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0화.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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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아홉 개의 금제가 뚫려 나갔다. 그러나 초대형 주술문자도 상당한 기력을 소모했는지 애처롭게 윙윙거리며 균열이 가있었다.
“어서 최후의 일격을 준비해야 합니다.”
류수아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녀 등 뒤에서 회색빛의 수레바퀴가 굵직한 빛기둥이 되어 주술문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균열이 가있던 주술문자가 복구되며 다시 강력한 빛을 뿜었다.
한립과 석곤도 따로따로 술법을 펼쳐 새까만 산봉우리와 거대 영패가 화살처럼 쇄도했다.
열 번째 금제는 노란 모래로 이루어진 사막이었다. 회색 주술문자는 사막에 접촉하는 순간 움찔하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한립의 영목신통에 원자신광으로 억제해둔 태을청광의 흐릿한 허상들이 떠오르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원자의 힘이 격감한 후에야 태을청광이 제 위력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초대형 주술문자가 무수히 많은 회색 기운을 터트렸고 그 여파로 태을청광이 변한 투명한 허상들도 대부분 흩어졌다. 그 순간, 거대 영패와 검은 산이 거세게 떨어져 내렸다.
쾅! 쿠쿵!
남은 태을청광이 미약하게 버티다 뚫리고 거대 영패와 검은 산이 노란 사막 금제와 직접적으로 충돌했다. 작은 모래 알갱이들이 갑자기 주먹 크기로 변해 두 보물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한립의 원자신산이나 석곤의 회색 영패는 원자의 힘을 함유한 보물이었다. 거대한 모래 알갱이가 내려치는데도 보물들은 빛을 잃지 않았다.
신묘한 위력을 지닌 노란 모래 알갱이는 곧 보물들이 내뿜는 원자신광에 짓눌려 꼼짝하지 못했다.
원자신산과 은색 주술문자 그리고 거대 영패의 상고문자가 동시에 반짝거리며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휘잉.
검은 산봉우리에 은색 주술문자가 떠오르고 빠르게 회전하며 커다란 동굴을 만들어냈다. 회색 기운이 검은 동굴 안에서 선회하며 강력한 흡인력을 일으켜 주변의 노란 모래알들을 빨아들였다.
웅!
그리고 거대 영패의 고대 문자가 빛을 번득이며 굵은 회색 광선을 뿜어냈다. 영패를 칼자루로 하는 원자신광 광선검이 된 것이다.
광선검이 휘둘러진 자리는 공간이 왜곡되었고 노란 모래 알갱이들이 박살났다. 대단한 위력이었다. 노란 모래알의 수가 굉장히 많았지만 대부분 원자신산에 빨려 들어가고 나머지는 빛의 검에 쪼개져 사라졌다.
이렇게 열 번째 금제가 뚫리고 마지막 금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빛의 장막으로 보이는 초대형 화폭(畫幅)에 숲이 울창한 푸른 산이 첩첩이 이어지고 그 위를 무수히 많은 새들이 선회하고 있었다.
끼룩끼룩.
그중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서 영기의 빛이 반짝이자 다채로운 빛깔의 조류 허상들이 날개를 펴고 그림 속에서 튀어나왔다.
조류 요수들은 입에서는 새빨간 화염 구슬을 뱉었고 두 날개에서는 하얀 바람의 칼날을 내뿜었다. 게다가 두 발에서 뇌성이 일고 은색 뇌전을 번득이기도 했다.
순식간에 수많은 공격들이 밀려들었다. 태을청광의 수가 이전 금제들보다 압도적이라 공격당한 원자신산과 광선검의 회색빛이 훨씬 어두워졌다. 이전과 달리 거꾸로 태을청광의 제약을 받았다.
‘태을청산!’
그럼에도 한립은 신이 났다. 화폭 속의 푸른 산봉우리는 그가 오매불망 바라던 물건이었던 것이다. 그때 석곤이 기합을 넣고 회색 광선검에서 밝은 회색빛을 터트렸다.
칼날이 지나는 곳마다 불구슬과 바람의 칼날이 볕을 쬔 눈처럼 녹아내렸고 광선검은 조류 떼를 직접 공격했다. 검빛이 반짝인 자리에 수백 마리의 조류 허상들이 갈라져 나갔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조류 허상들이 오색 화염으로 변해 회색 광선 검으로 몸을 날렸다.
콰르릉!
처음 절반은 광선 검이 튕겨냈지만 더 많은 오색 화염들이 날아들자 버티지 못하고 원형으로 돌아갔다. 영패가 결국 안쓰럽게 윙윙거리고 오색 화염에 휩싸여 화폭으로 추락했다.
