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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014화 (771/2,000)
  • 1014화. 약재밭

    *

    보라색 빛구슬이 검은 산봉우리에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그것을 본 한립의 입꼬리가 휘었다.

    원자극산의 위력은 원자신광이 전부가 아니었다. 갑자기 그의 손바닥에서 푸른빛이 반짝이더니 은색 주술문자들이 날아올라 빙글빙글 회전했다. 주술문자들이 소용돌이처럼 검은 구멍을 허공에 만들고 원자극산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보라색 뇌전구슬은 검은 구멍들을 그대로 통과해 버렸다.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것 같았지만 한립은 똑똑히 보았다. 검은 구멍을 통과하는 순간 보라색 뇌전구슬의 3분의 1이 사라졌다. 크기가 줄어든 뇌전 구슬이 검은 산봉우리에 부딪혀 경천동지할 소리를 냈다.

    보라색 뇌전 구슬에서 츠츳! 하는 소리가 들리고 보라색 뇌전 뱀 두 마리가 거대한 산을 빙 돌아 한립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바깥의 보호막들은 보라색 뇌전 뱀을 전혀 막지 못하고 연달아 사라졌다. 이에 한립은 눈썹을 끌어올리고 앞을 향해 손을 저었다. 그러자 금빛 뇌전 그물이 천둥소리를 내며 양쪽의 보라색 뇌전 뱀을 향해 날아갔다.

    쩡!

    바로 그때 무언가 깨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옆으로 물러난 한립은 오색 보호막이 은색 불새의 공격에 드디어 완전히 허물어지는 것을 보았다.

    동시에 금색의 뇌전과 겨루던 보라색 뇌전이 갑작스레 폭발해 주위를 보랏빛으로 물들였다. 폭발의 여파로 보라색 뇌전을 머금은 엄청난 돌풍이 불어 한립도 하마터면 휘말릴 뻔했다.

    콰쾅!

    한립의 주위를 맴돌던 검은 주술문자들이 터져 검은 기운으로 변해 보라색 뇌전과 같이 자폭했고 그의 등 뒤로 삼두육비의 금색 허상이 솟아올라 두 팔을 마구 휘둘렀다.

    금빛들이 여섯 개의 손바닥에서 튀어나가 돌풍을 잠재웠다. 그리고 천외마갑 표면의 날카로운 가시에서 새까만 빛기둥들이 분출되었다. 돌풍은 엄청난 기세의 반격에 연기처럼 흩어졌다.

    한립이 다시 약재원을 향해 몸을 날렸을 때, 자금색 기둥은 대량의 기운을 쏟아내 흩어졌던 보호막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이에 한립은 오색 기운에 휘말리고 말았다.

    천둥소리가 울리고 기둥에서 튀어나온 보라색 뇌전들이 보라색 뱀처럼 변해 한립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지만 오색 기운에 주변 공기가 얼어붙어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순식간에 당황한 기색을 지우고 도리어 서늘한 눈빛을 던졌다.

    등 뒤로 삼두육비의 법상이 다시금 떠올라 이전과 확연히 다른 모습을 선보였다. 흐릿한 허상이 아닌 순금으로 만든 신상(神像)이었다. 한립이 얼마 전 제련해낸 법상진신(法相眞身)이었다.

    그가 입을 벌려 검은 기운을 쏘아 보내자 멍하던 법상진신의 눈에 초점이 맞춰졌다. 범상진신이 거대한 금빛 몸을 움직여 한립 앞을 막고는 다섯 개의 팔을 들어올렸다.

    쿠콰쾅!

    금색 빛기둥들이 손바닥에서 빠져나와 보라색 뇌전 뱀과 격돌했다. 이에 보라색 뇌전이 절반 정도 흩어지고 빛기둥들도 소실되었다. 법상진신이 몇 번만 더 빛기둥을 쏘아 보내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남은 보라색 뇌전 뱀들은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츠츳!

    보라색 뇌전 뱀들이 괴이하게 한립의 코앞으로 이동했다. 그 순간, 법상진신의 다섯 팔이 허공을 쥐었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허공에서 다섯 개의 금색 손이 나타나 보라색 뇌전 뱀의 목을 틀어쥐었다.

    법상이 힘을 주자 보라색 뇌전 뱀들은 천둥소리를 내며 터져나갔다. 그 때문에 일부 뇌전이 튕겨 나와 범상진신을 때리기도 했지만 별 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그때 멀리 있던 기둥들이 다시 보라색 뇌전을 뿜으려 했다.

    그 순간 한립의 입에서 주술 소리가 들리고, 마갑에 검은 기운이 흐르더니 몸이 팽창하며 황금색 털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남색 눈이 번뜩이고 송곳니가 튀어나온 엄청난 크기의 거대 원숭이로 변한 것이다.

