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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015화 (772/2,000)

1015화. 속수무책

*

영계에서 식독초는 백만 년 전에 멸종된 귀한 영초였고, 이름 그대로 극독을 품고 있어 합체급 이상의 수사도 모르고 복용하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영초의 가지와 뿌리 그리고 과실에 함유된 독이 열댓 가지 최상급 영약을 제련하는데 꼭 필요한 재료였다. 그중 몇 가지 영약은 복용하면 합체급으로 수행을 올려주는 굉장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영계에서는 식독초를 무분별하게 채취해 이미 멸종이 되지 않았던가!

이 영초는 영계 수도자들이 옮겨 심어 대량으로 재배하기 어려웠다. 무슨 수를 쓰든 일단 환경이 달라지면 몇 년 지나지 않아 썩어 검은 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마구 뽑기만 하고 재배하지 못하자 몇 만 년 만에 식독초는 멸종되었고 그 후로 영계에서 이 영초를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그런 식독초들이 눈앞에 7, 80그루나 심어져 있었다.

이것으로 영약을 제련하면 확실히 그 약성을 3할은 높일 수 있었다. 한립은 머뭇거리지 않고 저물탁을 찬 손목을 털어 푸른 기운을 불러냈다.

우웅!

푸른 기운이 번지며 약재밭 허공에 3, 40개의 옥갑들이 다양한 색의 빛을 머금고 떠올랐다.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나오거라.”

“예, 공자!”

한립의 명에 앳된 목소리가 즉시 답하며 튀어나와 예닐곱 살 여자아이로 변했다. 지선의 도움으로 사람의 모습을 하게 된 곡아였다. 곡아는 공손히 예를 올리고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전에 보니 네가 영초들을 순식간에 채취하더구나. 나를 도와 이곳의 영초들을 전부 옥갑 속에 담아 주겠느냐?”

“예!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한립의 명에 곡아가 고분고분 답하고 날아올랐다. 하얀빛을 번득이고 약재밭 상공에 나타난 아이는 열손가락을 튕겼다.

쉬쉬쉬쉭!

곡아의 손끝에서 벽옥색 실들이 튀어나가 열 그루의 영초들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끌어올리자 옥색 실들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영초들을 뿌리까지 뽑아냈다.

신기하게도 잔뿌리까지 모두 뽑았는데도 흙이 하나도 묻어있지 않았다. 누군가 정성들여 영초를 뽑아 다듬어 놓은 것 같았다. 벽옥색 실들은 영초들을 옥갑으로 이끌었고, 곡아의 손은 쉼 없이 움직였다.

영초들은 열 그루씩 뽑혀 나와 빠르게 옥갑에 담겼다.

곡아는 순식간에 세 개의 밭 중 하나를 끝내고 다음 밭으로 넘어갔다.

이때 한립은 다른 쪽으로 걸어가 그곳의 영초들을 살펴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에는 열댓 그루에서 50그루 정도로 비교적 소량의 영초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중 절반은 인계와 영계의 경전에서도 본 적이 없는 것들이었고, 그가 알아본 영초 역시 대단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식독초처럼 영계에서 이미 멸종된 영초와 찾기 어려운 희귀한 영초들도 있었고, 몇 가지는 청원자가 구해오길 바라던 영초도 있었다.

한립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직접 몸을 굽혀 소량의 영초들을 조심스럽게 채취해 옥갑에 담았다.

그가 영초를 다 담았을 때는 곡아가 진작 할 일을 마치고 조용히 옆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립은 대량으로 재배 중이던 세 가지의 영초가 전부 옥갑에 담긴 것을 보고 기뻐하며 곡아를 칭찬했다. 그의 칭찬에 곡아의 두 눈도 초승달처럼 변하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는 눈에 보이는 영초들을 모조리 거두고 시선을 약재밭 한쪽 구석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열댓 개의 공간이 있었다.

그 안에는 영초, 영목(靈木)과 영화(靈花), 샘물이 있었다. 꽤 넓은 샘물 위로 은빛 찬란한 연꽃의 열매가 든 연방(蓮房)이 떠있는 것이 퍽 신비했다.

그는 따로 재배중인 영초를 일일이 확인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약재밭 주인이 따로 심어 관리할 정도면 굉장히 귀할 것일 텐데 청록색 과실이 맺힌 나무와 동시에 13가지 색을 내는 기이한 꽃까지 어느 것 하나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추측컨대 영계에서는 본래 자라지 않는 선계 고유의 영초 같았다. 그렇다면 일단 챙겨 두고 연구해봐야 쓰임새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중 두세 가지만 용도를 알아내도 엄청난 수확이었다.

한립은 하얀 옥갑과 작은 옥 삽을 불러냈다. 옥으로 만들어진 삽이 청록색 과실이 달린 나무쪽으로 날아가 지면을 파고들려 했다.

