거목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밀림으로 변한 것이다. 잎이 무성한 커다란 나무들 때문에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쿠르릉!
땅이 흔들리고 사방의 거목들이 청년 위로 분분히 쓰러졌다.
“언제까지 환술로 장난을 칠 것인가!”
청년이 사납게 은색 자를 휘둘러 그림자를 분출했다. 은빛이 지나는 곳마다 푸른 환영들이 빛의 점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자 그림자들이 하나로 뭉쳐져 거대 자로 변해 푸른색 빛의 장막을 갈랐다.
‘저건!’
은색 자가 빛의 장막을 가른 순간 엄청나게 밝은 빛이 터져 나와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눈부신 빛이 비추는 동안 은색 자는 은색 환영을 만들고 사라졌다.
한립이 시종일관 명청령안을 발동해 관찰하지 않았으면 속고 말았을 것이다. 은색 자의 환영이 빛의 장막을 공격할 때 한립 머리 위로 진짜 은색 자가 괴이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소리는커녕 미세한 기운도 감지되지 않았다. 은색 자는 지척에 이르러서야 영기의 압력을 노출하고 굉장한 기세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한립의 머리에서 자금색 주술문자로 뒤덮인 금색 손바닥이 나타나 은색 자를 잡아챘다. 은색 자는 부들부들 떨며 처량하게 윙윙거렸다.
펑!
은빛과 자금색 빛이 충돌하며 파문이 일었다.
은색 자는 두꺼운 은색 보호막 속에서 열심히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며 벗어나려 했지만 금색 손바닥이 그것을 움켜쥐고 있어 조금씩 공간이 줄어들었다.
검진 속의 청년은 무슨 신통을 썼는지 환술을 뚫고 한립이 있는 곳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열 받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은색 자를 향해 법결을 날렸다.
콰릉!
은색 자가 느닷없이 은색 뇌전을 분출하며 금색 손바닥을 사정없이 공격했다. 단단한 금색 손바닥도 뇌성이 터질 때마다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나 한립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금빛이 번지고 두 장 크기의 자금색 법상이 떠올랐다. 금신은 보라색 주술문자로 가득했고 자금색 기운을 발산했다. 은색 자를 쥐고 있는 것이 바로 여섯 개의 손 중 하나였다.
세 개의 머리 중 두 개가 입을 벌려 금색 기운을 내뿜었고 은색 뇌전은 금색 기운에 휩쓸려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펑-!
바로 그때 금색 손바닥이 다섯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겨우 버티던 은색 보호막이 조각나고 손가락이 맨몸을 드러낸 순간, 다른 손이 득달같이 날아와 은색 자를 쥐고 있던 손과 맞닿았다.
그사이에 낀 은색 자는 애달피 울며 은빛이 줄어들었다. 그런데 그때 금신 머리 중 하나가 은색 자를 통째로 삼켜버렸다.
금각 청년이 뭔가를 하려 했을 때는 이미 보물과 의식 연계가 끊긴 후였다. 이에 각치족 청년뿐만 아니라 한립도 깜짝 놀랐다.
수행이 늘어난 범성금신이 강력해져 있을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상대의 보물을 잡아채 빼앗을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한립은 차오르는 기쁨을 억누르고 자신의 뒤통수를 건드렸다.
쉭-
검은빛이 그의 머리를 빠져나와 금신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중 하나가 눈을 번득이더니 푸른빛의 장막 속으로 몸을 날렸다. 이어서 한립 역시 입에서 은색 화염을 분출해 빛의 장막 속으로 들여보냈다.
검진 속 금각 청년은 은색 자를 불러들이려고 빠르게 수결을 맺다가 금신과 한립의 모습에 멈칫했다.
청년은 맺고 있던 수결을 풀고 기합을 넣어 등 뒤로 남색의 거대 법상을 불러냈다. 한립의 금신법상 보다 세 배는 컸는데 머리와 사지에 소뿔 같은 굵은 가시가 돋아 있었다.
