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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013화 (770/2,000)
  • 1013화. 방석, 향초 그리고 신상(神像)

    *

    그 후 한립은 샅샅이 대청 안을 뒤졌지만 신상을 보관하는 보라색 장과 그 앞에 놓인 과실 잔해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한립은 보라색 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팔뚝 크기의 장 안에는 최상급 옥으로 조각된 비취색 신상이 놓여있었다.

    녹색 도복을 입고 새하얀 불진(佛塵)과 자금색 호리병박을 든 신상은 수염을 길게 길러 신선의 풍모를 풍겼다.

    그러나 신상을 살펴보던 한립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아도 비취색 빛이 어른거릴 뿐 신상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그는 눈을 깜빡이며 명청령안을 극성으로 발휘해 신상의 생김새를 살폈다. 이번에는 효과가 있는지 신상의 얼굴을 뒤덮은 비취색 기운이 점차 옅어졌다.

    ‘윽……!’

    하지만 얼굴이 드러나기 직전 머릿속에 노랫소리와 불경소리가 울리며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눈앞이 새까맣게 변해 비틀거리다 바닥에 고꾸라질 뻔했다.

    한립은 재빨리 대연결을 운용해 정신을 맑게 하고 몸을 가누었다. 그러자 신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의혹이 가득했다.

    그의 수행으로도 진면목을 파악하기 어렵다면 위력이 대단한 보물일 공산이 컸고, 진선계에서도 제법 위치가 있는 인물이니 신상으로 만들어 모셔 놓았을 것이다.

    원래 신상 자체가 아주 신묘한 물건이었다. 영계에서도 일부 실력자들은 원거리에서도 신상의 힘을 빌려 원신 혹은 분혼을 출현하게 할 수 있었다.

    물론 진선계 선인이 이런 방법을 통해 영계에 강림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지만, 정체모를 신상을 챙겨 들고 다니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한립은 잠시 고민하다 한숨을 내쉬고는 욕심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미련 없이 신상을 두고 쪽문으로 걸음을 돌렸고 원숭이 꼭두각시가 그 뒤를 바짝 쫓았다.

    결국 대청 안에는 신상이 놓인 보라색 장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쪽문을 지나자 열댓 개의 방이 있는 통로가 나타났다. 원숭이 꼭두각시를 보내 일일이 문을 열어보고는 이상이 없자 그 중 중간 방으로 들어갔다.

    방의 문은 작은 반달형으로 중간에서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다. 바깥쪽이 응접실로 탁자와 다기들이 놓여있었다. 의식으로 빠르게 내부를 훑자 모든 가구들이 희귀한 고급 재료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한립은 거침없이 침실로 보이는 내실로 들어갔다. 침실에도 이런저런 물건들이 꽤 있었다.

    은은한 녹색 침상 옆에는 탁자가 있었고 탁자 위에는 붓과 벼루, 겹겹이 쌓인 얇은 천들이 올라가 있었다. 그는 탁자로 다가가 붓과 벼루를 살피다가 고개를 젓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이어 얇은 천들을 살펴보았는데 아무런 글자도 쓰여 있지 않았다. 한립은 빠트린 것이 없는지 방을 꼼꼼하게 둘러보고는 방을 빠져 나왔다.

    이렇게 그는 열댓 개의 방을 빠르게 수색했다. 내용을 알 수 없는 고대 문자가 적힌 옥간 몇 개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소득은 없었다. 그 옥간들도 침상 옆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기에 귀한 물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진선계에 대해 무척 궁금했기에 고대 문자나 연구해 볼 요량으로 챙긴 것이다. 그는 대청으로 돌아와 다른 쪽문으로 들어갔다. 이전과 달리 방과 방 사이가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한립의 눈길을 끈 것은 네모난 방문의 표면에 은빛으로 빛나는 주술문자들이었다. 눈에 익은 은과문이었다.

    “여긴…….”

    그는 문을 자세히 살피다 각 방들이 분명 전문적인 용도가 있는 밀실이라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밀실 안에 쓸 만한 물건들이 아직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은색 주술문자가 가득 새겨져 있어 그의 표정은 더없이 신중했다. 보통 밀실에 펼쳐 놓은 진법은 소리나 기운을 차단하는 종류였지만 주전 대문에서 호되게 당한 일을 생각하면 방심은 금물이었다.

    한립은 꼭두각시를 보내지 않고 방어막을 두른 채 밀실 석문으로 푸른 비검을 던졌다. 푸른 빛줄기로 변한 비검이 밀실 대문을 갈랐다.