탱!

초록빛이 반짝이더니 삽이 마찰음을 내며 튕겨 나왔다. 이에 움찔하며 다시 법력을 북돋아 삽을 움직였다. 그러나 바람을 휘날리며 날아간 옥 삽이 다시 사정없이 튕겨 나왔다.

한립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조금 전 영목만 확인하느라 울타리 안의 흙은 주의 깊게 살피지 않은 것이다. 그는 곧바로 명청령안을 발동해 지면을 내려다보았다.

놀랍게도 영목 주변에 수많은 금실이 섞여 있었다. 정순한 금속 속성 영기가 응결된 금실이었다.

영목을 재배하는데 금속 속성 영기가 필요해 이렇게 해놓은 것인지 아니면 보호하기 위해 이렇게 해놓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립은 잠시 고민하다가 회색 기운을 불러내 영목 뿌리로 날려 보냈다. 원자신광은 오행의 힘을 억제했기에 정순한 금속 속성 영기에 방해받지 않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금실들은 회색 기운을 곱게 통과시키지 않고 금색 그물을 형성해 막았다. 원자신광이 세차게 밀려들어도 단시간에 금색 그물을 뚫고 들어가지는 못할 듯싶었다.

한립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그는 신중한 얼굴로 새까만 손바닥을 꿈틀거렸고 손등에 작은 산 허상이 맺혔다. 손바닥에 회색 기운이 응결해 진득진득한 액체처럼 변해 날아갔다. 원자극산의 힘을 빌려 원자신광의 위력을 극대화한 것이다.

그러자 흙속의 금속 속성 영기가 드디어 버티지 못하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한립은 다시 옥 삽을 날려 영목 아래를 둥그렇게 파냈다. 옥 삽이 그의 소매 속으로 돌아가고 파낸 부분에 푸른빛이 피어올라 영목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한립의 표정이 풀어지며 점점 미소가 떠올랐다.

화륵!

그런데 영목 뿌리가 흙을 벗어나는 순간, 갑자기 나무줄기 표면에 녹색 화염이 피어올라 불타올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나무줄기는 물론이고 과실까지 푸른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한립은 어안이 벙벙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 후 한숨을 쉬고는 텅 빈 울타리 안을 우울하게 바라보다가 기이한 꽃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꽃 아래에는 금제가 펼쳐져 있지 않아 옥 삽이 가뿐하게 땅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꽃이 흙에서 뽑혀 나온 순간, 녹색 액체로 변해 떨어져 내렸다.

이에 경험이 많은 한립도 정말 당황스러웠다. 그는 녹색 액체가 스며든 땅을 바라보다 다음 울타리로 걸어갔다.

이후 다른 세 종류의 영초들도 뿌리가 땅을 떠나자마자 시들어버리거나, 말라비틀어져 가루가 되거나 뇌전이 번뜩이며 타올라 사라졌다.

눈앞에서 다섯 종류의 귀한 영초가 자멸하는 것을 지켜보던 한립은 우두커니 서서 생각에 잠겼다. 분명 무언가가 있었다.

영초가 옮겨 심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약재밭 주인이 손을 써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13가지 색을 띄는 꽃을 앞에 두고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의식으로 별다른 점을 찾지 못했으니 이제 믿을 것은 명청령안 뿐이었다. 남색빛을 날카롭게 번뜩이며 뿌리부터 꽃잎파리까지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꼼꼼하게 관찰해도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약재밭 주인이 펼쳐 놓은 금제를 찾을 수 없다면 파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립은 그냥 물러나기가 너무 아쉬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나 일다경이 지나서야 한숨을 푹 쉬고 중얼거렸다.

“뿌리가 흙을 떠나자마자 사라지게 해두었다면 금제가 뿌리 부분에 펼쳐져 있을 확률이 높겠지. 이렇게 하면 온전히 가져가지는 못해도 과실과 종자는 보존할 수 있을 거야.”

한립은 옥함을 화려한 꽃에 던지고 새하얗게 변한 손으로 허공을 갈랐다. 날카로운 검실이 꽃송이 아래 줄기를 베어내는 동시에 오색 화염이 나타났다.

꽃은 잘려나간 동시에 오색 얼음덩어리 속에 봉인되었고, 그대로 옥함 속으로 떨어졌다.

한립은 여러 부적을 꺼내 옥함에 붙이고 소매 속에 넣어 두었다. 검실을 분출해 꽃송이를 옥함에 넣기까지의 과정이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는 잠시 꽃나무를 바라보다 서둘러 다른 울타리를 향해 걸어갔다. 나머지 울타리 속의 영초들도 전부 같은 방법을 써서 모아 두었다.

과실이나 종자를 검실로 잘라내 오색화염으로 얼린 다음 부적을 이용해 봉인해 버린 것이다. 그 덕에 영초의 아랫부분은 자멸하지 않고 남아 있었다.

