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9화. 설후족(雪喉族)
*
“그렇게까지 상세한 정보는 듣지 못했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겠네요.”
류수아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명성이 자자한 태을청광을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다른 보물을 얻지 못하더라도 이번 걸음이 헛되지는 않겠어요.”
한립이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얼마 후 하얀 기운을 지켜보던 류수아가 손에서 붉은 표창을 꺼내 던졌다. 붉은빛으로 변해 날아간 표창은 하얀 기운 속으로 당장이라도 들어갈 것 같았지만 코앞에서 애달프게 울고 여러 조각으로 갈라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병장기들이 표창을 산산조각낸 것 같았다. 표창의 잔해는 떨어지며 더욱 조밀한 공격을 당했고 마지막에는 붉은 빛의 점으로 변해 완전히 해체되었다.
신기한 광경에 한립이 미소를 거두었다.
의식으로 훑었을 때는 태을청광의 형태가 전혀 감지되지 않았는데 그나마 명청령안을 발동해 표창이 갈라지는 순간 언뜻 수십 가닥의 가느다란 허상이 스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영목신통을 썼는데도 아주 모호했다. 그것이 바로 태을청광의 진면목일 것이다.
“태을청광이 듣던 대로 괴이하네요.”
류수아도 다른 방식으로 모호한 허상을 감지하고 작게 탄식했다. 이번에는 한립이 소매 속에서 푸른 비검을 쏘아 보냈다. 팔뚝만한 길이의 청죽봉운검이었다.
비검은 매우 빠른 속도로 하얀 기운을 노리고 날아갔고, 이번에도 수십 개의 가느다란 허상이 도처에서 몰려들어 비검을 갈랐다.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찔렀다.
비검 표면에 푸른빛이 반짝이고 멀쩡한 모습으로 하얀 기운으로 쇄도했다. 하얀 기운 속으로 진입하려는 순간 사방에서 수백수천의 가느다란 허상이 나타나 밀려들었다.
웅.
청죽봉운검도 버티지 못하고 낮게 진동하고 푸른빛의 점으로 흩어졌다. 이에 한립의 안색이 미미하게 달라지며 손을 뻗어 푸른빛의 점들을 한 곳으로 모았다.
빛의 점들이 모여 청죽봉운검이 원래대로 돌아가자 류수아의 눈빛이 묘해졌다.
잠시 고민하던 한립은 고개를 저으며 청죽봉운검을 거두었다. 방어력에서 청죽봉운검보다 더 뛰어난 보물도 있었지만 그것들은 망가지면 복구할 방법이 없었다.
그럼에도 한립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기 위해 간신히 평정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태을청광은 원합오극산을 제련하기 위한 주재료 중 ‘태을청산(太乙靑山)’이 지닌 기광이었다.
태을청산 말고도 태을청광을 지닌 다른 보물도 있겠으나 상고시대부터 금제가 유지되려면 끊임없이 기광을 뿜어내는 태을청산급은 되어야 했다.
‘이렇게 두 번째 산을 얻게 되는 것인가!’
그는 머릿속으로 딴 생각을 하면서도 여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예상대로 우리 둘로는 어렵겠습니다. 석 수사가 오면 금제를 해결하시지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인근에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하실까요?”
그들은 몇 마디 상의 끝에 다른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모래바람이 거센 어딘가에서 류수아가 노란 구슬을 발동해 한립과 자신을 노란빛으로 감쌌다.
그들은 모래바람 속을 내려가 허물어진 오래된 전당 속으로 들어갔다.
* * *
보름 후, 하늘 저 끝에서 희미한 둔광이 날아들었다. 하늘을 가른 둔광이 사라지고 한립과 류수아가 머무는 전당 위에서 석충족 석곤이 우람한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그는 창백한 낯빛에 피로한 기색이 가득했다.
석곤은 바로 모래 바람 속으로 몸을 던지지 않고 경계하는 눈초리로 주위를 살핀 다음에야 품에서 진법 원반을 꺼내들었다.
“…….”
그가 원반을 확인하고 노란빛을 일으켜 아래쪽으로 내려갔을 때는 이미 한립과 류수아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석 형,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오면서 무슨 골치 아픈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골치 아프다 뿐입니까. 까딱 잘못했으면 죽을 뻔했습니다.”
낯익은 얼굴을 확인하고 얼굴을 풀며 석곤이 쓴웃음을 지었다.
“흉충들을 따돌리지 못한 것입니까?”
한립도 어찌 된 일인지 궁금했다. 일행과 흩어져 달아나기 전 석곤의 뒤를 쫓던 은조충 떼가 떠오른 것이다.
