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8화. 병풍 속 세상
*
호리병박은 류수아와 석곤 사이에 떠서 움직임이 없었다.
“영약을 담아 두는 용기 아니면 금속 속성 보물로 보입니다. 호리병박 자체에도 어느 정도 신통이 있고 안에 이름 모를 비검들을 몇 개 품고 있군요.”
“한 형의 말씀대로면 상고시대에나 있던 ‘호중검(葫中劍)’이겠네요. 뇌명대륙에서는 제련법이 실전된 지 오래인데 여기서 보게 되다니 신기합니다. 석 수사, 제가 먼저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류수아가 석곤을 향해 웃음 지었다.
“하하, 제가 어찌 이런 일로 불평을 하겠습니까. 선자께서 먼저 설펴보시지요.”
석곤은 아무 상관없다는 얼굴이었다. 그 말에 류수아는 금색 호리병박을 끌어와 자세히 살펴보다 고개를 저으며 석곤에게 넘겨주었다. 그녀의 행동에 이미 실망한 거한은 달갑지 않은 얼굴로 호리병박을 들고 살폈다.
“꽤 위력적인 보물입니다. 어찌 처리하면 좋을까요?”
석곤이 탄식하며 뭔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류수아가 한립을 향해 눈짓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사부님과 단 선배님이 원하시는 보물이 아니니 잠시 한 형이 보관하다 나중에 나누는 것이 좋겠습니다.”
석곤도 주춤거리지 않고 그냥 한립에게 보물을 넘겼다.
“저도 동의합니다. 나중에 똑같이 나누면 되지요.”
“두 분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일단 맡아 두겠습니다.”
한립은 소매를 털어 금색 호리병을 챙기고 한 손으로 수결을 맺어 허천정에서 다른 물체를 꺼냈다. 이번에는 금색 주술문자가 반짝거리는 푸른 옥함이 등장했다.
옥함의 등장에 류수아와 석곤은 정신을 번쩍 차리고 눈을 떼지 않았고 한립은 영력을 불어넣어 뚜껑을 열었다.
옥함 안에는 달걀 크기의 작은 말 두 마리가 눈을 감고 누워있는데 짙은 약향이 코를 찔렀다. 정순한 영기가 담겨 정신을 맑게 해주는 향이었다. 작은 말들은 진작 숨이 끊긴 듯싶었다.
한립이 남색빛을 반짝여 푸른빛을 쏘아 보내자 두 마리 말이 옥함에서 떠올라 류수아와 석곤 쪽으로 날아갔다.
“두 선배님들께서 언급하셨던 응취초(凝翠草)입니다. 이미 화형을 했으니 선배님들께도 쓸모가 있겠지요. 하나씩 보관하시면 되겠습니다.”
한립의 말에 류수아와 석곤이 희색을 드러냈다. 기다리던 영약이 아니라 조금 실망했지만 한립이 싫은 내색 없이 진귀한 영초를 나누어주자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석곤이 웃음을 터트리며 인사를 하고 청록색 말을 끌어당겨 챙겼고, 류수아도 꼼꼼하게 확인하고는 응취초를 소매 속에 넣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중의 옥함을 허공에 띄워 속이 텅 빈 것을 보이고 다음 보물로 넘어갔다.
이번에 허천정에서 꺼낸 물건은 육각형 법기와 금색 보탑(寶塔)이었다. 둘 다 굉장한 위력을 지닌 보물이라 한립이 잠시 보관하고 나중에 나누기로 했다.
다음으로 허천정에서 나온 재료는 채류앵과 단천인이 지목했던 것이라 한립이 류수아와 석곤에게 공평하게 분배했다.
이때부터 류수아의 눈빛이 흔들렸고 석곤도 조바심에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직까지 허령단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다른 보물을 많이 가지고 가도 가장 중요한 허령단을 취하는데 실패하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웅.
푸른 솥이 맑게 울며 푸른 실에 감긴 보물을 뱉어냈다. 푸른 실이 사라지고 나타난 자금색 병은 거울처럼 표면이 매끄럽고 하얀 기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작은 병이 내뿜는 놀라운 기운에 석곤 눈을 크게 떴고, 류수아의 눈빛도 달라졌다. 한립만이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하지만 곧 턱을 쓸어내리며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휙!
뚜껑이 날아가고 작은 병이 뒤집어져 황금색 화염을 분출했다. 화염은 맑게 지저귀며 허공을 선회해 황금 불새로 변했다.
황금 불새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한립은 새하얀 손을 튕겼다. 그의 손끝에서 오색 한염들이 연달아 튀어나가 금색 불새를 공격했다.
오색 한염에 공격당한 황금 불새는 애달피 울며 원모습인 황금색 단약으로 돌아갔다. 작은 단약에는 빼곡하게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조금 전 불새로 변했을 때의 휘황찬란한 황금빛을 띄고 있었다.
