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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022화 (779/2,000)

1022화. 무너지는 공간

*

한립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원형 단 위를 올려다보았다. 삼두육비 금신이 허공에 뜬 상태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갑작스럽게 너무 많은 경지를 뛰어넘는 탓에 불안정한 수행을 안정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립이 본래 연허기 수사였기에 화를 피한 것이지, 다른 원영이 한순간에 이렇게 많은 경지를 뛰어넘었다면 심마(心魔)에 당해 미쳐 죽었을 것이다.

그래서 제2원영은 한동안 전투를 피해야 한다. 10년 정도 마음을 다스리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심마를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신기한 것은 범성금신(凡聖金身)이었다.

금신은 신비의 힘에 녹았다 응결되었다를 반복하며 자금색 주술문자로 뒤덮였고 발산하는 기운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안 그래도 강력하던 범성금신의 위력이 배로 늘어났다.

그는 가만히 있으려 해도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한 시진 후, 한립은 몸을 바로 하고 가부좌를 틀었다. 그는 여러 가지 약병에서 단약들을 꺼내 입에 넣고 두 손에 비취색 수정돌을 쥔 채 눈을 감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영력이 너무 충만해 죽을 뻔한 그가 이제는 급히 영력을 채우느라 이러고 앉아 있으니 그가 생각해도 무척 우스웠다.

반나절의 시간이 지나갔다.

한립은 약간의 법력을 회복하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잇달아 두 경지를 넘어선 탓에 법력의 양이 대폭 늘어나 영약을 먹고 쉬었는데도 2할밖에는 채워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며칠 동안 쉬고 있을 수만은 없었고, 다행히 제 몸 하나 간수할 정도는 되었다.

한립은 바로 문밖으로 걸어 나가지 않고 원형 단 중심부로 향했다. 금색 원반은 없어졌지만 다른 보물은 가져가야 했다. 눈앞의 비취색 의자가 그중 하나였다.

공중의 금색 원반과 반응해 빛을 방출하고 주술문자를 반짝이던 것을 보면 내력이 있는 물건이 틀림없었다. 한립은 의자를 챙기고 갑옷 병사 중 하나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사실 의자보다 이 꼭두각시들에 더 호기심이 생겼다.

금색 원반이 소실되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꼼짝하지 않았지만 만만하게 볼 물건은 아니었다. 갑옷 병사들이 움직일 때 내뿜던 막대한 영기의 압력을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꼭두각시들은 각각이 합체급 존재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합체급 꼭두각시 아홉을 부린다면?’

한립은 꼭두각시에 의식을 침투시켰으나 곧 표정이 이상해졌다. 꼭두각시의 내부는 초라할 정도로 간단했고 가슴에는 영석이 아닌 괴이한 핏빛 돌멩이가 박혀 있었다.

괴석(怪石)은 표면이 매끄럽고 수많은 금실이 퍼져 반짝이고 있었다. 영기의 빛이 어둑한 것이 기력을 잃기 직전 같았다.

짐작컨대 방금 전의 사건으로 괴석이 함유한 힘의 대부분을 소비했고 앞으로는 기껏해야 한두 번 밖에는 사용하지 못할 듯했다.

한립은 잠시 고민하다 결국 소매를 펄럭여 꼭두각시를 거두려 했다. 그러나 그의 소매에서 뻗어 나간 푸른빛이 갑옷 병사를 감싼 순간, 꼭두각시에서 위험한 기운이 퍼져 나왔다.

흠칫 놀란 한립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잔영을 남기고 뒤로 물러났다. 몇 번 번득인 후에는 원형 단 가장자리로 가 있었다.

그때 아홉 마리 꼭두각시들이 동시에 은색 장창을 휘둘러 옆에 있던 꼭두각시를 갈랐다.

콰쾅!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된 아홉 마리 꼭두각시가 동시에 허물어지며 폭발했다. 결국 원형 단 위에는 꼭두각시 잔해만 수북이 쌓였다. 그러나 한립은 천천히 돌며 꼭두각시 잔해를 전부 챙겼다.

구조는 간단해도 사용한 재료는 처음 보는 것들이라 연구해볼 가치가 있었다. 이제 정말 단 위에는 거대한 성공도만이 남아 있었다.

한립은 하얀 두루마리를 꺼내 높이 던지고 한 손으로 수결을 맺고 주문을 외웠다.

휘릭.

두루마리가 주문 소리 속에서 마구 커지더니 활짝 펼쳐져 원형 단과 비슷한 크기가 되었다.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 열손가락을 연달아 튕겨 하얀 두루마리로 흡수시켰다.

하얀 두루마리가 다채로운 빛깔을 머금고 서서히 하강해 원형 단을 덮었다. 일다경이 지나자 두루마리는 하얀색이 아니라 오색 빛깔로 변해 있었다.

