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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011화 (768/2,000)

1011화. 산봉우리, 궁전 그리고 돌계단

*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면 어찌 보물을 취하겠습니까?”

한립이 눈을 반짝이며 걱정하는 류 선자를 향해 충고했다.

“제 생각도 한 형과 같습니다. 주변에 각치족들이 돌아다니니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두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따르겠습니다.”

고민하던 류수아가 마음을 다잡았다. 이에 석곤이 웃음을 터트리고 소매 속에서 검은 물체를 뿜었다. 그런데 검은빛이 소매 속을 빠져나오자마자 지면으로 추락해 나동그라졌다. 검은 늑대의 형태를 띤 강철괴뢰였다.

“금공 금제가 법기에까지 영향을 미치다니요!”

류수아가 놀라며 난색을 표했다. 이렇게 되면 어떤 위험이 닥쳐도 법력과 비술로만 막아야 했다. 한립도 눈썹을 끌어올리며 내심 경계심을 키웠으나 석곤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성큼성큼 산봉우리 쪽으로 걸어갔다.

평범한 수사들이야 법기와 보물을 쓸 수 없으면 퍽 난감하겠지만 단단한 몸 자체가 살상 무기와 마찬가지인 그는 아니었다. 한립이 슬쩍 미소를 머금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류수아도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들을 쫓았다.

산 아래의 돌계단이 산 정상까지 이어져 있었다. 한 장 폭의 돌계단이 하얀 구렁이처럼 구불구불 산을 감싸 올라가는 형상이었다. 금공 금제 때문에 날아갈 수는 없지만 이 정도 계단에 힘이들 리 없었다.

그런데 석곤이 계단에 발을 얹고는 표정이 구겨졌다. 한발 한발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것이 성질 급한 그답지 않았다.

한립이 그것을 의아해하다 하얀 계단에 발을 올리고서야 상황을 파악했다.

계단에 강력한 흡인력이 작동해 두 다리를 들어올리기가 무척 어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계단을 오를수록 흡인력이 강해졌다.

아주 미세한 차이라 처음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산꼭대기까지 이어진 만여 개의 계단을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나마 같은 자리에 가만히 서있으면 흡인력이 점차 약해지다 나중에는 흩어져 버린다는 점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신기한 금제였지만 한립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범성진마공을 익힌 그의 몸은 성족을 능가하는 강인함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돌계단이 이상해도 그가 산 정상까지 향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석곤이 아직 감춰둔 실력이 있다면 쉬지 않고 정상까지 오를 수 있을 것이고, 류수아는 다른 수를 쓰지 않고 육체의 힘만으로 궁전까지 가는 것은 무리였다.

한립이 연달아 열댓 걸음을 떼고 뒤를 돌아 류수아를 살폈다.

여인은 첫 번째 계단에 우두커니 서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흔들리는 눈동자에 약간의 노기가 느껴졌다.

그녀도 상황을 파악하고 열을 받은 것이다. 아무도 말은 안했지만 먼저 궁전에 도달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보물들을 취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립과 석곤에 비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녀가 올라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팟! 팟! 팟!

류수아는 여러 색의 부적들을 꺼내 자신의 몸에 붙였다. 노란색, 은색, 빨간색 부적의 영기가 그녀의 몸에서 번져 나와 돌계단의 압력을 밀어냈다. 각기 다른 보조 신통을 지닌 부적을 합쳐 일시적으로 몸을 강화한 것이다.

류수아는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오기 시작했다.

보조 부적은 아무리 효과가 좋아도 고계 수사들에게는 계륵과 같은 존재였다. 필요할 때 아낌없이 써도 상관없었다. 법력을 주로 수련하는 평범한 수도자들은 몸을 강화하는 부적에 별 관심이 없었고 적을 상대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몸을 단련하는 연체사는 원래 몸이 튼튼해서 금강부(金剛符) 같은 부적의 효과가 미미했다.

이미 육체의 한계에 근접한 힘을 내는데 고계 보조 부적으로 강화를 해봐야 얼마나 강해질 수 있겠는가. 아주 희귀한 보조 부적이나 연체사의 힘을 1, 2할 가량 증가시켜줄 뿐이었다.