보기만 해도 살 떨리는 모습이었다.
법상은 두 손에 기괴한 보물을 들고 있었는데 괴수의 머리가 박힌 망치와 새빨간 화염을 분출하는 매끄럽게 생긴 삼각 방패였다.
청년은 한 손으로 기괴한 주술을 맺고 숙연한 표정으로 주문을 외웠다. 결국 한립이 강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경시하는 태도를 버린 것이다.
그러나 한립이 춘려검진에 걸려든 적을 그냥 놔둘 리 없었다. 검진의 푸른색 장막에서 연꽃들이 튀어나와 수많은 연꽃 허상들을 만들어냈다.
별안간 검진 가득 푸른 연꽃들이 꽃망울을 터트렸고, 신기하게도 꽃향기가 자욱하게 퍼져 환영인지 실제인지 헷갈렸다.
그러나 금각 청년은 아름다운 절경에도 현혹되지 않았고 그 안에 숨겨진 살기를 감지했다. 그가 얼굴을 찡그리자 남색 법상이 괴망치를 푸른 연꽃을 향해 휘둘렀다.
망치에 박힌 괴수 머리 세 개가 눈을 번쩍 뜨고 입을 벌리자 하얀색 광풍(狂風)과 새빨간 화염의 물결, 은색 뇌전들이 동시에 튀어나갔다. 바람이 불을 키우고 불이 뇌전을 북돋은 공격들이 삼색의 거대한 물결로 합쳐졌다.
이때 검진 안을 난무하던 푸른빛들도 푸른 검기로 변해 천지를 뒤덮고 삼색 거대 물결과 충돌했다.
괴망치가 보기 드문 보물이기는 했지만 청죽봉운검도 만만치 않았다. 한립의 수행이 크게 늘었고 검진의 보조를 받아 연허기 수준을 초월하는 위력을 내었다.
검기 하나하나가 진정한 비검과 맞먹는 위력으로 폭우처럼 쏟아져 삼색 거대 물결을 밀어붙였다. 금각 청년은 점점 뒤로 밀리는 삼색 거대 물결을 보고 눈빛이 사나워졌다.
이에 남색 법상이 팔을 휘둘러 삼각형 방패를 투척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불 속성 보물인 방패는 허공을 선회해 거대한 불 구름으로 변해 타올랐다.
검진 내부가 화로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불 구름과 괴망치가 뿜어내는 삼색 물결이 금각 청년의 머리 위를 단단히 방어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검기들도 틈을 찾지 못했다. 바로 그때 푸른 법상 뒤로 빛의 장막이 갈라지고 커다란 금색 손이 들이닥쳤다.
거대 손이 닿기도 전에 파공음과 압박감이 밀려들었다. 이에 금각 청년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금색 거대 손이 청년의 머리를 잡아채려하자 빛의 장막에서 은색 불새가 날아들어 은색 화염을 뿜었다. 위기의 상황에도 각치족 청년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주문을 멈추고 입에서 일곱 빛깔의 화염을 분출했다. 일곱 빛깔 화염 속에는 새하얀 종이 떠있었다.
댕!
종소리가 울리고 불가사의한 일들이 벌어졌다. 검진 밖 한립이 그 소리를 듣자마자 의식이 흐릿해져 두 다리를 위로 쳐들고 거꾸로 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검진과 검진 속의 다른 보물들도 이상했다.
“……!”
한립이 대경실색해 몸을 바로 세우고 원래대로 돌아왔다. 종소리가 한 번 더 울리자 검진 전체가 영향을 받아 빛의 장막이 왜곡되며 찢겨나갔다. 푸른빛이 사라지고 허공에 72자루의 비검들이 본모습을 드러냈다.
춘려검진(春黎劍陣)이 삽시간에 파훼된 것이다. 심지어 금신과 은색 불새도 멍하니 제 자리에 떠 있었다. 작은 종은 전설 속의 전도건곤(顚倒乾坤) 신통을 지니고 있었다.
“설마 저 보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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