한립의 손짓에 두루마리가 날아올라 순식간에 작아졌고 그 안에는 원형 단 위의 그림이 담겨 있었다. 한립이 비술을 이용해 성공도를 복제한 것이다.

한립은 성공도 속에서 무언가를 알아낼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환술에 대한 이해도만 높아져도 어디인가! 두루마리가 부르르 몸을 떨며 한립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값어치가 있어 보이는 물건을 남김없이 챙기고 주변을 꼼꼼히 살핀 다음 문밖으로 날아갔다. 병풍 속 수미공간에서 하루를 보냈으니 이제 나가야 할 때였다.

쿵!

대청 안에 덩그러니 남아 있던 거대 병풍에서 폭음이 들리고 새까만 빛이 뿜어져 나와 소용돌이쳤다.

푸른 빛줄기가 그 안에서 튀어나와 대청에 착지했다. 한립은 고개를 돌려 병풍을 바라보다 미간의 제3의 요목을 천천히 감았다.

“누군가 연화를 하지 않았으면 가져가 요긴하게 썼을 텐데.”

한립은 병풍을 바라보다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류수아와 석곤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조급한 기색 없이 대청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렇게 오랜 시간 떨어져 있었으니 류수아와 석곤이 궁전 곳곳을 샅샅이 뒤졌을 것이다.

이제 와서 그들을 찾아가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어서 궁전을 떠나 조용한 곳에서 법력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한립이 주전을 빠져나와 류수아와 석곤에게 연락을 취하려는데 갑자기 땅속에서 천둥소리가 울리고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그리고 갑자기 하늘이 어둑해지더니 새까만 먹구름이 몰려와 하늘을 뒤덮었다. 구름 속에서 번갯불이 번득이고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게다가 궁전 곳곳에서 교룡과 같은 회색 돌풍들이 생겨나 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하늘과 땅을 잇는 회색 기둥들이 생겨난 것처럼 보였다. 한립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주변의 천지원기가 엉망으로 흐트러지고 각종 영기의 압력이 난무하는 것이 느껴졌다.

더욱 섬뜩한 일은 주변의 금제 파동이 약해졌다 강해졌다 불규칙적으로 변하며 극히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금제가 통제를 잃기 시작했다는 징조였다.

한립은 날아올라 멈춰 서서 주변을 살폈다. 아직 금제가 완전히 실효된 것은 아니지만 이전보다 훨씬 약해진 상태라 저공비행이 가능했다.

땅은 점점 더 격렬하게 들썩였고 주전 건물은 보랏빛을 머금고 깜빡거렸다.

주전 뒤 누각에서 노란 기운이 솟아올라 궁전 앞쪽으로 날아왔고, 편전에서도 하얀빛이 나타나 같은 방향으로 쇄도했다. 두말할 필요 없이 류수아와 석곤이었다.

그들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만면에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다. 한립도 더는 머뭇거리지 않고 푸른 빛줄기로 변해 주전 앞 광장을 가로질러 궁전 문밖의 산길로 뛰어들었다.

산길 계단의 강력한 흡인력이 아직 남아 있을까 조금 걱정했는데 이곳의 이변 때문인지 아니면 산을 오를 때만 작용하는 것인지 발동되지 않았다.

푸른 빛줄기가 쏜살같이 계단을 따라 산 아래로 내려오고 석곤과 류수아의 도 차례로 내려왔다.

“이게 뭔 일이랍니까! 어째서 갑자기 붕괴하는 것인지……. 막 귀한 보물을 손에 넣기 직전이었습니다!”

석곤이 열이 받아 씩씩거렸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을 들여 밀실의 금제를 깨고 들어가려는데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요.”

류수아도 썩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말을 하면서 시선이 한립을 향해 있었다.

“저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저도 방금 전에야 공간금제를 빠져나왔는데 언제 이런 일을 벌인단 말입니까?”

한립이 정색하고 부인했다. 자신이 한 일도 아닌데 괜히 흙탕물을 뒤집어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나중에 계속하시고 일단 이곳을 떠나죠. 공간이 무너져 내리면 우리도 꼼짝없이 말려들 겁니다.”

석곤이 무어라 말하려는데 류수아가 과감히 말을 끊었다.

세 사람은 둔광을 발산하며 날아올라 훨씬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몇 호흡 만에 전송진이 있는 곳에 도착한 그들은 바로 진법을 발동했다.

우웅!

하얀빛이 퍼지고 세 사람의 신형이 사라졌다.

푸른빛이 고공으로 날아오르고 한립이 모습을 드러냈다. 류수아와 석곤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떠있었다. 그들은 말없이 아래의 거대한 동굴을 내려다보았다.

동굴은 영기의 빛이 수축했다 팽창했다하면서 광포하게 요동쳤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 같아 보였다.

“가시죠, 이곳은 오래 머물 곳이 못됩니다. 공간이 붕괴되면 공간 소용돌이가 형성되어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겁니다.”

