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5화. 우연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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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 일행은 이렇게 많은 암수 떼들을 마주친 것에 당황했지만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이기더라도 부상이나 원기 소모를 감수해야 했고 그러면 앞으로의 일정에 큰 차질을 빚게 되기 때문이었다. 남은 기력이 없으면 어떻게 유적을 찾아갈 것이며 그곳의 강력한 금제를 파훼하겠는가!
눈앞의 암수 무리도 우연히 한립 일행을 마주쳤지만 다른 무리들이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는지 흉흉하게 눈을 부라리면서도 먼저 달려들지는 않았다.
그들은 시간을 끌며 다른 암수 무리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이 때 한립과 석곤의 귓가에 류수아의 전음이 들렸다.
“조금만 더 가면 암수삼림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암수들을 무리해서 상대하기보다는 일단 흩어져 달아난 다음 바깥에서 모이는 것이 어떨까요?”
“저는 좋습니다. 선자의 뜻대로 하지요.”
석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곧바로 수락했고, 한립도 눈을 반짝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크헝!
암수 무리가 그들의 낌새를 눈치챘는지 우두머리로 보이는 삼안 암수가 먼저 크게 울부짖었다. 동시에 다른 암수들이 입을 벌려 수십 개의 검은 빛기둥을 쏘아 보냈고 앞발을 휘둘러 날카로운 발톱 빛을 날렸다.
암수들의 협공은 매서웠지만 이미 많은 암수들과 싸워본 그들은 암수들의 공격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들은 동시에 영기의 빛을 반짝이며 둔광을 일으켜 흩어졌다.
한립은 수정 날개를 불러내 청백색 실로 변해 날아드는 빛기둥과 발톱의 빛을 요리조리 피해 소리없이 사라졌다.
파앗!
류수아는 입에서 남색 구슬을 뿜어 옥 생쥐를 불러냈다. 구슬과 옥 생쥐가 빛을 뿜어 그녀를 남색과 하얀색으로 휘감고 한립과 다른 방향으로 튀어 나갔다.
검은 빛기둥 하나가 그녀 주위의 빛덩이에 닿았지만 물에 녹듯 모호해지며 하늘 저편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반면 석곤의 신통은 과격했다.
꽝!
그는 코웃음을 치며 갑옷에서 영기의 빛을 방출하고 가슴 앞에서 손뼉을 쳐 노란빛을 터트렸다. 노란빛이 괴이한 빛의 장막으로 뭉쳐져 사내의 몸을 감쌌고, 표면에 나타난 주술문자들이 연달아 날아드는 공격들을 모두 튕겨냈다.
그 틈에 석곤은 땅 속 깊숙이 들어가 엄청난 속도로 멀어졌다.
그렇다고 암수 무리가 그들이 달아나도록 가만히 지켜볼 리 없었다. 삼안 암수 세 마리를 주축으로 세 무리로 나뉜 암수들은 한립 일행이 남긴 기운을 쫓아 그들을 추격했다.
그러나 한립은 속도가 엄청나 한식경도 되지 않아 암수 무리를 따돌렸다.
드러내놓고 전속력으로 달아나는 모습에 다른 암수들이 도중에 암수삼림에서 튀어나와 달려들었지만 그의 소매에서 수십 개의 푸른 비검이 폭우처럼 쏟아져 암수들을 도륙했다.
청죽봉운검의 강력한 위력에 암수들만 조각나 잘려나갔다. 그 중 한두 마리는 발톱을 휘두르기도 했으나 푸른 비검은 형태가 없는 것처럼 발톱을 관통해 암수들을 일격에 처리했다.
한립은 법력을 아낌없이 쓴 덕에 반나절만에 암수삼림을 벗어났다. 이제 눈앞에는 울창한 밀림 대신 푸른 초원이 펼쳐졌고 짙은 풀냄새가 풍겨왔다.
한립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청백색 실을 반짝이며 한참을 더 날아가 작은 언덕에서 멈추었다. 그는 명청령안을 발동해 위험한 것은 없는지 꼼꼼히 살펴보고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의식을 방출해 주변을 훑었다.