    챙!

    밀실 대문에서 은빛이 터지고 맑은 울음소리가 청량하게 퍼져나갔다. 평범해 보이는 은빛이 청죽봉운검을 막아낸 것이다. 금제의 은빛은 파문조차 일지 않았다.

    한립은 그것을 보고 도리어 안심했다. 공격당해도 반격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반적인 금제란 소리였다.

    ‘밀실마다 전부 강력한 금제를 펼쳐 놓기는 무리였겠지.’

    그는 새까만 손을 들어 작은 산을 날렸다.

    쿵!

    손바닥만 하던 작은 산이 금방 수십 배로 커져 은빛과 충돌했다. 그러자 원자극산의 엄청난 무게에 버티지 못하고 은빛은 물론이고 밀실 문 또한 두 쪽으로 갈라져 떨어져 나갔다.

    한립은 보물을 회수하고 즉시 안으로 향했다. 밀실 안에는 갑의초로 만든 방석뿐이었다. 의식으로 훑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한립은 방석을 챙겨 밀실을 나섰다. 아직 밀실이 많이 남아 있었기에 실망하기는 일렀다. 그러나 그는 연달아 여섯 개의 밀실을 부수고 들어갔지만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는 조금 기운이 빠졌지만 남은 밀실들에 대한 기대를 버릴 수가 없었다.

    쾅!

    그가 막 일곱 번째 문을 깨부수고 들어간 순간 깜짝 놀랐다. 그곳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탁자 위에 옥함 세 개와 작은 병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눈에 띈 것은 벽에 걸린 금빛이 번쩍이는 그림이었다.

    한립은 명청령안을 발동해 금빛 그림을 살피고는 움찔했다. 그림 속에 빼곡하게 들어있는 것은 수많은 금색 비검이었다. 똑같은 모양의 비검들은 크기가 제각각이었는데 큰 것은 기둥처럼 느껴졌고 아주 작은 것도 문양이 또렷하게 보여 굉장히 신기했다.

    이렇게 많은 검이 그림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도 어수선하지 않고 제각각이 고유의 기운을 드러냈다.

    ‘이렇게 괴이한 만검도(万劍圖)라니!’

    한립은 희색이 감도는 얼굴로 그림을 뚫어져라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돌연 뒤로 물러나 그림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 비정상적으로 핏기가 몰려있었다.

    “마치 진검으로 베인 것 같구나. 의식이 강하고 비검에 정통하지 않았다면 나라도 의식이 크게 손상됐을 거야.”

    그는 빠르게 법력을 순환해 몸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심했다. 그리고 차분히 마음을 안정시키고 다양한 색깔의 부적을 꺼내 만검도를 향해 던졌다.

    부적들이 알록달록한 빛으로 번져 그림 속으로 흡수되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표면에 다채로운 부적 허상이 떠오르며 그림의 금빛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부적에 제압된 금빛은 나중에는 완전히 사라져 평범한 그림으로 전락했다.

    쉭!

    한립이 손을 뻗자 그림이 둘둘 말려져 시야에서 사라졌다. 누가 제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잠깐 보았는데도 퍽 현묘한 이치가 담겨 있었다. 그것이 강력한 검결일지 아니면 의식에 관련한 비술일지는 차차 연구하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탁자로 다가가 푸른 기운을 날렸다.

    한립은 의식으로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미간을 좁혔다. 옥함은 각각 복잡한 은과문이 적힌 부적을 담고 있었는데 진작 영기가 다해 사용할 수 없는 것들이었고, 작은 병들은 액체가 담겨 있던 흔적만 남아 있었다.

    제대로 봉해두지 않아 보관하던 영액이 다 말라버린 것이다. 그는 생각 끝에 부적들만 챙겼다.

    그는 밀실의 다른 곳도 뒤져보았지만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한립은 다른 밀실들도 빼놓지 않고 수색했다. 마지막 밀실을 나선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아예 편전에서 빠져나와 다른 두 개의 편전과 주전을 쳐다보았다.

    ‘이쯤이면 석곤과 류수아도 정상에 올라왔겠지.’

    광장에 펼쳐진 환진(幻陣)이 강력해 통과하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렇다 해도 기껏해야 한 곳 정도 더 둘러볼 수 있을 것이다.