남은 오색 화염은 더욱 기세등등하게 검은 산봉우리로 몰려들었다. 놀란 한립이 한 손으로 수결을 맺어 원자신산을 가리켰다.
산봉우리의 회색빛이 다시금 강렬하게 빛났고 표면의 수많은 은색 주술문자들이 회색빛의 물결을 내뿜었다. 조금 전 회색 광선검의 위력이 뛰어났다지만 원자신광의 수를 따지자면 거대화된 원자신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오른쪽에서 솟아오르던 오색 화염 덩어리들이 원자신광의 회색 물결 속에 짓눌려 무(無)로 돌아갔다. 거대한 산봉우리가 화폭을 향해 거칠게 떨어져 내렸다.
우웅.
이때 화폭 속의 푸른 산봉우리가 진동하며 그림에 불과했던 수목과 화초 그리고 짐승과 곤충들이 푸른 영기의 빛으로 변해 쏟아져 나왔다.
푸른 산봉우리의 녹음이 흘러나와 푸른 실로 변한 다음 허공에서 겹겹의 그물로 뭉쳐져 회색빛의 물결을 막아섰다. 푸른 그물과 은색 물결의 충돌에 금속성의 마찰음이 들리고 두 산봉우리가 동시에 진동을 했다.
콰쾅!
한립이 체내의 법력을 빠르게 운용해 원자신산의 위력을 키우려 할 때, 고공에서 홀연 사발 굵기의 회색 벼락이 내리쳐 푸른 그물을 공격했다.
태을청광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그물이 벼락을 맞고 불안하게 깜빡거렸다.
한립이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들어보니 류수아의 회색 깃발에서 회색 벼락들이 내려치고 있었다. 한립과 석곤의 보물로도 마지막 금제를 어쩌지 못하자 그녀가 힘을 보태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푸른 산봉우리가 끊임없이 푸른 실을 뿜어 그물을 보충했기에 원자신산과 회색 벼락의 협공에도 쉽사리 밀리지 않았다. 이렇게 시간을 끌다 앞서 깨트린 금제들이 회복되면 큰일이었다.
한립과 류수아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광포하게 공격을 쏟아냈다.
회색빛의 물결과 회색 벼락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데도 태을청산의 지지 하에 푸른 그물은 끈질기게 버티고 있었다. 이에 한립과 류수아의 표정도 미세하게 달라졌다.
그 순간 석곤이 움직였다.
“흐핫!”
거한이 거칠게 호흡하며 몸을 부풀려 두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회색 기운이 융성해진 몸으로 그가 주먹질을 해댈 때마다 회색 빛구슬들이 날아갔다. 안 그래도 겨우 버티던 푸른 그물에게는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원자신산과 회색 벼락의 공격을 끈질기게 막고 있던 그물이 세 가지 원자의 힘이 합쳐지자 영기의 빛으로 흩어져갔다.
회색 기운과, 회색 벼락, 회색 빛구슬이 푸른 산봉우리와 화폭을 향해 비처럼 퍼부어졌다. 화폭은 푸른빛을 내다 결국 갈가리 찢겨 소실되었다.
드디어 마지막 11층 금제가 붕괴된 것이다.
화폭이 사라진 허공에 거대한 동굴이 괴이하게 나타나 우윳빛을 발산했다. 입구가 분명했다. 하지만 한립은 다른 이들과 달리 입구가 아니라 다른 것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세 사람이 힘을 합쳐 화폭 금제를 깼는데도 아직 남아 있는 푸른 산봉우리였다. 힘을 증폭해주는 화폭을 잃은 태을청산은 겨우 사람만한 크기에 빛도 어둑해져 있었다.
한립이 얼른 원자신광을 가리켰다. 그러자 검은 산봉우리는 푸른 산 위에 나타나 회색빛을 뿜었다. 태을청산 표면의 빛이 요란하게 깜빡거리며 원자신광에 저항했지만 이미 원기가 상해 무리였다.
회색 기운 속에서 은색 주술문자들이 나타나 거머리처럼 푸른 산봉우리에 들러붙었고, 낮게 울며 수많은 주술문자에 이끌려 원자신산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한립의 입 꼬리에 숨길 수 없는 웃음이 걸렸다. 그리고 원자신산은 빠르게 줄어들어 그의 소매 속으로 날아들었다. 그의 과감한 행동에 류수아와 석곤이 무언가를 해보기도 전에 태을청산은 한립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에 류수아와 석곤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도 태을청산의 정체를 어느 정도 짐작했으니 욕심이 났던 것이다.
“필요로 하던 것이라 제가 거두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보물들을 얻을 수 있을 테니 두 분도 크게 개의치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한립이 차분히 그들을 응시하며 말했다.
“하하, 한 형께서 필요로 하던 물건이라면 그러셔야죠. 저는 괜찮습니다.”
