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6화.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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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왕족 여인이 알아차린 그의 보물은 현천과실이 아니고 현천잔보(玄天殘寶) 칼날 조각이었다. 어찌 진정한 현천의 보물을 여인 체내의 현천법기 따위가 감응할 수 있겠는가.
그때 한립은 일행과 같이 천천히 초원을 지나고 있었다.
“여기서 며칠 쉬어가자고 하시다니 의외입니다. 꼭 그래야 할까요? 암수삼림에서 벗어났으니 천천히 이동하며 영석을 통해 법력을 회복해도 될 텐데요.”
류수아가 뜻밖이라는 얼굴로 한립을 보았다.
“류 선자의 말씀도 일리가 있지만 광한계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위험한 곳이란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겨우 암수삼림을 벗어나기가 이렇게 고단했는데 앞으로 또 무슨 일이 벌이질 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하루 빨리 몸을 회복해 최상의 상태로 위험을 대비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게다가 선자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보입니다.”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의미심장하게 답했다.
“역시 한 형의 눈은 속이지 못하겠습니다. 그래도 너무 시간이 지체되면…….”
“류 선자, 한 형의 말대로 하지요. 몸이 엉망인 채로 무턱대고 이동하기보다는 인근에 안전한 장소를 찾아 며칠 쉬다 갑시다.”
류수아가 머뭇거리자 석곤이 입을 열었다.
한립과 석곤이 연이어 설득하자 류수아도 별 수 없이 동의했다. 하지만 해왕족과 만난 곳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했기에 당장 쉬어갈 수는 없었다.
그들이 악심을 품고 흉수나 이종족을 유인해 몰고 오면 위험할 수도 있다.
한립 일행은 반나절을 더 날아가다 녹음이 푸르고 영기가 짙은 작은 산을 찾아 의식을 퍼트렸다. 작은 산이라 그런지 수행이 낮은 회색 늑대 요수 몇 마리를 제외하면 위협이 될 만한 존재는 없었다.
그들은 산으로 내려가 늑대 요수들을 전부 죽이고 산중턱에 요수들이 머물던 동굴을 찾아냈다. 눈에 띄지 않는 위치에 깊게 뚫린 천연 동굴이었다. 짐승들이 머물던 냄새가 났지만 류수아가 물 속성 법술을 이용해 내부를 정리하자 깔끔하게 사라졌다.
그들은 동굴에 자리를 잡고 가부좌를 틀었다.
사흘 후, 몸속의 법력을 순환하던 한립이 눈을 떴다. 마침 류수아도 눈을 뜨고 그를 보고 있었다. 눈빛이 맑고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며칠 전보다 활기가 있어 보였다.
“회복을 축하드립니다.”
한립이 미소를 지으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하아, 괜히 저 때문에 쉬어가게 되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암수삼림에서 선자 홀로 고계 암수 4마리를 막아주지 않았다면, 저와 석 수사가 어찌 멀쩡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하, 저는 그 말에는 동의를 못하겠는데요? 한 형의 실력이면 홀로 암수삼림에 들어갔어도 왠지 무사히 빠져 나왔을 것 같아서요! 저와 류 선자는 원기만 조금 상하고 무사히 빠져나온 것도 다행입니다.”
한쪽 동굴 벽에 붙어 앉아 있던 석곤이 눈을 번쩍 뜨고 끼어들었다.
“저를 너무 띄워주십니다. 제가 강력한 신통을 몇 가지 익힌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 치명적 일격을 날리기 위한 것이라 암수들이 떼로 몰려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강력한 육신을 지닌 석 수사께서 암수 무리의 포위를 돌파하는 데는 더 적격이겠지요.”
한립이 턱을 긁적이며 그를 향해 미소를 보냈다.
“그럴 지도요. 류 선자도 법력을 회복했으니 출발하시지요. 하루 빨리 금제 유적을 찾아야 마음이 편하겠습니다.”
석곤이 낮게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석곤의 말에 그들은 곧바로 세 가지 빛줄기로 변해 동굴을 빠져나왔다.
* * *
동굴을 빠져나가고 엿새 후, 한립 일행은 날개가 네 개나 달린 괴조들에 둘러싸여 그들이 뿜어대는 바람의 칼날을 막고 있었다.
그들이 다양한 보물과 신통을 발휘할 때마다 사방으로 피가 튀었고 일다경이 지나자 괴조 무리를 전부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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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후, 한립 일행이 희미한 잔영으로 변해 초원의 거대한 호숫가를 천천히 날아갔다. 기운을 철저히 감추고 이동하는 중이었다.
호수에는 말 같기도 하고 물고기 같기도 한 거대한 괴물들이 둥실 떠있었다.