문제는 마지막 영초였다. 샘물 위에 떠 있는 연꽃 열매 연방을 베어내려는데 은빛이 폭발하며 검실을 튕겨냈다. 연방에는 티끌만한 흠집도 보이지 않았다.

연방을 관찰하던 한립이 미간을 좁히고 열손가락을 튕겼다. 열손가락에서 푸른 실이 뿜어져나가 은색 연꽃 줄기를 베어냈다. 그러나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은색 연방이 밝은 빛을 분출해 푸른빛과 충돌했다. 은빛과 푸른빛이 동시에 사라지는 것을 보고 한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대체 연방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런 역천의 능력을 지녔단 말인가.

청죽봉운검이 변한 검실은 합체기 수사라도 맨몸으로 견디기 어렵다. 그런데 눈앞의 연방은 검실을 튕겨내다 못해 빛을 뿜어 반격했다.

한립의 시선이 연방이 떠있는 샘물로 향했다. 하얀 영기가 피어오르는 것으로 보아 평범한 샘물은 아니었다.

샘물 아래쪽에는 연근들이 은빛으로 반짝였는데, 특이하게도 연근의 잔뿌리들은 샘물 아래쪽 지면에 박혀 있지 않고 둥실 떠있었다.

“그렇다면…….”

한립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커다란 남색 옥병을 불러내 여러 진법 깃발들을 샘물 사방으로 쏘아 보냈다. 진법 깃발들이 샘물 주변 허공으로 사라지고 곧 열댓 개의 빛기둥들이 솟아올랐다.

빛기둥들은 다양한 색의 영기와 주술문자를 품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한립은 지체 없이 손가락을 튕겨 법결을 날렸다. 샘물 주변에 남색 빛의 점들이 나타나 농염한 물 속성 영기를 뿜었고, 조용하던 샘물에 파문에 일었다.

한립은 서늘하게 눈을 빛내며 커다란 남색 옥병을 가리켰다.

휘릭!

옥병 안에서 남색 기운이 흘러나왔고 열댓 개의 빛기둥은 동시에 윙윙거리며 격렬한 금제의 파동을 내뿜었다. 허공의 남색 빛의 점들과 남색 기운들로 샘물이 완전히 뒤덮였다.

쾅!

굉음과 함께 샘물이 은색 연방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쳤다. 법결을 쏘아대던 한립의 손이 바빠졌고 주술소리가 더욱 커졌다.

샘물 소용돌이가 연방을 휘감아 수룡(水龍)처럼 치솟았고 결국에는 남색 옥병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수면에 떠있던 연방과 연잎 그리고 샘물 속 연근까지 전부 빨려 들어간 것을 보고 한립은 옥병을 회수했다.

의식으로 옥병 안을 확인하자 샘물 안의 연근부터 은색 연방까지 모두 멀쩡하게 잘 담겨 있었다.

한립은 쾌재를 불렀다. 이제야 연달아 영초들을 망친 울적함이 가시는 것 같았다. 그는 남은 시간동안 약재밭 구석에 있는 잡다한 영초까지 모두 채집했다.

이것이 이곳에서는 별것 아니어도 영계에서는 굉장한 가치를 지녔을지도 모른다. 그는 곡아를 불러들이고 다시 한 번 약재밭을 한 번 둘러보았다.

그리고 성큼성큼 바깥으로 걸어갔다. 그가 막 문을 나서는 데 주전 방향에서 콰르릉 소리가 울리며 강력한 영기의 파동이 느껴졌다.

‘쯧쯧…….’

한립은 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석곤과 류수아가 광장의 환술에 실컷 골탕을 먹다 참지 못해 완력으로 금제를 깨부순 것이 틀림없었다. 이 정도 영력 파동이면 광장 환술도 깨져나갔을 것이다.

자신의 수행을 초월하는 비술이나 보물을 사용하지 않고는 낼 수 없는 위력이었다. 한립은 나머지 두 개의 편전을 힐끗 쳐다보고 주전 방향으로 빠르게 내달렸다.

콰릉!

잠시 후, 주전 앞에 이른 그는 주전 대문에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석곤이 열댓 걸음 물러나는 것을 보았다.

들고 있던 거대한 쌍망치는 보랏빛 뇌전 속에 녹아 손잡이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석곤은 놀란 얼굴로 보라색 뇌전 뱀들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가 다른 방법을 쓰기 전에 뒤쪽에서 류수아가 나섰다. 그녀는 은색 거울에서 푸른 빛기둥들을 뿜어 보라색 뇌전을 잠시 막아주었다.

그 틈에 석곤이 옆으로 물러났고, 푸른 빛기둥이 보라색 뇌전을 버티지 못하고 산산이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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