“분명 허령단입니다.”
단약의 원형을 보며 류수아가 크게 기뻐하며 소리쳤다. 석곤도 흥분을 드러냈지만 무언가를 떠올리고 한립을 향해 물었다.
“한 알뿐입니까?”
한립은 대답대신 바로 자금색 작은 병에 기운을 쏘아 보냈다. 그러자 병 입구에서 금빛이 반짝이고 황금 불새가 날아올랐다.
“더 있군요!”
그것을 본 석곤의 얼굴이 밝아졌다.
“선배님들이 원하시던 허령단이 마침 두 알입니다. 하나씩 나눠드리면 되겠지요?”
한립이 가볍게 미소 지으며 두 수사를 향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류수아와 석곤이 눈빛을 교환했다. 여인의 시선은 냉랭했고 거한의 얼굴은 신중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야겠습니다. 사부님께서 허령단을 구하는 대로 전부 가져오라 명을 내리셨지만, 류 선자께서 물러날 생각이 없으시니 어쩌겠습니까.”
주저하던 석곤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그리 하겠습니다. 맨 손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사부님께 면목이 설 것이고요.”
류수아도 냉랭한 눈빛을 풀고 동의했다. 둘 다 반대하지 않자 한립이 허공의 단약을 향해 손을 뻗었다.
휙! 휙!
황금색 단약이 류수아와 석곤에게 하나씩 날아갔다. 그들은 그것이 허령단이라고 확신하면서도 천천히 감별을 했다. 그만큼 중요한 물건이었다.
류수아는 중얼중얼 주술을 외며 다양한 법결을 던져 넣었고, 석곤은 단약을 쥐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장장 일다경이 지나서야 확인을 마친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령단을 구하기까지 한 형의 도움이 컸습니다.”
류수아가 약병에 단약을 넣으면서 빙긋 웃어 보였다.
“두 선배님께 보상받은 만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 겸양하실 것 없습니다. 그런데 병 안에 단약이 남은 것은 아니겠지요?”
석곤이 단약을 챙기고 아직 허공에 떠있는 자금색 약병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 말에 류수아도 눈을 반짝였다.
“이제 보니 욕심도 많으십니다, 석 형. 허령단이 더 들었는지 직접 확인해 보시지요.”
한립이 웃음을 흘리며 자금색 작은 병을 석곤에게 날렸다. 이에 석곤은 불만스런 기색을 읽었지만 허령단과 관련한 일이라 소홀할 수 없어 병을 의식으로 훑었다.
병 안은 텅텅 비어있었다.
“흠…….”
석곤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스치며 고개를 들어 삿갓 여인을 돌아보았다.
“류 선자께서도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한 형과 석 형께서 확인하셨는데 착오가 있을 리 없지요. 저는 두 분을 믿습니다.”
그녀의 말에 석곤도 딱히 할 말이 없어 멋쩍게 웃으며 한립에게 병을 돌려주었다. 한립은 담담히 푸른 기운을 보내 자금색 병을 거두어들였다.
이후 허천정에서 꺼낸 재료는 영계에서 거의 멸종된 것으로 전부 채류앵과 단천인이 원하던 것이라 류수아와 석곤이 하나씩 가져갔다. 결국 세 개의 이보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류수아와 석곤이 똑같이 나눠가진 것이다.
푸른 솥 안에는 더 이상 남은 물건은 없었다. 석곤도 금빛 덩이가 몇 개 안되는 것을 보아서 이번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한 형, 보관하고 계신 보물들은 사부님과 단 선배님이 필요로 하는 물건이 아니니 이제 우리끼리 나누면 됩니다.”
허천정을 회수하기를 기다렸다가 류수아가 웃으며 이야기를 꺼냈다.
“하하, 마침 보물이 세 개라 하나씩 가지면 딱이군요. 한 형께서 수고하셨으니 사양하지 마시고 먼저 고르시지요.”
석곤이 호탕하게 말했고 류수아가 움찔했다가 아무렇지 않게 웃음을 머금고 동의했다.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금색 호리병박, 보탑, 육각형 법기는 육안이나 의식으로 간단히 살펴서는 정확한 신통과 위력을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선심을 쓴다한들 손해라 할 수 없었다.
“두 분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저는 이미 골랐으니 나머지 두 개는 어찌 하실 것입니까?”
한립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고 소매 속에서 금색 보탑과 육각형 법기가 빠져나왔다. 그가 챙긴 것은 호리병박이었다. 류수아와 석곤은 의아했지만 나머지 보물을 두고 고르느라 금방 잊어버렸다.
“저는 보탑으로 하겠습니다. 석 형만 괜찮다면요.”
