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8화. 태을청광(太乙靑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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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음이 멈추고 영기의 빛이 가라앉았을 때는 이미 뇌붕괴뢰는 추락해 아래의 폐허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허공의 전차 세 대와 원래 모습을 회복한 청갑괴뢰들도 상처가 가득했다. 그중 한 마리는 가슴에 커다란 관통상을 입기도 했다.
심장이 위치한 곳이었기에 꼭두각시가 아니라 보통 수사였다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여섯 이족인들 또한 상태가 좋지 않았고 그들 주위를 맴돌던 열댓 개의 보물들도 거의 망가져 있었다.
그나마 물소 괴수 여섯 마리는 멀쩡했는데 다들 흥분한 기색으로 입에서 하얀 기운을 토하며 끙끙거렸다. 뇌붕괴뢰와의 일전에서 승리를 거머쥐었지만 만만치 않은 피해를 본 것이 확실했다.
바로 그때, 허공의 하얀 구름 속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울렸다.
“흐하하! 흑유족(黑儒族) 수사들이 골치 아픈 꼭두각시를 대신 처리해 주어 우리가 고생을 덜었습니다.”
말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구름이 빛을 발하고 다양한 복색의 수사 열댓 명이 나타났다. 앞으로 나선 자는 노란 장포를 입은 사내로 이마에 짧은 금색 뿔이 세 개나 솟아 있었다.
그 뒤로 모인 열댓 명의 수사들도 전부 머리에 다양한 색깔과 크기의 뿔이 솟아 있었다. 그들의 등장에 왜소한 이족인들은 난색을 표했고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듣기 거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각치족! 당신들이 어찌 이곳에 있는 것입니까? 설마 우리를 미행한 것입니까!”
“당신들이 뭐라고 우리가 미행까지 한단 말입니까? 어떻게 이곳을 찾아냈는지는 모르지만 살려 보낼 수는 없겠습니다.”
금각(金角) 청년의 말에 뒤쪽의 각치인 열댓 명이 둔광을 일으켜 흑유족 수사들을 포위하려 했다.
“갑시다.”
흑유인들은 대번에 안색이 달라져 소리쳤고 여섯 마리 물소 괴수들의 발밑에서 바람과 불의 기운을 뿜으며 달렸다. 물소 괴수들이 끄는 전차 세 대가 푸른 기운에 휩싸여 쏜살같이 날아갔다.
각치족들은 열댓 명이 기다란 빛줄기로 변해 뻗어 나가다가 수결을 맺고 일부는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또 일부는 영수나 강력한 보물을 꺼내 불가사의한 속도로 달아난 전차를 추격했다.
금각 청년만이 뒷짐을 쥐고 서서 움직임이 없었다. 다른 수사들이 제대로 그들을 처치할 거라 믿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흑유인들은 뇌명대륙에서 규모가 있는 종족이지만 둔술로는 유명하지 않았다.
그들은 종족 고유의 기술로 제련한 각종 전차를 이용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평소였다면 다른 종족과 겨뤄도 떨어지지 않겠으나 조금 전 뇌붕괴뢰와 싸우느라 많은 법력을 소모했으니 지금 각치인들과 붙으면 어찌 될지 결과야 불 보듯 뻔했다.
상황은 예상대로 흘러갔다. 전차 세 대는 얼마 달아나지 못해 갑자기 튀어나온 적들에게 가로막혔다. 각치인들이 순간이동 비술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각치인들은 즉시 전차을 향해 손에서 뇌화(雷火)를 뿜었고 여섯 마리 물소 괴수도 어쩔 수 없이 멈춰 입에서 푸른 화염을 뿜어 공격을 막았다.
그들이 지체하는 동안 나머지 각치인들도 다양한 방법으로 도착해 전차를 삼엄하게 둘러쌌다. 검, 도끼, 지팡이 등 다양한 형태의 보물들이 각치인들의 품을 떠나 전차로 날아들었다.
흑유인들도 상황이 절망적이란 것을 깨달았지만 그대로 물러서지는 않았다. 여섯 명이 다시 상처 가득한 청갑괴뢰로 손을 뻗어 거대한 요귀로 만든 다음 등 뒤의 은색 원반을 불러내 허공을 백여 개의 은색 달덩이 허상으로 채웠다.
흑유인들이 필사적으로 항전했기에 순간 두 배가 넘는 수의 각치인들과 호각을 이루며 싸웠다.
물론 흑유인이나 각치인 모두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을 알았다. 흑유인들의 법력이 바닥나는 순간 그들은 죽은 목숨이었다.
