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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012화 (769/2,000)

1012화. 보랏빛 뇌전

*

한립은 여전히 원숭이 꼭두각시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 뒤따랐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원숭이 꼭두각시의 큰 보폭으로도 아직 광장 중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환진(幻陣)!’

꼭두각시는 물론이고 그도 한참을 걷었지만 아직도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옥 울타리 주변에 머물렀다.

한립이 놀라 남색빛을 일렁여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영목신통을 일으켰음에도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영목신통으로도 환진을 꿰뚫어 보지 못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진선계 선인이 펼쳐 놓은 금제라고 생각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한립은 포기하지 않고 법력을 끌어올려 미간 사이에 집중했다. 미간에 돌연 검은 기운이 어리고 새까만 요목이 나타났다. 수백 년간 몸에서 배양중인 파멸법목이었다.

인계에서부터 영계에 이르기까지 그와 오랜 세월 함께 했기에 신통도 남달랐다. 주로 공간신통을 지니고 있지만 환술을 억제하고 미혼술을 등을 깨트리는 효과도 지니고 있었다.

한립은 뇌명대륙에서 폐관수련을 하다 파멸법목과 명청령안을 동시에 발동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두 가지 신통을 융합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영목신통이 탄생했다.

위력은 대단했지만 펼칠 때마다 상당한 법력을 소모해야 한다는 것이 단점이었다. 지금까지는 그것을 써볼 기회가 없었지만 지금이 바로 그 기회였다.

한립이 속으로 주술을 외기 시작하자, 두 눈의 남색빛이 짙어지고 미간의 파멸법목에 기이한 검은빛이 어렸다. 세 개의 눈에서 남색빛 두 줄기와 검은 빛기둥이 분출되어 어두운 남색 빛구슬로 응결했다.

갈수록 진한 검은 빛을 내는 남색 구슬은 언뜻 보면 거대한 눈알 같기도 했다.

“깨트려라.”

한립의 소매 속에서 푸른빛이 날아가 어두운 남색 구슬에 흡수되었다.

파앗.

구슬이 빛을 발하며 검은색과 남색 두 종류의 주술문자가 떠올랐다. 구슬에서 무수히 많은 어두운 남색 실들이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갔다.

가느다란 실들은 극히 빨라 번뜩이는 순간 광장을 뒤덮었고, 이어서 광장 허공에서 다양한 색깔의 균열이 일며 폭발했다.

괴이한 공간 파동이 광장을 휩쓸고 지나가자 주변 풍경이 모호해지며 하얀색 빛의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립은 망설이지 않고 푸른 빛줄기로 변해 빛의 문으로 들어갔고, 원숭이 꼭두각시도 몸을 날려 그 뒤를 따랐다. 그와 꼭두각시가 빛의 문으로 사라진 순간 허공에 남색 구슬이 눈부신 빛을 토해내고 폭발했다.

이에 광장을 둘러싼 실그물이 뜯겨나가고 모호하게 변했던 광장의 풍경도 다시 또렷해졌고 하얀색 빛의 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시각, 석곤은 정상까지 백여 계단을 남겨두고 멀리서 활짝 열린 궁전 대문을 주시했다. 류수아도 어느새 계단 수백 개만을 남겨둔 상태였다.

* * *

한립은 찌푸렸던 눈을 번쩍 뜨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빛의 문을 빠져나오자 그는 자금색 대전(大殿) 앞에 서있었다.

순금으로 만들어진 대전 문에는 간단한 문양이 그려져 있고 그 위로는 커다란 편액이 붙어 있었다. 상고문자였는데 은과문처럼 눈에 익었다.

‘금전문(金篆文).’

아쉽게도 영계에 금전문을 아는 이가 거의 없어 아직까지 배울 기회가 없었다. 뜻을 알았다면 대전이 뭐하는 곳인지 유추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한립은 굳게 닫힌 대문을 보고 의식으로 꼭두각시를 움직였다. 원숭이 꼭두각시가 뚜벅뚜벅 계단을 올라 두 손으로 문을 밀려했으나 이번에는 궁전대문과 달리 꼼짝도 안했다.

쿠르릉 콰쾅!

그런데 평범해 보이는 대전 문에서 천둥소리가 울리고 음산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던 한립의 몸에도 천둥소리가 울리고 청백색 뇌의雷衣)가 입혀졌다.

“……!”

그는 두 발을 움직이지 않았는데 발밑이 번뜩이며 미끄러지듯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대전 문에서 눈부신 보라색 뇌전이 튀어 올라 수십 개의 보라색 뱀으로 변해 지척의 원숭이 꼭두각시를 향해 쇄도했다.