한립은 날개를 거두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암수삼림 쪽을 주시했다. 암수들이 이렇게 먼 곳 까지 추격할 가능성은 적었지만 감히 그런 짓을 벌인다면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뒷짐을 지고 언덕 상공에 떠있다 암수삼림에서 시선을 거두고 핏빛 진법 원반을 꺼내들었다. 원반을 살핀 그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같이 있으면서 나를 찾아오지 않다니……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한립은 핏빛 진법 원반을 치우고 의미심장하게 한곳을 응시했다. 그는 푸른 둔광을 일으키며 원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쏘아져나갔다. 청백색 실로 변했을 때처럼 빠르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속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원을 가로지른 그의 눈동자에서 남색빛이 일렁였다.
‘저들은!’
전방에 누군가 무리를 지어 대치하고 있었는데 한쪽은 석곤과 류수아였고, 다른 한 쪽은 수염이 수북하게 나 거대한 삼지창을 등에 멘 사내와 녹색 가죽옷을 입은 여인이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류수아는 묘하게 긴장한 기색이었고 석곤은 차갑게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쥔 것이 당장이라도 싸우고 싶어 안달이 난 눈치였다.
그러나 가장 괴이한 것은 남녀 모두 하반신이 하얀 기운으로 가려져 있고 그 안에서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듯 물소리가 들려온다는 사실이었다.
‘해왕족(海王族)!’
한립은 한눈에 그들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해왕족은 천운과 멀리 떨어져 있지만 누구나 그들이 각치족과 연맹관계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해왕족 남녀와 그들 사이에 이렇게 긴장감이 흐르고 있는 것이었다. 한립이 날아오는 것으로 보고 쌍방의 표정이 확연히 달라졌다.
류수아는 눈을 반짝이며 표정이 한결 좋아졌고 석곤도 활짝 웃으며 알은체를 해왔다. 그러나 해왕족 남녀는 서늘한 시선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수사도 천운 사람입니까?”
“일단은 그렇다고 봐야겠습니다. 설마 제 일행들을 공격하려던 것은 아니겠지요?”
해왕족 사내가 우렁차게 소리치자 한립이 무덤덤하게 반문했다.
“내가 저들을 어찌하려 했다면 지금까지 저들이 멀쩡히 서 있겠습니까?”
“무엇을 믿고 그리 건방진 소리를 하는지 궁금하군요! 안 그래도 3대 수족(水族)이라 불리는 해왕족의 신통이 궁금하던 참인데 잘 되었습니다.”
그 말에 석곤이 도리어 씩 웃으며 성큼 앞으로 나섰다.
석곤의 말에 해왕족 사내는 살기를 드러내며 어느새 삼지창을 손에 들었다.
“오라버니!”
“잠시 만요, 석 형!”
해왕족 여인과 류수아가 이구동성으로 만류했다. 이어 해왕족 사내의 귓가에 여인의 전음이 들려왔다.
“오라버니, 우리의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임무에 집중해야 할 때에 다른 수사와 싸움이라니요!”
“구목성경(九目聖鯨)을 방출하면 겨우 저 셋쯤이야!”
해왕족 사내는 일단 움직임을 멈추고 입술을 달싹여 전음으로 답했다. 석곤 등 다른 수사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구목성경이 저를 따르기 시작했다지만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수시로 방출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아무 때나 불러냈다가 심기를 건드리면 왕족 혈맥이 옅은 제가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게다가 본 족은 각치족과 연맹 관계일 뿐 천운과 직접적인 원한이 없는데, 관한 일로 대사를 그르치지 마세요.”
해왕족 여인이 차분하게 사내를 설득하고 있을 때 석곤의 귓가에도 류수아의 전음이 들려왔다.
“석 형, 암수 삼림을 벗어나느라 이미 법력을 적잖이 소모하지 않았습니까? 저 해왕족 남녀의 수행이 범상치 않아 보입니다. 아무리 한 형이 도와준다고 해도 지금 저들과 싸우면 우리도 피해를 면치 못할 것이에요. 아직 유적을 찾아 금제를 깨지도 못했는데 자중하는 것이 어떨지요?”
“우리가 물러난다고 저들이 우리를 곱게 보내 주겠습니까.”
석곤은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제게 맡겨 주세요. 제가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저들이 협력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이 한 수사와 협력해 상대해주면 그만이고요.”
류수아의 목소리가 서늘해졌다. 그녀는 한립에게도 몇 마디 했고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한결 표정이 좋아졌다.
“저희 천운 13족과 해왕족은 그간 마찰이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울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지 말고 서로 갈 길을 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옳은 말씀입니다. 저희는 각치족 출신도 아닌데요. 그럼 수사의 제안대로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류수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해왕족 여인이 화사하게 웃고는 찬성의 뜻을 표했다.