산처럼 커다란 괴물들은 입에서 굵은 물기둥을 장난삼아 뿜어대며 서로를 공격했는데 각자의 몸에 닿은 물기둥은 남색빛을 남기고 흩어졌다.
그러나 가끔 물기둥이 호수 밖으로 떨어질 때면 콰르릉! 하는 굉음이 울리고 거대한 구덩이가 생겨나고는 했다. 다행히 거대 괴물들은 서로 장난을 치느라 주위를 신경 쓰지 않아 무사히 거대 호수를 통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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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후, 한립 일행은 황량한 들판에서 새까만 기운으로 둘러싸인 이족인 네 명과 맞붙었다.
한립 주위의 푸른 검기들이 맞은편 이족인 두 명이 날리는 밧줄 형태의 보물을 끊어냈다. 그러나 검은 밧줄은 이족인들의 법결을 흡수하고 바로 원래대로 돌아가 다시 밧줄 허상으로 변해 맹렬하게 날아들었다.
한편 류수아는 남색빛의 신비한 액체로 몸을 가리고 은색 베틀 북을 조종하며 별빛 같은 것을 이족인에게 뿌려댔다. 그러나 상대편 이족인의 실력도 만만치 않아 전신의 검은 기운에서 새까만 화염 괴조들이 나와 베틀 북을 향해 날아들었다.
석곤은 놀랍게도 노란빛에 휩쌓인 거인으로 변해 있었다. 피부가 회백색 돌로 뒤덮이고 그 위로 날카로운 가시들이 잔뜩 솟아 있어 거대한 주먹을 마구 휘두를 때마다 돌송곳들이 튀어나가 마지막 이족인을 궁지로 몰았다.
그러나 이족인은 두 손을 연달아 뻗어 주위의 검은 기운을 방패로 만들어 공격을 막으며 버티는 중이었다.
“한 형, 석 수사! 서둘러야 합니다. 야족인(夜族人)들은 암수와 마찬가지로 밤이 되면 실력이 크게 늘어나니까요.”
그들과의 교전이 길어지자 류수아는 조급한 마음에 다른 일행들에게 소리쳐 경고했다. 류수아의 말에 한립은 순간 표정이 달라져 하늘을 힐끗 보았다.
어둠이 점차 내려앉고 있었다.
“크크큭! 이제야 그걸 떠올리다니 너무 늦었다는 생각은 안 하십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노부가 여러분께 쓴맛을 보여주겠습니다.”
한립이 상대하던 두 야족인 중 한 명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요? 그 전에 당신들은 숨이 끊길 텐데요.”
그의 말에 한립은 담담하게 대답하며 소매 속에서 검게 변한 손을 뻗어 회색 기운을 일으켰다. 동시에 류수아가 양손으로 수결을 맺고 회색빛의 수레바퀴를 띄웠고 석곤이 고개를 쳐들고 길게 울며 열 손가락을 사납게 튕겼다.
곧 한립 일행과 야족인들이 싸우는 허공 위로 무수히 많은 주술문자가 어른거리며 커다란 회색 빛구슬이 나타났다.
회색 빛구슬이 폭발하자 일대를 휩쓸었고 하늘을 쩌렁쩌렁 울리는 폭음 속에서 검은 기운에 둘러싸인 야족인들은 먼지로 변해 흩어졌다.
한립과 류수아, 석곤은 원자신광을 거두고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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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달 후, 한립 일행은 산줄기가 이어져 있는 산맥 위를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고 그 뒤를 천 마리가 넘는 요수들이 따르고 있었다.
한립 일행과 천여 마리의 요수들 뒤로 은색 구름이 밀물처럼 몰려들어 산맥의 수풀이며 주위에서 노닐고 있던 요수들을 남김없이 휩쓸었다.
산맥은 풀 한 포기 남지 않은 민둥산으로 변해갔고, 겨우 살아남은 산맥의 짐승들은 비명을 지르며 은색 구름을 피해 내달렸다.
“어떻게 할까요? 이렇게 도망만 쳐서는 결국 은조충(銀潮蟲) 떼에 따라잡히고 말 겁니다. 저것들은 서금충과도 비견되는 무서운 상고흉충(上古凶蟲)입니다. 일단 사냥을 시작하면 절대 포기하는 법이 없는데, 광한계에 이렇게 많은 개체가 서식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석곤이 난색을 표하며 한립과 류수아에게 전음을 보냈다.
“은조충은 체력이 좋아 몇 개월 동안 사냥감을 추격해도 지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상고흉수들도 은조충이 은색 구름을 이루어 몰려들면 길을 내준다고 하니 말 다했지요.”
류수아도 당황한 기색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누구라 해도 사흘 밤낮을 요충 수만 마리에 쫓겨 달아나면 정신이 없기 마련이었다.
“유일한 대책은 상고흉수가 있는 곳으로 은조충 떼를 유인해 그들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것뿐이겠습니다.”