“그것들도 살벌했지만 사부님이 전수해 주신 비술을 사용해 잘 처리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설후족(雪吼族) 수사들을 마주치는 바람에 보름이 넘게 추격당하다 겨우 달아난 것입니다!”
거한은 빠드득 이를 갈았다.
“설후족이라면……! 얼음 속성이야 말로 모든 신통의 본원이라고 믿고 오로지 얼음 속성 신통만 연마하며 나머지 속성의 공법을 익히는 수사들을 적대시하는 미치광이들이 아닙니까.”
류수아가 아연한 기색으로 입을 벌렸다.
“맞습니다, 바로 그 미친놈들이 저를 죽이려 들었습니다. 중급 세력에 말이 통하지 않는 족속들이라지만, 각각의 전투력은 해왕족이나 각치족 같은 대규모 종족의 고계 존재와 비교해도 빠지지 않지요.
후미진 뇌명대륙 북극지역에 생활하는 탓에 이전에는 광한령을 얻었다는 소식도 듣지 못했는데 이번에 어찌된 일인지 이곳에 있더군요. 하필 그들과 마주치다니 운도 지지리도 없지!”
한립도 여러 경전을 읽다 설후족에 관한 정보를 들었기에 그저 류수아와 시선을 마주치며 고개를 저었다. 현재 석곤의 몸 상태로는 당장 힘을 합쳐 금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들은 닷새 후 석곤이 원기를 회복하기를 기다린 다음 일에 착수하기로 했다. 그리고 한립은 각치인들이 저 멀리서 무슨 꿍꿍이를 벌이고 있다는 것도 일러주었다.
각치인들은 흑유인들을 처리한 곳에서 환술을 펼치고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이 무슨 짓을 벌이는지는 모르지만 금제를 파훼하고 떠나기 전까지 별일 없기만을 바랐다.
며칠 후 그들은 지면에서 날아올라 금제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하얀빛의 기운이 보이자 모습을 드러냈고 금제 가장자리 상공에서 삼각형을 이루었다.
“모두 숙지하고 계시겠지만, 이 금제는 태을청광을 위주로 크게 3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세부적으로 총 11겹이라고 합니다. 안쪽으로 갈수록 금제의 위력은 더욱 강해지고요. 우리는 반드시 단번에 11겹의 금제를 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금제를 깨기 전에 바깥의 금제가 회복될 테니까요.
단 선배님께서 성족으로 진급하기 전 강인한 신체를 이용해 홀로 7겹을 깨셨다고 하니 우리 세 사람이 힘을 합쳐 상극인 원자신광을 발휘하면 이론적으로 11겹을 순조롭게 깰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어떨지는 해봐야 알 것이니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되겠지요.”
류수아가 한립과 석곤을 향해 정색하며 말했다. 금제를 파훼하는 일은 그녀를 위주로 진행하기로 해 한립과 석곤도 반대하지 않았다.
“저와 석 수사도 힘들게 여기까지 왔으니 빈손으로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미리 말해두지만 두 분 선배님께서 제게 하신 약속은 들어 알고 계시겠지요?”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 형! 저와 류 수사도 사부님과 단 선배님이 필요한 물건을 제외하고는 각자 능력껏 보물을 취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왔습니다.”
석곤이 웃음을 터트리자 한립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류수아가 저물대에서 오색빛의 화려한 우산을 꺼내자, 오색 우산을 알아본 석곤의 표정이 달라졌다.
오색 영기의 빛으로 변한 우산이 고공으로 솟아올라 시야에서 사라지자, 오색 기운이 흩어지며 주변을 둘러쌌다. 점점 모호하던 오색 기운은 나중에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이건.’
그 모습에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식을 퍼트렸다. 그러자 오색 기운이 소실된 곳에서 무형의 힘이 의식을 밀어냈다. 오색 우산으로 일대가 봉인된 것이다.
류수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금빛 진법 깃발 열댓 개를 뿌렸다. 정교한 깃발에는 주술문자가 가득 새겨져 있었다. 금색 깃발들이 빛기둥으로 변해 허공으로 사라지고 낯선 파동이 미약하게 생겨났다.
“이 피공산(避空傘)은 사부님이 아끼시는 보물입니다. 우리가 금제를 파훼하며 일으키게 될 영력 파동을 가려줄 것입니다. 그리고 진법 깃발로 펼친 금도금령진(金都禁靈陣)은 사부님께서 이번 임무를 위해 따로 마련해주신 방어용 진법입니다. 성계 초기의 존재가 공격해 와도 한동안은 막아낼 겁니다.”