    남색 눈동자와 금색 털 그리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무시무시했지만 맑은 눈빛만은 그대로였다. 거대 원숭이가 입은 천외마갑은 저절로 크기가 불어났고 표면의 가시들도 팔뚝만 하게 커져 섬뜩한 예기를 번득였다.

    이것은 새로 익힌 경칩술, 산악거원 변신술이었다. 단전에서 뜨거운 기운이 샘솟아 온몸을 빠르게 도는 느낌이었고 몸도 평소보다 5할 정도 더 단단해졌다.

    한립이 변한 거대 원숭이가 털이 북슬북슬 난 두 팔을 하늘 높이 뻗자 오색 기운이 요동치며 물러났다. 오색 기운은 다시 달려들었지만 한립이 한발 더 빨랐다.

    하늘 위의 거대한 은색 불새가 맑게 울며 거대한 은색 불덩이로 변해 금색 거대 원숭이를 향해 하강했다. 검은 산봉우리도 쉭! 하고 허공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콰르르.

    은색 화염이 거대 원숭이 주변에서 폭발적으로 퍼져 오색 기운을 저지했다. 화염 속 거대 원숭이가 손을 뻗어 파문 속에 나타난 검은 산봉우리를 받쳐 들었다.

    그리고 흉흉하게 눈을 번뜩이고는 온힘을 다해 산봉우리를 냅다 던져버렸다. 누군가 봤다면 기겁할 만한 행동이었다.

    비술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육신의 힘으로 산을 투척했기 때문이었다. 원자극산의 제한을 모두 풀지 않았더라도 어마어마한 무게가 실린 일격이었다.

    검은 그림자로 변해 날아가는 산봉우리가 하얀 돌풍을 일으켜 허공에 하얀 흔적을 남겼다. 끊임없이 왜곡되고 강렬한 파동을 내뿜는 한 줄기 공간균열이었다.

    검은 산의 목표는 자금색 기둥 중 하나였다. 기둥은 재빨리 보라색 뇌전을 일으켜 주변을 뇌전으로 가득 채웠다.

    다음 순간 검은 산봉우리가 기둥 주변의 보라색 뇌전과 충돌했다.

    콰콰콰쾅!

    검은색, 회색, 보라색이 휘황찬란하게 번져 삼색 태양이 뜬 것처럼 눈이 부셨다. 그러나 거대 원숭이는 남색빛으로 눈을 번뜩이고 손을 뻗었다.

    쉭!

    공간에 파문이 일고 투척했던 검은 산봉우리가 그의 손으로 돌아왔다. 산 표면은 여전히 까맣고 작은 상처 하나도 없었다.

    금색 거대 원숭이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다른 곳의 금자색 기둥으로 원자극산을 던졌다. 공간균열을 남기고 날아간 산봉우리는 엄청난 소리를 내며 기둥과 충돌했다.

    콰콰콰쾅!

    휘황찬란한 빛 때문에 시야가 가려졌다.

    빛이 가시자 거대한 자금색 기둥이 절반밖에 남지 않았고, 특이한 재질의 파편들이 수북하게 떨어져있었다.

    어떤 방식으로 제련했든 원자극산 보다는 강도가 낮았다. 원자극산은 그 자체로 기이한 보물이었고 정체 모를 회백색 주춧돌을 첨가한 후 진선계 제련 비술로 다시 제련하기도 했다.

    한립이 스스로 부수고 싶어도 미세하게 녹여가며 없애는 방법 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런 단단하고 무거운 산을 산악거원으로 변해 던졌는데 이래도 기둥이 부서지지 않았다면 한립도 식겁하고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이렇게 한립이 변한 금색털 원숭이는 원자극산을 다섯 번 던져 기둥들을 모조리 무너트렸다.

    약재밭을 지키던 보호막도 기둥이 사라지자 회색 불새에게 금방 집어삼켜지고 말았다. 꽤 강력한 금제를 완력으로 굴복시킨 셈이다. 한립은 다시 수결을 맺어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흠…….’

    한립은 기둥 잔해를 둘러보고는 조금 놀랐다. 산악거원의 진혈을 취해 융합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 정도로 막대한 힘을 낼 수 있을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짐작컨대 다른 진령 변신술보다 체질에 맞는 것 같았다.

    다른 진령 변신술로는 몇 가지 신통을 쓰고 천지원기를 감응하고 조종하는데 도움을 얻는 게 전부였다. 산악거원 변신술과 같이 대폭적으로 육체 능력을 향상시켜준 경우는 없었다.

    ‘산악거원 변신술이 이렇게 효과가 좋은 줄 알았으면 시간 낭비하지 말고 처음부터 쓸 것을.’

    시간이 촉박했기에 아쉬움이 남았다.

    ‘겨우 약재밭 금제가 이리 강력해서야! 괜히 진선계 선인이 만든 금제가 아니구나.’