그녀는 하얀 기운을 맹렬히 일으켜 사내까지 휘감아버렸다. 이에 해왕족 사내는 머뭇거렸지만 거부하지 않고 둔광을 결합해 하얀 빛덩이로 변해 날아갔다.
‘……!’
한립은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 무심코 눈썹을 꿈틀거렸다. 해왕족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두 가지 상이한 기운이 그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짐작컨대 여인은 특수한 신통을 익혔거나 굉장한 보물을 지니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이 사라지자 한립 일행도 방향을 정해 날아올랐다.
* * *
한참을 날아간 해왕족 오누이는 하얀 빛덩이 속에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뭐라? 상족 7계 녀석이 나머지 수사들보다 훨씬 위험했다고?”
“네, 그래서 제가 한사코 싸움을 말린 거예요.”
해왕족 여인은 검은 머리를 쓸어내리며 확신했다.
“네가 그렇게 말할 때는 이유가 있을 테지.”
“제가 현천의 보물을 따라 만든 현천법기를 아시지요? 아까 그것이 반응을 보였습니다.”
“현천법기가 반응을 보였다고! 그렇다면 그 녀석도 현천법기를 지니고 있단 말이더냐?”
사내는 하얀 빛덩이 속에서 튀어나갈 기세로 몸을 들썩였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현천법기가 이상할 정도로 격렬한 반응을 보였거든요.”
“그렇다면 현천의 보물이라도 지니고 있단 말이냐. 그건 말도 안 된다. 어찌 상족 7계 존재가 현천의 보물을! 하하, 내 보기에 이번에는 네 감이 틀린 것 같다.”
사내는 우스운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웃어넘겼다. 해왕족의 왕족 일맥인 두 사람은 현천의 보물의 위력을 조금은 알고 있었다.
“제가 아직 조종에 익숙하지 않아 잘못 감응했을 수도 있지요. 장로님들께서 이번 일을 위해 특별히 탐색용 현천법기를 내주신 것이니까요. 허나, 희박한 확률이지만 상대가 정말 현천의 보물을 갖고 있다면 싸움을 건 우리가 어찌 되었을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현천법기와 현천의 보물의 위력이 천지차이라는 것은 나도 안다. 구목성경이 돕더라도 죽은 목숨이었겠지.”
여인의 탄식에 사내가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니요. 그건 또 모를 일입니다. 현천의 보물을 지니고 있다고 아무나 현천의 보물을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겨우 상족 7계 존재가 어찌 현천의 보물을 제대로 발동하겠습니까. 특수한 공법과 비술을 익혀 수행의 한계를 뛰어넘었다고 해도 위력의 극히 일부 밖에는 사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제가 생각하기에 상대는 현천의 보물이 아니라 최상급 현천법기를 지녔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과 싸우는 것은 결코 현명한 결정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래, 최상급 현천법기를 지녔을 가능성이 높겠구나!”
“어찌 되었든 우리와 같은 것을 노리는 게 아니라면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요. 이제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고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해 큰 공을 세우는 것에만 주력해야 합니다. 돌아가면 큰 상이 주어질 테니까요! 지금까지 광한계에 진입했던 수사들이 고생해준 덕을 우리가 보게 생겼습니다.”
“하하, 네 말이 맞다. 그나저나 며칠 전 우연히 본 각치인들의 움직임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수상쩍게 어딘가로 몰려가던데 저 천운인들이 원래 향하던 방향과 비슷하지 않더냐? 설마 죄다 한 곳으로 몰려가는 것은 아니겠지?”
해왕족 사내의 표정이 묘해졌다.
“누가 알겠습니까. 이 넓은 광한계에서 두 무리가 마주칠 확률은 정말 맞지만…… 일단 맞닥뜨리면 오늘처럼 평화롭게 해결할 생각은 못하겠지요. 그런 좋은 구경을 할 수 있다면 그자가 숨기고 있는 보물이 무엇인지 볼 수 있을 텐데요.”
여인의 입꼬리가 휘어졌다.
“우리는 따로 할 일이 있어서 구경하러 가기는 글렀다. 이제 가자! 한 달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게야.”
사내는 여인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속도를 높였다. 그들을 둘러싼 하얀 빛덩이는 빠르게 하늘 저편으로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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