“류 선자만 고생하게 둘 수 없지요. 저도 약소하게나마 준비해 온 것이 있습니다.”
류수아의 말에 석곤이 조용히 웃으며 나섰다. 그는 입을 벌려 회색 빛덩이 13개를 뿜었다. 회색 빛덩이는 놀랍게도 둥근 고리였고 석곤 주위에서 맑게 울고 흐릿하게 자취를 감추었다.
“음백자모환(陰魄子母環)! 단 선배님께서 이걸 내주셨단 말입니까?”
“다른 건 몰라도 혼백과 원신을 공격하는 데는 아주 뛰어난 물건입니다. 성족이라 해도 모르고 당하면 중상을 면치 못하겠지요. 선자께서 펼친 금제를 보조해 줄 것입니다.”
“좋네요. 각치족이 찾아와 난동을 부리더라도 약간은 버틸 수 있겠습니다.”
석곤의 담담한 태도에 류수아도 놀란 기색을 지웠다.
“두 분이 단단히 대비를 해주셨으니 곧장 금제를 파훼하지요. 무슨 일이 벌어지기 전에 신속하게 일을 마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을 지켜보던 한립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하하, 맞는 말씀입니다. 시간을 끌면 언제나 문제가 생기는 법이지요. 류 선자, 움직이시죠.”
“저도 준비되었습니다.”
석곤과 류수아가 차례로 대답하고, 여인이 먼저 손끝에서 회색 깃발을 불러냈다. 은은하게 원자신광을 품고 있는 깃발이었다. 그녀는 깃발을 던지고 주술을 외며 수결을 맺었다.
우웅.
주술문자가 어린 회색빛의 수레바퀴가 그녀 등 뒤로 오르자 회색 깃발이 그것에 반응하듯 몸을 떨었다. 여인이 원자신광을 발동하자 한립과 석곤도 동시에 술법을 펼쳤다.
이번에 석곤은 전신에서 회색빛을 방출하고 소매 속에서 영패 모양의 보물도 날려 보냈다. 회색 영패 앞면과 뒷면에 각각 ‘원(元)’, ‘광(光)’이라는 글자가 상고문자로 적혀 있었다.
그가 영패 뒷면을 가리키자 두 상고문자가 요란한 빛을 머금었다. 석곤은 영패뿐 아니라 전신을 둘러싼 회색 기운만으로도 기세가 대단했다.
한립도 소매 속 먹처럼 새까만 손바닥을 펼쳐 작은 산봉우리를 허공에 띄웠다. 새롭게 제련한 원자신산이었다. 작은 산봉우리는 그가 따로 법결을 흡수시킬 필요 없이 스스로 커졌고 표면에 회색 기운이 넘실거렸다.
쉭!
이때 여인의 회색빛 수레바퀴가 부들부들 몸을 떨며 깃발을 향해 회색 빛기둥을 쏘았다. 깃발 표면을 꽉 채운 주술문자들이 번득이고, 깃발이 빛기둥을 흡수해 더욱 굵은 빛기둥을 방출해냈다.
연이어 석곤의 거대 영패도 회색 실타래를 방출했고, 한립의 원자신산도 빙글빙글 돌아 하단에서 회색 기운을 흘려보냈다.
세 개의 원자의 힘이 모여들어 뜻밖에도 초대형 주술문자를 형성했다. 류수아의 주도로 회색 기운이 출렁이는 초대형 주술문자는 빠르게 하얀 안개 쪽으로 달려들었다.
콰릉!
하얀 기운이 굉음을 남기고 종잇장처럼 뚫려 나갔다. 초대형 주술문자가 첫 번째 금제를 빛의 점으로 흩어버린 것이다. 그러자 곧바로 아래의 옅은 푸른색의 빛의 장막이 드러났다.
이번에도 초대형 주술문자는 주저 없이 떨어져 내렸고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회색 주술문자와 부딪친 푸른색의 빛의 장막은 한입에 잡아먹힌 것처럼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 아래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새빨간 실들이 빽빽이 몰려들어 거대한 거미줄을 형성했다. 새빨간 거미줄은 회색 주술문자가 떨어지자 붉은 증기를 뿜으며 녹았다. 주술문자를 품은 붉은 증기 속에서 천둥과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초대형 주술문자가 회색 기운을 크게 뿜어 붉은 증기를 거두었고 계속해서 네 번째 금제로 떨어져 내렸다.
원자신광이 변한 주술문자는 처음보다 약간 어둑해져 있었다.
이렇게 쉽게 처음 세 개의 금제를 해결한 것은 조금 의외였다. 아마 원자신광이 태을청광과 상극이라 금제가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 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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