한립이 어두워진 안색으로 차분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도에 따르면 가장 가까운 흉수 서식지가 한 달 거리입니다. 일부러 흉수 서식지가 적은 경로를 택해 이동하던 중이 아니었습니까.”
그 말에 석곤이 쓴웃음을 지었다.
다들 할 말을 잃고 있는데 어디선가 돌연 붕붕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하늘에 초록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저 멀리 수백 개의 녹색 구름들이 뭉게뭉게 떠올라 그들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한립이 놀라 명청령안을 발동해 녹색 구름의 실체를 알아냈다.
그것은 놀랍게도 주먹 크기의 흉악하게 생긴 녹색 나비들이었다.
“화혈접(化血蝶)! 드디어 달아날 기회가 왔습니다.”
한립이 녹색 나비를 단박에 알아보고 희색을 드러냈다.
“정말 화혈접입니다. 잘됐습니다. 은조충과 저것들은 천적이라 일단 마주치면 서로 죽기 살기로 싸운다고 들었습니다.”
류수아도 비술을 펼쳐 녹색 나비를 확인하고 활짝 웃었다.
“좋은 기회이기는 합니다만 조심해야 합니다. 저들의 싸움에 말려들면 끔찍한 일을 당할 테니까요.”
정신이 번쩍 든 석곤이 당부했다.
“이런 때에 몰려다니면 시선을 끌기 십상입니다. 유적까지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고 각자 지도를 외우고 있으니 흩어져 달아나지요. 두 달 후에 유적에서 만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한 형! 이럴 때일수록 눈에 띄지 않아야 살아남을 수 있겠지요. 각자 살 길을 찾읍시다.”
한립의 제안에 석곤이 과감히 찬성의 뜻을 밝혔고, 류수아는 주저했지만 주변 상황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순식간에 다른 방향으로 튀어나갔다.
그때 녹색 구름은 벌써 인근에 다다라 육안으로도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흉악한 생김새의 나비들은 대부분 은색 물결을 향해 달려들었고 극히 일부만이 한립과 주변의 다른 요수들을 향해 쇄도했다.
또한 뒤쪽 은색 물결도 물러서지 않고 녹색 구름을 향해 돌진했고 나머지는 다른 사냥감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은조충을 피해 달아나던 요수들도 한립 일행과 마찬가지로 살길이 열렸음을 직감하고 바람처럼 흩어져 달아났다.
‘가자!’
한립의 등 뒤로 천둥소리가 작게 울리고 풍뢰시가 펼쳐졌다. 그는 날개를 펄럭여 청백색 실로 변해 허공을 갈랐고, 류수아와 석곤도 말없이 둔광을 일으켜 다른 방향으로 사라졌다.
풍뢰시를 전력으로 발동한 한립의 속도는 천 마리가 넘는 다양한 요수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힐 만큼 빨랐다. 금세 요수들을 따돌린 한립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끔찍한 살육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단 속도가 느린 수백 마리의 요수들은 두 흉충들의 싸움에 휘말려 뼈도 못 추리고 죽어나갔다.
녹색 나비들은 날개를 펄럭여 괴이한 녹색 바람을 일으켰고, 치지직 거리는 기이한 소리와 함께 날개 달린 은빛 곤충들이 수도 없이 떨어져 내렸다.
녹색 구름 속에서 나비들이 날아와 떨어져 내리는 은색 곤충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집어삼켰다.
한립이 남색빛을 일렁이며 지켜보니 은조충을 잡아먹으러 나선 녹색 나비들은 군데군데 붉은 반점이 찍혀 있었다.
그러나 화혈접이 방출한 독풍(毒風)이 아무리 대단해도 은색 곤충들의 수가 워낙 많았고 몇몇은 독을 버텨내기도 했다. 독풍이 지나가자 거꾸로 만 여 마리의 은색 곤충들이 녹색 나비 떼로 뛰어들어 격돌했다.
붕붕 거리는 날갯짓 소리와 독풍에 요충의 몸이 녹는 소리가 섞이며 녹색 나비와 은색 곤충들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그러나 추락하는 요충들은 주변의 녹색 구름과 은색 물결이 몰려들어 깨끗이 집어 삼켰기에 바닥에는 시체조차 쌓이지 않았다.
은색 곤충의 힘은 녹색 나비보다 강했지만 녹색 바람이 품은 독이 워낙 지독해 단시간 내로 승부가 날 것 같지 않았다. 다만 다른 사냥감들을 쫓기 시작한 요충들은 암묵적으로 다른 요충이 노리는 목표를 추격하지는 않았다.
요충들에게 따라잡힌 짐승들은 비명을 지르며 죽어나갔고 하늘은 수만 마리 요충들로 새까맣게 뒤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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