그들이 멀리서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멀리 허름한 누각 속에서 제3의 인물들이 이상한 보물을 이용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얀 수정으로 만들어진 보물 표면에 열댓 명의 각치인들과 여섯 명의 흑유인들이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수정 보물 앞에 두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는데 표정이 확연히 달랐다.
“각치족이 여긴 어찌 온 것일까요? 우리처럼 유적을 노리고 온 것은 아니겠죠?”
의아한 얼굴의 삿갓 여인은 류수아였고, 그녀가 질문을 던진 상대는 한립이었다. 그녀의 물음에 한립은 무표정한 얼굴로 유유히 답했다.
“크게 우려할 일은 아닌 듯합니다. 황폐화된 유적터가 이리 넓은데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게다가 우리가 노리는 유적의 금제는 아직도 한참 떨어져 있으니 같은 곳을 노린다면 각치인들이 여기서 흑유인들과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저들이 우리의 존재를 발견하지 않게 주의만 하면 될 것입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한 모양입니다. 그러면 일단 장소를 옮겨 석 수사를 기다리도록 할까요?”
“좋은 생각입니다만, 그 전에 각치인들이 무엇을 노리는지도 파악해 두어야겠지요. 채 선배님께서 정족의 유명한 보물인 영영정(映影晶)을 선자께 빌려주신 덕에 천리 밖에서 각치인들의 동정을 파악할 수 있으니 다행입니다.”
한립이 하얀 수정돌을 보며 턱을 쓸었다.
“영영정의 감시는 성계 존재도 감지하지 못할 만큼 탁월하지만 상대가 손을 쓰면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금제를 펼쳐 무엇을 하는지 숨기면 이것으로도 방법이 없다는 뜻이지요.”
류수아가 미간을 좁혔다.
우연인지 아니면 금각 청년이 무언가를 감지한 것인지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청년이 허공을 올려다보며 검은 사발을 던졌다.
우우웅.
각치족 금각 청년은 주술을 외며 열손가락을 튕겨 법결을 날리자 사발이 길게 울며 검은빛을 퍼트렸다. 별안간 사발이 집채만 해지며 하늘을 뒤덮었고 밤이 된 것처럼 주변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한립과 류수아는 보고 있던 풍경도 새까맣게 변해 더 이상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입을 열기도 전에 수정에 검은 빛이 가시고 원래의 풍경이 다시 보였다.
하지만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만 둥실 떠있을 뿐 이미 각치인들과 금각 청년은 사라진 후였다.
“환술을 써서 모습을 감추었나 봅니다. 영영정의 힘으로 강제로 금제를 깨면 무엇을 하는지 파악할 수 있겠지만 우리도 노출되겠죠.”
류수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여인이 손짓하자 우윳빛 안개가 밀려들어 풍경이 사라지고 영영정은 평범한 수정돌로 변해 그녀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각치인들이 저렇게 경계하는데 괜히 그들을 자극할 필요는 없습니다. 허나 저들이 도모하는 바가 범상치 않다는 것은 명확해졌습니다. 우리의 일에 영향을 미치지 말아야 할 텐데요.”
한립이 생각에 잠겨 있다 중얼거렸다.
“대비를 하긴 해야겠네요. 좋은 생각이 있으신지요?”
“저들의 수가 많고 실력도 강하니 완벽히 대비할 방법은 없을 겁니다. 그저 진법을 여러 겹 펼쳐 우리가 금제를 파훼하는 낌새를 눈치 채지 못하게 하고, 각치인들이 환술을 사용하고 있는 곳에 꼭두각시나 영수를 파견해 감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단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네요.”
한립의 말에 류수아가 침음하다 동의했다.
“선자께서도 동의하셨으니 바로 움직이시지요.”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석 수사는 어째서 아직 오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어야 할 텐데요.”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다 우려를 표했다.
“우리가 무사히 도착했으니 석 형의 신통에 별일은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약속한 기일이 아직 되지 않았으니 며칠 더 기다려 봐도 문제 될 것 없고요.”
한립은 석곤을 믿는 기색이었다.
“그러기를 바라야겠죠.”
한립의 말에 류수아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한립이 소매를 펄럭여 하얀 한기(寒氣) 속에서 백의 여인을 불러냈다. 통령괴뢰 와와였다.
“가서 각치인들을 감시하거라. 들키지 않게 멀리서 그들의 행동을 주시하기만 하면 된다.”
그의 차분한 분부에 와와가 허리를 굽히고 날아오르려 했다.
“잠깐, 이것과 부적을 지니고 가거라!”
한립은 검은 손수건과 태일화청부 한 장을 쏘아 보냈다. 와와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검은 손수건과 부적을 끌어당기고 하얀 그림자로 변해 허공에서 사라졌다.