    그러고 보니 주전 앞 광장의 지면 금제가 위력이 크게 줄어있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산악거원의 힘으로도 원자극산을 그렇게 멀리 던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한립은 생각을 정리하고 약재밭 대문으로 걸어갔다. 오색 보호막이 사라지고 시야가 탁 트였는데, 약재밭은 그리 크지 않은 대신 약초 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약재밭 담에는 덩굴 식물로 가득했고, 나무판자로 덧대 만든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담벼락 틈으로 약재밭이 조금 보였는데 몇 개로 나뉜 평평한 밭에 영초들이 가득 심어져 있었다.

    그중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영초는 옅은 노란색 이파리들 사이로 손가락 크기의 과실이 자라있었다. 마치 속세에서 흔히 보았던 잘 읽은 붉은 고추 같았다.

    과실이 은은하게 붉은빛을 냈기에 멀리서 보면 작은 등불이 켜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량으로 심어 놓은 것을 보면 이곳의 주인이 꽤 중시하던 영초인 것이 분명했다.

    과실의 모양을 확인한 한립은 기억을 더듬었다. 어디선가 이 영초에 대해 들어본 것 같았는데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생각에 잠긴 채 약재밭으로 들어갔다.

    ‘아!’

    나무문 사이로 몸을 비집고 들어가는 순간 문뜩 영초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인계 난성해에서 보았던 경전에 쓰여 있던 내용이었다. 그는 우뚝 멈춰 서서 밭을 가득 채운 영초를 보며 쓴웃음을 금치 못했다.

    “홍라과(紅羅果)라니……. 애주가라면 보물처럼 모실만도 하겠지.”

    이 기이한 과실은 절세의 술을 빚을 수 있는 재료였다. 영초의 이름은 낯설어도 홍라선주(紅羅仙酒)라는 술에 대해서는 하계의 난성해 수도자들도 대부분 알고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선계 선인들도 인연이 닿아야 맛볼 수 있는 선주(仙酒)로 진선계에서도 유명했지만 아무나 마실 수는 없었다.

    인계 난성해는 물론이고 영계 인족에도 홍라선주를 찬미하는 내용의 기록이 남아 있었다. 심지어 몇몇 범인들은 이 술을 한 모금이라도 마시면 선계로 승천할 수 있다고도 믿었다.

    그러나 한립은 여러 경전을 살펴보고 그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홍라선주가 유명한 것은 그 향기가 어떤 영주보다 그윽하고 술맛이 좋아서였다.

    한 모금이라도 마시면 그 향기가 열흘 넘게 입안을 맴돌고 한 주전자를 마시면 선인이라 해도 삼일 밤낮을 취기가 가시지 않고 즐길 수 있다고 했다.

    물론 귀한 술인 만큼 수시로 복용하면 서서히 체질을 개선시켜 수명을 연장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원래 수명보다 얼마나 늘려줄지는 하늘만이 알 일이었다. 아마 저계 수도자나 범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도일 것이다.

    경전에 적혀 있기를 홍라선주의 향과 맛은 주원료인 홍라과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고 했다.

    똑같은 홍라선주라도 사용한 홍라과에 따라 여러 등급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천년을 키워야 꽃이 피고 만년이 흘러야 열매를 맺는 홍라과는 재배 환경도 까다로웠다. 누군가 밤낮없이 공을 들여야 결실을 볼 수 있는 영초였다.

    술을 즐기지 않는 한립은 결코 재배하지 않을 영초란 소리다.

    ‘하지만 이름난 술을 찾는 애주가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키워보려 했겠지.’

    약재밭은 상고시대부터 존재했을 텐데 이곳의 홍라과들은 과실을 맺은 후 아무도 손대지 않은 것 같았다. 오랜 세월 이곳에 있었으니 그 약성이 얼마나 깊을지 가늠해보지 않아도 알만했다.

    이것으로 홍라선주를 빚는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기이한 효과를 보일지도 모른다. 특별한 효과가 없더라도 술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팔면 엄청난 부를 가져다줄 수도 있었다.

    한립은 곰곰이 이해득실을 따져보고는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그는 급히 열매를 따지 않고 인근의 다른 밭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적지 않은 수량의 두 가지 영초가 더 자라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평범한 풀처럼 보였는데 녹색 이파리에 금빛 무늬가 있었고 맑은 향이 진동했다. 손끝으로 이파리를 문지르면 옥을 만지는 것처럼 매끄럽고 느낌이 좋았다.

    그러나 나머지 한 가지는 가지와 잎이 마구 교차하며 자랐고, 어두운 보라색 과실들이 달려있었다. 이 과실들은 표면이 울퉁불퉁하고 괴이한 색의 작은 혹들이 나있어 보기가 좋지 않았다.

    ‘이건!’

    약초 중 하나를 알아보고 한립은 크게 기뻐했다. 못생긴 과실은 천연성에서 본 경전에 기록되어 있던 ‘식독초(蝕毒草)’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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