이에 한립은 더는 신경 쓰지 않고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처음에는 금제의 힘이 강해져도 잠시 제자리에서 쉬다 흡인력을 이겨내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세 사람은 금방 3분의 1을 올라갔다. 이때부터 세 사람의 표정이 확연히 달라졌다. 가장 먼저 올라갔던 석곤은 아직 힘차게 올라가고 있었지만 가슴이 들썩이고 이마에 땀이 맺혀 힘든 모습이었다.

중간의 한립은 피부가 점점 금빛으로 물든 것을 제외하면 평온한 얼굴이었다. 마지막으로 류수아는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확연히 걸음이 느려지고 계단을 오를 때마다 몸을 덜덜 떨어댔다.

삼색 영기의 빛도 불안하게 깜빡거려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었다. 보조 부적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여인도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안색이 좋지 못했다.

그녀가 300개의 계단을 올랐을 때 드디어 류수아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그녀의 상황이 파악됐지만 한립은 멈추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

얼마 후 석곤은 산중턱에 이르렀다. 석곤은 땀을 줄줄 흘리고 걸음을 뗄 떼마다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몸에서 노란빛을 뿜어내면서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의식을 이용해 뒤따르는 한립을 살폈다. 피부의 금빛이 조금 더 짙어진 한립은 처음 산을 오르기 시작할 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마치 홀로 금제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 같았다.

‘고계 연체사였단 말인가! 나보다 더 뛰어난!’

석곤은 가슴이 철렁했다.

아래쪽에 남아 숨을 고르던 류수아도 단약을 복용해가며 기운을 차리고 움직이는 중이었다.

석곤은 마음이 급해져 더 빨리 올라가고 싶었으나 태산이 짓누르는 것처럼 걸음은 점점 더 무겁고 느려졌다. 이제는 관절에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석곤은 느려지고 한립은 한결같았기에 일다경 후에는 순서가 뒤집혔다. 한립이 땀에 전 석곤을 지나치며 담담히 웃어주고 몇 걸음 만에 그와 더 거리를 벌렸다.

석곤은 이를 악물고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멀어져 가는 한립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순식간에 백여 계단을 더 오르고도 상대의 신형은 느려질 줄 몰랐다.

‘그렇다면…….’

그는 고개를 들어 산 정상의 보라색 궁전을 보다가 산 아래에서 천천히 따라오는 류수아를 확인하고는 품에서 작은 핏빛 병을 꺼내들었다. 부적들이 덕지덕지 붙은 작은 병에서 신비한 기운이 느껴졌다.

훅!

석곤이 입김을 불어 노란 기운으로 부적들을 떨구었다.

퍼펑.

부적들이 허공에서 폭죽처럼 터지고 그 안에서 핏빛 화염에 둘러싸인 단약이 굴러 나왔다. 석곤이 핏빛 단약을 꿀꺽 삼키자 눈 깜짝할 사이에 맹렬한 기운이 경맥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앞서 나가던 한립은 이런 석곤의 행동을 알아차리고 주의 깊게 살폈다.

단약을 먹은 거한의 얼굴에 기이한 핏빛이 맴돌고 하얀 피부가 붉게 달아올라 발산하는 영기의 빛이 노란색과 붉은색이 섞여 기이해졌다.

“큭!”

갑자기 석곤의 이마에 힘줄이 솟고 온몸의 근육이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리며 몸집이 두세 배로 불어났다. 거대한 석곤이 쿵! 하고 계단 두 개를 한 번에 뛰어넘었다.

그는 처음보다 빠른 속도로 한립을 쫓았다. 비술을 사용해 힘을 끌어올린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한립이 아니었다. 그는 길게 숨을 내뱉고 수결을 맺어 온몸에 금색 비늘을 드리웠다. 그리고 등 뒤로는 삼두육비의 금색 허상이 떠올라 한립의 본체로 뛰어들었다.

법상을 흡수한 한립은 얼굴이 노랗게 변하더니 전신에 기이한 빛을 내는 갑옷을 입었다. 이후 한립의 속도가 더욱 빨라져 거대화된 석곤도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석곤이나 류수아 모두 크게 놀랐지만 이미 전력을 다해 산을 오르고 있었기에 별수가 없었다.

법상이 변한 금빛 갑옷으로 몸을 보호한 한립이 바람을 가르며 빠르게 돌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석곤이 서둘러 움직여도 한립은 점점 더 멀어져갔다.