“한 형께서 아끼는 꼭두각시인가 봅니다. 하긴 저런 고계의 통령괴뢰라면 저도 그럴 것 같네요.”
“하하, 선자의 신분이면 저 정도 통령괴뢰를 구하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요. 사실 저 통령괴뢰가 겉보기만 번듯하지 실속이 없습니다. 차라리 동급의 영수가 훨씬 쓸 만하지요. 저도 사례로 받은 것이지 일부러 구한 것은 아닙니다.”
“고계 통령괴뢰를 이용해 적을 상대하면 소모되는 최상급 영석의 수량이 엄청나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기왕 한 형께서 귀한 통령괴뢰를 보내셨으니 저도 영수 한 마리를 보내 각치인 감시를 돕도록 하지요.”
여인은 한립이 통령괴뢰의 내력에 대해 밝히기를 꺼려하자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파앗.
류수아의 허리춤에서 오색 무지개가 쏟아져 나와 눈 깜짝할 사이에 종적을 감추었다. 영목신통을 지닌 한립은 극히 짧은 시간이었지만 날개가 달린 작은 오색 담비를 보았고, 그 괴이한 속도에 놀라 삿갓 여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나 류수아는 아무 말 없이 몸을 일으켰다.
“가실까요? 금제 인근에서 석 수사를 기다려야지요.”
그녀의 말에 한립도 고개를 끄덕였고 두 줄기 희미한 둔광이 떠올라 각치인들이 있는 곳과 반대 방향으로 이동했다.
가는 내내 아래쪽 풍경은 똑같았다. 어디나 노란 모래 바람이 가득했고 가끔 폐허가 된 유적의 잔해가 눈에 띌 뿐이었다.
한립은 며칠 전 먼저 이곳에 도착해 인근을 살펴두었다. 유적의 규모는 광활했고 적잖은 금제들이 아직 작동하고 있어 굉장히 위험했다.
채류앵과 단천인이 미리 알려준 덕에 금제를 멀리 피해 다녔기에 망정이지 아까 보았던 뇌붕괴뢰와 같은 상고 기관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한 금제도 유적에서 가장 위험한 곳 중 하나였다.
한립과 류수아는 한참을 날아가다 멈추었다.
전방에는 하얀빛의 기운이 모래 바람 속에 드리워 있었는데, 매서운 바람도 하얀 기운에 닿으면 흔적도 없이 잡아먹혔다.
더욱이 빛의 기운 주변에 짐승의 것으로 보이는 뼈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어 소름이 끼쳤다. 그중 대부분은 오랫동안 노란 모래 먼지를 맞아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일부는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새하얀 빛을 띄었다.
류수아가 손바닥마한 진법 원반을 꺼내들고 표면을 살폈다.
“여기가 바로 사부님과 단 선배님께서 말씀하시던 곳입니다.”
“위험해 보이기는 합니다. 허나 두 분께서 공을 들여 우리 셋을 이곳으로 보내셨을 때는 충분히 유적 금제를 해결할 수 있겠다 믿으셨기 때문이겠지요.”
한립이 짐승 뼈를 내려다보다 평온하게 말했다.
“사부님께 들으니 이 금제는 상고시대 때 원자신광과 동급으로 거론되던 태을청광(太乙靑光)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금제를 제거하기 위해 서로 상극인 원자신광이 필수적인 것이고요. 원자체를 지닌 우리 셋이 모인다면 충분히 파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류수아는 눈앞의 금제에 대해 아는 바를 말해주었다.
“태을청광!”
태연하던 한립이 순간 놀라 중얼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태을청광이 그리 흥미로우신지요?”
“저도 원자의 보물을 지닌 터라 동급의 다른 기광(奇光)들에 대해 아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태을청광은 가짜 칼날이라는 뜻으로 ‘허인(虛刃)’이라고도 불릴 만큼 날카롭다고 합니다. 일단 방출하면 무형의 검기처럼 적을 섬멸한다죠. 정말 그런 신통을 지녔는지 궁금하군요.”
평정을 회복한 한립이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사부님께서는 태을청광의 위력이 상당하기는 하지만 소문처럼 그렇게 놀라운 정도는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저 그것을 이용해 형성된 금제가 워낙 견고해서 예전에 강제로 뚫고 들어가려다 실패하셨지요.
또한 태을청광은 후천적으로 수련할 방법이 없고 천지조화에 따라 형성되는지라 영계에서도 원자신광보다 드물지요. 원자신광을 수련한 존재는 어쩌다 만날 수 있겠지만 태을청광을 수련한다는 자는 상고시대 이후로 나타난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렇다면 금제 속에 태을청광을 부릴 수 있는 보물이 있다는 뜻이로군요.”
류수아의 설명에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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