이에 꼭두각시는 저항 한 번 못해보고 푸른 연기로 녹아 사라졌다. 그러나 보라색 뇌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대로 한립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대번에 한립의 안색이 달라졌다. 금공 금제만 아니었어도 뇌전을 피할 신묘한 둔술이 여럿 있었지만 지금은 불가능했다.

그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손을 뻗어 수정 방패로 앞을 막고 검은 기운을 불러내 청백색 뇌전으로 둘러싸인 검은 갑옷을 걸쳤다. 수리를 마친 천외마갑이었다.

보라색 뇌전이 수십 개의 보라색 뱀으로 갈라져 수정 방패로 돌진했다. 적의 공격을 왜곡해 흘려보내는 신통 덕에 이전 싸움에서 유용하게 쓰였던 방패였다.

그런데 보라색 뱀들 중 겨우 3분의 1만 옆으로 비켜가고 나머지는 온전히 방패로 쏟아졌다. 보라색 뇌전이 폭발해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 순간 상상을 초월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보라색 뇌전에 휩싸인 수정방패가 녹아 투명한 액체로 변해 땅에 떨어진 것이다. 한립이 기겁하며 한 손으로 수결을 맺고 뇌의를 청백색 뇌전 그물로 변하게 해 보라색 뇌전으로 쏘아 보냈다.

뇌의를 형성한 뇌전은 뇌겁을 치를 때 모아둔 것이라 위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하지만 두 종류의 뇌전이 맞닥뜨린 순간 청백색 뇌전이 보라색 뇌전에 잡아먹혀 보랏빛만 짙어졌다.

‘이런!’

얼굴이 창백해진 한립은 소매 속에서 다급히 굵은 금빛 뇌전을 뿜으려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미 보라색 뇌전이 응결해 사납게 천외마갑을 때린 후였다. 굉음이 터지고 한립이 비틀거리며 보라색 뇌전에 휩싸였다.

그런데 천외마갑 표면의 문양들이 빽빽한 검은 주술문자로 떠오르더니 보라색 뇌전과 격돌했다.

별 볼일 없어 보이는 검은 주술문자들이 놀랍게도 보라색 뇌전과 함께 폭발해 검은색과 보라색의 뜨거운 바람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한립은 몸을 바로 세우고 천외마갑을 보며 식은땀을 흘렀다. 마갑을 수리해 갖고 오지 않았다면 조금 전 공격에 중상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재가 가득 묻은 그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땅에 스며든 수정 방패 액체를 보고 아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

한립은 평정을 되찾고 대전 문을 주시했다.

강력한 금제가 펼쳐져 있다는 것은 안에 상고 선인이 중시하는 물건이 있다는 뜻이었다. 다만 강력한 금제를 깨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뒤늦게 온 석곤과 류수아 대신 고생만 하는 꼴이었다.

그는 마음을 정하고 청석 벽돌 길을 따라 가장 가까운 편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중심의 대전보다는 금제가 약할 테고 깨고 들어가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파앗.

그는 소매 속에서 또 다시 원숭이 꼭두각시 한 마리를 방출했다. 이번 꼭두각시는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엎어지지 않고 나름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두 번째 꼭두각시가 한립의 조종을 받아 앞장섰다.

청석 벽돌 길을 순조롭게 지나 도착한 편전은 규모가 대전의 3분의 1이었고 작은 대문에 금과문 편액이 걸려 있었다.

이번에 한립은 훨씬 멀리 떨어져 몸에 여러 색의 부적을 붙이고, 수결을 맺어 금색 뇌전으로 온몸을 가렸다.

그는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꼭두각시를 움직였고, 원숭이 꼭두각시는 앞으로 나서서 대문을 밀었다.

끼익!

그런데 예상외로 대문이 천천히 밀렸다. 금제가 펼쳐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한립은 반색했지만 무턱대고 움직이지 않고 꼭두각시가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편전 안으로 들어간 원숭이 꼭두각시는 멀쩡했고 그것을 본 한립은 부적으로 만든 보호막을 허물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꼭두각시 옆에서 편전을 살피며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정면에 백옥으로 만든 커다란 제사상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 위로 신상(神象)을 모셔두는 보라색 장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신상 앞에 수백 개의 담황색 방석들이 놓여 있었고, 편전의 네 모서리에 푸른 향로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향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은한 단향목 향기가 아주 그윽했다.

그곳은 마치 사원(寺院) 같았다. 내부는 널찍했고 다른 곳으로 이어진 문이 양쪽으로 나 있었다. 한립의 시선이 대청 양쪽의 목재 선반으로 옮겨갔다. 새하얀 목재가 스산한 한기(寒氣)를 내뿜는 것이 영계에서도 잘 알려진 설목(雪木)이었다.