잠시 후 한립이 400개가 넘는 계단을 앞서가자 석곤도 더는 빠른 속도를 유지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얼마나 지쳤는지 땀방울뿐 아니라 온몸이 끓고 있는 것처럼 하얀 김을 내뿜고 있었다.

앞서가던 한립도 비로소 계단의 강력한 흡인력에 속도를 늦추었다. 산 정상까지 2, 300걸음이면 충분했지만 대신 흡인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성족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한립도 견디기가 어려웠고 한걸음 한걸음을 뗄 떼마다 다리가 떨려 천천히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뒤쪽의 석곤과 류수아 역시 제자리에 서서 휴식을 취하며 멍하니 한립이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도 어쩔 수 없이 고지를 앞에 두고는 걸음을 멈춰야했다. 열 개의 계단을 앞두었을 때 금색 갑옷이 파르르 떨리며 언제라도 허물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립은 발밑의 흡입력이 줄어들기를 기다리며 잠시 멈추었다 움직이기를 반복했다.

마지막 열 걸음을 딛는데 반각이나 걸렸는데 정상에 두 발이 닿는 순간에는 그를 괴롭히던 흡인력이 씻은 듯이 사라져 몸이 새털처럼 가벼웠다.

한립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몸에 있던 금색 갑옷을 흩어버렸다. 고개를 돌리니 석곤이 수백 개의 계단 밑에서 씩씩거리며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류수아는 2천 계단 밑에 있어 작은 점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보라색 궁전이 굉장히 넓어 한립이 먼저 도착하더라도 그사이 숨겨진 강력한 금제를 뚫고 보물을 모조리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다.

한립이 미소를 지으며 바로 보라색 궁전으로 몸을 돌렸다.

웅장한 궁전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화려한 문양을 지닌 수십 개의 커다란 수정돌들이 질서 있게 박혀 범상치 않은 느낌을 주었다.

천천히 대문을 살핀 한립은 깜짝 놀랐다. 수십 개의 수정돌들은 전부 희귀한 극품영석이었는데, 영계의 극품영석보다 훨씬 정순하고 크기가 컸다.

그는 이번에는 보라색 궁전 담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떤 물질로 만들어진 것인지 높은 담에는 기이한 보랏빛이 흘렀고 크기가 제각각인 주술문자들이 촘촘히 새겨져 있었다.

한립의 입꼬리가 휘었다. 주술문자들은 익숙한 ‘은과문’이었다.

‘과연 전선계 선인의 건축이란 말인가!’

그는 겉으로는 차분했지만 궁전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열기가 가득했다. 수도의 길을 걸으며 수많은 진귀한 보물을 봐왔지만 진선계 선인이 남긴 보물에는 여전히 마음이 떨려왔다.

채류앵과 단천인이 이곳에 그들의 고비를 넘겨줄 단약이 있을 거라 확신 할만 했다.

콰쾅!

한립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손을 뻗어 금색 뇌전을 날려보았다. 그런데 금빛 뇌전이 담 위쪽에 도달하는 순간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금빛 뇌전이 사라진 것이다. 한립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명청령안을 발동하고서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아내지 못했고, 의식 또한 무형의 힘에 튕겨 나왔다. 그는 담을 넘을 생각을 버리고 궁전대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한립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저물대에서 원숭이 꼭두각시를 불러냈다. 웬만한 거구의 사내보다 커다란 꼭두각시가 금공 금제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땅에 엎어졌다.

이에 한립이 손끝을 튕겨 법결을 흡수시키자 원숭이 꼭두각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궁전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원숭이 꼭두각시는 두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끼이익.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한립은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궁전 정문이 가볍게 밀려 열렸기 때문이다.

의심을 버리지 못한 그가 서둘러 대문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문 뒤로 푸른 벽돌이 깔린 광장이 펼쳐져 있었고 사방에는 옥으로 만든 울타리가 보였다.

그리고 광장 맞은편 끝에는 자금색(紫金色)의 거대한 건물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 옆으로 크기가 3분의 1정도인 편전으로 보이는 건물 세 채가 품(品) 자 형태로 주전을 감싸고 세워져 있었다.

주전 뒤로는 낮은 누각도 보였다. 한립은 잠시 머뭇거리다 꼭두각시를 조종해 먼저 궁전 대문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

아무 일도 생기지 않자 그도 대문을 넘어 광장 한쪽에 발을 들였다. 꼭두각시는 그의 조종을 받아 광장 중심을 지나 주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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