한립이 무표정하게 할 말을 마치고 먼저 쾌속으로 날아갔다. 석곤과 류수아도 긴장한 얼굴로 그 뒤를 바짝 쫓았다.

꽤 멀리까지 날아갔는데도 뒤에서 경천동지할 굉음이 들려왔다. 대량의 영기가 급속히 압축되어 거대한 압력을 만들어냈다.

한립 일행이 입구에 펼쳐 놓은 금제들이 찢겨지고 바람기둥이 지하에서 솟아올라 휘몰아쳤다. 동시에 입구를 중심으로 그 일대가 공간 파동으로 뒤덮였다.

멀리 떨어진 한립 일행도 그 파괴적인 힘을 느끼며 표정이 달라졌다. 공간 내부에 남아 있었다면 흉흉한 일을 당했을 것이다.

“각치족 수사들이 이곳으로 몰려옵니다!”

돌연 류수아가 소리쳤다.

“우리의 존재를 발견하고 비술로 위치를 특정해 쫓고 있습니다. 당장 흩어져 달아나시죠. 이곳에서 중요한 일을 도모하고 있었으니 우리를 절대 살려두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립도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어두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제 임무도 완수했으니 지금이 바로 흩어질 때였다.

“그렇다면 먼저 가보겠습니다!”

“한 형, 몇 달 후에 운성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석곤이 포권을 하고 먼저 날아가고, 류수아 역시 가볍게 웃으며 은색 통나무배를 꺼내 던졌다.

여인이 통나무배를 키워 사뿐히 올라타자 허공에서 오색 빛이 번득이며 그녀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날개 달린 작은 담비였다. 영수를 안은 여인은 즉시 발밑에서 은빛을 뿜어 통나무배를 출발시켰다.

한립 역시 등 뒤로 수정 날개 한 쌍을 펼쳐 청백색 실로 변해 튀어 나갔다. 몇 번 번득인 후 하늘 끝에서 나타났다. 바로 그때 파공음이 울리고 하얀 뱀이 나타나 청백색 실 속으로 합류했다.

잠시 느려졌던 실은 전속력으로 날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 * *

얼마 후, 다른 쪽 하늘에서 열댓 개의 둔광이 바람처럼 날아들었다. 둔광이 가시고 나타난 것은 각치족 수사들이었다.

금각 청년이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눈치가 빠른 놈들이군요. 대사를 도모하는데 누군가 곁에서 훔쳐보고 있었다니. 가만둘 수 없지요! 금제가 발동하지 않았으면 모르고 지나칠 뻔했습니다. 냉한, 백과 수사가 중심이 되어 두 명을 쫓고 마지막 인물은 제가 쫓겠습니다.”

“촉서 특사, 걱정하지 마십시오. 확실히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청년의 말에 사내 하나와 여인 하나가 나서서 대답했다. 사내는 큰 체격에 피부에 비늘이 돋아나 있고 머리에는 남색 뿔이 솟아있었다. 그리고 여인은 호리호리한 몸에 하얀색 작은 뿔이 보였다.

그들은 각각 세 사람씩 골라 무리를 지었다.

“나머지도 냉 수사, 백 수사와 함께 가시면 됩니다. 저는 혼자로 충분합니다.”

청년이 남아 있는 네 사람을 보고 명령을 내렸다.

“그런…….”

“제가 보물을 지니고 있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현천법기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겨우 상족 수사가 상대나 되겠습니까?”

다른 수사들이 만류했지만 금각 청년은 오만한 얼굴로 그들의 말을 막았다. 촉서라 불린 금각 청년의 말에 나머지 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냉한과 백서 뒤쪽으로 가서 섰다.

각치족이 여섯 명씩 무리를 지어 수아와 석곤이 달아난 쪽으로 날아갔다. 이제 남은 것은 금각 청년뿐이었다. 그는 냉랭한 눈빛으로 한립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가 영수대를 건드리자 노란빛이 번득이고 샛노란 도마뱀 괴수가 나타났다. 다리가 여섯 개에 등 뒤로 커다란 날개가 두 쌍이나 달린 괴수는 굉장히 거대했고 흉측했다.

금각 청년은 거대 도마뱀에 풀쩍 뛰어올라 손바닥 위에서 핏빛 달팽이를 불러냈다. 나선형 껍데기 속에 몸의 절반을 감추고 느릿느릿 기어가는 모습이 무척 기이했다.

달팽이는 금각 청년이 붉은 단약을 입속에 넣어준 후에야 정신을 번쩍 차리고 두 개의 촉수를 기민하게 움직였다.

금각 청년이 주문을 외자 달팽이 촉수가 기다랗게 자라나 한립이 사라진 방향으로 눈부신 붉은 빛을 발산했다. 청년의 발길질에 육족(六足) 도마뱀이 두 쌍의 날개를 펄럭였다.

노란 모래바람이 일며 괴수와 청년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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