설목은 얼음 속성 보물을 제련하기에 최적의 재료였는데 겨우 선반을 만드는 데 사용하다니 크나큰 낭비가 아닐 수 없었다.

멀리서 보니 선반 위에 열댓 개의 물건들이 보였다. 절에서 쓰는 공양 그릇 발우(鉢盂), 법사가 설법 때 드는 여의(如意) 그리고 절에서 시각을 알리는 종인 인경까지 그 종류가 다양했고 전부 강력한 영기를 머금고 있었다.

한립은 의식으로 물건들을 살펴보고는 얼굴이 밝아졌다. 전부 미완성의 보물들이었지만 이곳의 원주인이 제련을 마쳤다면 통천령보에 버금가는 위력을 지녔을 것이다.

게다가 각각이 특이한 모양새를 지닌 만큼 희귀한 신통을 지녔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가 가져다 제련을 마친다면 영계에서 최상급에 속하는 보물들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한립은 푸른 기운을 뿜어 선반 위의 물건들을 싹쓸이 했다. 단숨에 이렇게 많은 보물들이 생기다니 운이 좋았다. 그가 다시 대청을 살피다 방석을 보고는 표정이 달라졌다.

쉭!

한립은 고민 없이 손을 뻗어 방석을 끌어왔다. 탄성과 온기 그리고 정순한 영기가 가득 느껴졌다.

“이건…….”

분명 영초를 엮어 만든 것인데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영기를 머금고 있었다. 한립은 방석에 코를 가까이 대고 킁킁거렸다. 희미하게 특이한 냄새가 났다.

한립은 곧바로 푸른 검기를 불러내 방석에 쏘아 보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검기에 금방이라도 잘려나갈 것 같던 방석은 공격을 튕겨내 버렸다. 담황색 방석 에 노란 기운이 흐르자 검기에 미세하게 잘린 흔적마저 사라져갔다. 풀을 엮어 만든 방석이 청죽봉운검의 검기를 막아낸 것이다.

“예상대로 갑의초(甲衣草)였어! 도검을 막아내는 영초라니. 몸에 지니고 다니면 최상급 갑옷이 부럽지 않겠지. 불 속성 공격에 약하지만 않으면 더욱 높게 평가받을 텐데……. 선인의 거처라더니 방석 하나도 우습게 볼 것이 없구나.”

그는 방석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얼굴에 웃음이 만연했다. 방석의 가치를 알았으니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새까만 손이 소매 속에서 움직이자 회색 기운이 날아가 대청 안의 방석 수백 개를 소리 없이 거둬들였다.

한립은 의식으로 저물대 안의 방석을 차곡차곡 정리하고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계에서 멸종된 희귀한 갑의초를 다 얻고 광한계까지 온 보람이 있구나.’

그가 무심코 숨을 들이마시자 단향목 향기가 처음보다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

한립은 흠칫 놀라며 대청 구석에서 빛나는 향로를 쳐다보았다. 향로 속에 아직도 담황색 양초가 남아 있었는데 얼마나 오랜 세월 이곳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걸음을 옮기던 한립은 의식으로 향로를 훑고는 미간을 좁혔다. 향로는 청동으로 제작된 평범한 물건으로 법기가 아니었다. 그는 향로 앞에 서서 타다 남은 향초를 보며 눈을 빛냈다. 진한 단향목의 향기는 향초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겉은 별다른 점이 없었지만 이렇게 오랜 세월 짙은 향기를 유지하는 것을 보면 내력이 있는 물건이 확실했다.

한립은 신중한 얼굴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향초에 닿기 전 푸른 기운이 그의 엄지와 검지를 둘러쌌다. 그는 그것을 꼼꼼하게 살피며 생각에 잠겼다.

쉭!

그는 갑자기 손끝을 튕겨 작은 불똥을 쏘아 보냈다. 불똥은 번득이며 날아가 순식간에 사그라졌고 향초에는 불이 붙지 않았다.

한립은 조금 들뜬 기색으로 주먹 크기의 새빨간 불덩이를 띄워 향초의 끝을 태워보았다.

그러나 향초는 여전이 불이 붙지 않았다.

“흑유빙향(黑幽氷香)! 합체기에 이를 때 심마(心魔)를 제거해 준다는 성물이 아닌가!”

한립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새하얀 옥함을 꺼내 향초 조각을 조심스럽게 담았다. 그리고 빠르게 움직여 다른 향로에서도 타다 남은 향초들을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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