류수아가 표정을 풀며 빙긋 미소 지었다.
“저도 보물에 흥미가 있었지만 한 형께서 한발 앞서 챙기셨으니 딴말하지 않겠습니다.”
석곤은 표정이 수차례 변하다 애석하다는 얼굴로 답했다.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립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뭘요. 그보다 금제를 파훼했으니 어서 안으로 들어가 보물을 찾죠. 사부님과 단 선배님께서 원하는 물건들을 찾아가면 큰 상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류수아가 회색 깃발을 거두고 남색 빛줄기로 변해 구멍으로 뛰어들었다. 석곤도 지체 없이 노란빛으로 변해 따라 들어갔다.
한립만이 서두르지 않고 주위를 살펴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날아갔다. 류수아와 석곤의 둔광이 먼저 구멍 속으로 들어간 후였다.
그가 우윳빛 구멍으로 들어서는데 화려한 빛의 기운이 도처에서 밀려들었다. 한립이 흠칫 놀라 푸른 보호막을 치자 화려한 기운이 크고 작은 주술문자로 뭉쳐져 한립 주위에 소형의 빛의 진법을 형성했다.
웅!
오색빛의 진법이 진동하고 주변 공간에 파문이 이는데 한립의 표정은 오히려 편해졌다. 그는 뒷짐을 지고 빛의 진법을 거스르지 않았다.
다음 순간 오색빛이 크게 번지고 그는 낯선 탑 위에서 눈을 떴다. 전송으로 인해 약간 어지러웠다.
청석을 깎아 만든 높은 탑은 아름답기보다는 조악하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그의 발밑으로 전송진이 펼쳐져 있고 가까이에 아래로 향하는 돌계단이 있었다.
이곳은 광한계와 완전히 다른 세상 같았다. 태양이 뜬 쪽빛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땅에 각종 꽃과 풀들이 파릇파릇 자라있어 바람이 불 때마다 신선한 풀내음을 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탑 인근에 있는 산이 그의 주의를 끌었다. 그다지 높지는 않았지만 모양이 특이했다. 칼날처럼 가파른 산은 새하얀 색으로 뒤덮여 있었고, 은빛이 반짝이는 산 정상에는 거대한 보라색 궁전이 보였다.
한립은 궁전을 살피다 계단 아래에 서 있는 류수아와 석곤을 발견했다. 그들도 산 정상의 보라색 궁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
그는 날아서 탑을 내려가려 했지만 두 발이 땅에서 떠오른 순간 비틀거리며 다시 내려서야했다. 그의 두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마치 그의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진 것 같았는데 손을 뻗어 흔들어 보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에 한립이 다시 날아오르려 했지만 역시 얼마 떠오르지 못하고 엄청난 힘에 짓눌려 떨어졌다.
한립은 강력한 육체의 힘을 이용해 2척 정도까지 날아오르는데 성공했다. 이제는 몸만 떨리는 것이 아니라 푸른 보호막까지 극심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는 미간을 좁히고 남색빛을 일렁여 몸을 살폈다.
그러자 언제부터인가 노란 기운이 몸에 들러붙어 있었다. 푸른 보호막도 노란 기운을 전혀 막지 못하는 듯했다. 그때 계단 아래 석곤이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한 형! 이곳의 금공(禁空) 금제가 좀 특이합니다. 한 척을 날아오를 때마다 금제의 힘이 배가 되어 저도 8척 이상은 무리더군요.”
“높이에 따라 금제의 압력이 배로 늘어난다면 성족 존재라도 고공비행을 할 수는 없겠습니다.”
한립이 천천히 바닥에 내려서며 답했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몸에 들러붙은 노란 기운이 괴이하게 소실되었다.
“석 수사처럼 단단한 몸을 지니신 분이 8척이 한계라면 저 같은 평범한 상족 수사는 4척도 무리입니다.”
류수아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덧붙였다. 그녀는 아직도 산정상의 궁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말에 한립의 표정이 신중해지며 곧바로 돌계단을 걸어 내려가 그들과 합류했다.
“저 궁전에 찾던 보물들이 모여 있을 텐데, 올라가지 않고 뭐하십니까?”
“이곳에도 금제가 펼쳐져 있을지 모르니 신중을 기할 밖에요.”
한립의 물음에 류수아가 드디어 고개를 돌렸다.
“금제가 보호하고 있다는 것은 저곳에 보물이 있다는 증거와도 같습니다. 또한 금공 금제는 다른 험악한 금제들에 비해 안전한 편이고요.”
“다른 때라면 한 형의 말씀이 맞겠지만, 이곳의 금제는 진선계의 선인들이 남긴 것입니다. 그리 만만치는 않을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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