    한립의 시선이 아직 가보지 못한 두 개의 편전을 오갔다. 그는 불현듯 눈을 반짝이고는 주전 뒤편의 누각을 쳐다보았다. 주변에 초목이 푸르렀고 짙은 나무 속성 영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고는 자신이 바보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어떤 수도자든 동부에 약재밭을 두기 마련이었다. 그에게는 그 어떤 보물보다 진선계 영초가 훨씬 도움이 되었다.

    진선계 영초를 구해 신비한 병으로 대량생산하면 보물보다 몇백 배의 값어치를 지닌다.

    한립은 원숭이 꼭두각시를 데리고 주전 뒤로 달려갔다. 다행히 일다경이 못되어 원하던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약재밭의 정확한 위치는 몰라도 나무 속성 영기가 가장 짙은 곳을 찾으면 그만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세 개의 누각이 둘러싼 가운데에 평지가 펼쳐져 있었고, 다섯 개의 자금색 기둥이 평지를 둘러싸고 오색 보호막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한눈에 보기에도 펼쳐져 있는 금제가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잠시 머리를 굴리다 수결을 맺고 입에서 은색 불덩이를 내뿜었다. 불덩이는 허공에서 빙글 돌아 서령불새로 변했다. 각종 화염과 영력을 집어삼키는데 능했기에 금제를 깨는 데도 쓸 만했다.

    “가라.”

    은색 불새가 한립의 명을 듣고 오색 보호막으로 쇄도했다.

    쿵!

    오색 보호막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은색 화염과 오색 기운이 어우러져 연달아 폭음이 들려왔고 은색 불새가 보호막을 헤집고 날아다닐 때마다 오색 기운이 흐려졌다.

    우웅.

    한립이 기분 좋게 불새의 위력을 키우려는데 자금색 기둥들이 진동하며 오색 빛을 발산했다. 그리고 흐려지던 보호막이 빛을 머금고 원래대로 돌아갔다.

    안색이 어두워진 한립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열손가락을 연달아 튕겨 법결을 날렸다.

    팔뚝만 하던 서령불새가 법결을 흡수하고 눈빛이 사나워지더니 몸집을 키워 날개를 활짝 펼쳐 오색 보호막 위로 날아갔다. 불새는 울부짖으며 은색 날개를 힘차게 펄럭였다.

    피피픽!

    수많은 은빛 깃털들이 불덩이로 변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콰릉!

    보호막에서 폭음이 울리고 일대가 불바다가 되었다. 자금색 기둥 다섯 개가 열심히 오행영력을 보충해 주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때 거대 은색 불새가 날개를 접고 유성우처럼 고공에서 수직으로 떨어졌다.

    이에 오색 보호막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금이 가더니 산산조각이 났다. 한립은 보호막이 붕괴하는 순간 몸을 날려 약재밭으로 뛰어들려 했다.

    ‘생각보다 간단한걸?’

    그 순간, 자금색 기둥들이 발산하던 빛이 흩어지고 천둥소리가 울렸다. 느닷없이 보라색 뇌전들이 나타난 것이다.

    한립은 무너져 내리는 보호막을 힐끗 쳐다보고는 몸에서 검은 기운을 불러내 천외마갑을 걸쳤다. 그가 영력을 불어넣자 마갑 표면의 검은 주술문자들이 튀어나와 한립을 맴돌고 회전했다.

    이어 천둥소리와 함께 수많은 금빛 뇌전들이 튀어나가 뇌전 그물을 이뤄 그를 보호했고, 여러 부적을 뿌려 금색 뇌전 그물 바깥으로 겹겹이 다채로운 색의 보호막을 펼쳐 놓았다.

    마지막으로 한립의 소매에서 원자극산이 날아올라 커지더니 거대한 방패처럼 그의 앞을 막아섰다. 한립은 보라색 뇌전이 아무리 강력해도 이 모든 것을 뚫지는 못할 거라 여겼다.

    그 순간 자금색 기둥에서 튀어나온 굵직한 보라색 뇌전 다섯 줄기가 하나로 뭉쳐져 반 장 크기의 뇌전 구슬로 변해 돌진해왔다.

    큼지막한 보라색 뇌전 구슬에 한립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지만 여전히 물러나지 않고 검은 산봉우리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산 표면의 은색 주술문자들이 반짝이고 회색 기운이 흘러나와 보라색 뇌전 구슬을 맞이했다.

    콰르릉 콰쾅!

    회색 기운이 뇌전 구슬에 밀려났다. 원자신광의 신통이 대단해도 오행의 힘에만 제대로 된 효과를 냈기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진선계 비술이 담긴 뇌전의 힘에는 통하지 않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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