“좋습니다. 제가 남은 것을 가져가겠습니다.”
여인이 먼저 선택을 마쳤고, 거한이 잠시 멈칫하다 그녀의 제안에 응했다.
“감사합니다.”
류수아가 금색 보탑을 향해 손짓해 끌어들였고 석곤도 육각형 법기를 가져갔다. 셋 다 보물을 하나씩 얻게 되어 기분이 유쾌했다.
“제가 이 금 솥을 가져가는 것을 말릴 분은 없겠지요. 제게는 나름 쓸모가 있는 물건이라 서요.”
그때 석곤이 금색 솥 앞으로 걸어가 금 솥을 축소해 손에 들었다. 상대의 예기치 못한 행동에 한립이 살짝 미간을 찡그리려다 말았다.
“원하신다면 저는 막지 않겠습니다. 류 선자께서 동의하시면 가져가시지요.”
“솔직히 중요한 물건을 보관하기에 굉장히 좋은 보물이라 저도 탐이 났지만, 석 형이 한 발 앞서 챙기셨으니 다툴 생각은 없습니다.”
류수아가 아쉽다는 눈길로 금 솥을 보았으나 석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금 솥을 챙겼으니 빼앗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석곤이 흐뭇하게 웃으며 금 솥을 챙기다 한립이 병풍을 살펴보는 것을 발견했다.
“뭐라도 있습니까?”
“평범한 물건은 아니군요.”
그 말에 석곤은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의 의식을 집어삼킨 병풍이 당연히 평범한 물건일 수 없었다. 그는 구체적인 것을 알고 있는지 물어본 것인데 한립이 모호하게 넘어가버린 것이다.
석곤은 더 파고 들기도 멋쩍어 다양한 비술을 써가며 병풍을 살펴보았다. 류수아도 조용히 병풍 앞에 서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때 한립이 뜬금없이 병풍 뒤로 이동해 열 손가락에서 다양한 색깔의 법결들을 빽빽하게 쏘아 보냈다.
그것을 본 석곤과 류수아가 놀라 하던 일을 멈추고 멍하니 쳐다보았다. 한립의 미간에서 검은 기운이 맴돌고 새까만 눈이 나타났다. 그러자 검은 빛기둥이 빠져나가 병풍으로 흡수되었다.
우웅!
병풍에서 일곱 빛깔의 기운이 흘러나와 한립을 번개처럼 휘감고 사라졌다. 병풍 뒤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석곤과 규수아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병풍 뒤로 갔을 때는 푸른빛의 장막 속에 보라색 고대 문자가 떠올라 있었다.
“병중동천(屛中洞天).”
류수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천천히 글자를 읽었다.
* * *
같은 시각, 한립은 기괴한 공간 속에 있었다.
잿빛의 공간에는 우뚝 솟은 거대한 검은 문만이 또렷하게 보였고, 문 위쪽으로는 금은색 주술문자가 촘촘히 박혀 무척 신비해 보였다.
눈앞의 문은 병풍 그림 속 거대한 문과 생김새가 똑같았다. 마치 병풍 안으로 빨려 들어온 것 같았다.
“수미동천과 비슷한 공간이로구나.”
한립은 주위를 살피다 손바닥을 뒤집어 다채로운 빛깔의 진법 원반 한 벌을 뿌렸다.
파앗.
빛구슬로 변해 가라앉은 원반들이 지면 속으로 스며들었다.
잠시 후, 짙은 안개의 벽이 진법 원반들이 사라진 곳에서 솟아올라 한립과 거대한 문을 전부 가려버렸다. 안개 벽 한쪽에서 한립이 비로소 긴장을 풀고 허천정을 불러냈다.
솥을 가리키자 뚜껑이 날아가고 하얀 그림자가 빠져나와 여자아이로 변했다.
“공자를 뵙습니다.”
곡아가 예를 올리고 빙그레 웃었다.
“아주 잘했다. 솥 안에서 전혀 기운을 노출하지 않았어. 다른 이들은 물론이고 네가 숨어있다는 것을 아는 나조차 깜빡 속을 정도였다.”
한립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곡아를 칭찬했다.
“주인님께서 내주신 보물과 부적 덕이지요! 안 그랬다면 제 수행에 어찌 연허기 수사들을 속일 수 있었겠습니까.”
곡아가 검은 손수건과 보라색 태일화청부를 꺼내 두 손으로 바쳤다.
“돌려 줄 것 없다. 네가 본래 둔술과 은신술에 뛰어났기에 두 보물을 잘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따로 쓸 만한 보물이 있으니 네가 지니고 있거라.”
“예, 알겠습니다.”
한립의 말에 곡아가 검은 손수건과 부적을 몸에 가져다 대자 보물들이 몸속으로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