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2화. 암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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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날수록 암수와 마주치는 빈도수가 조금 늘었고 이제 홀로 다니기보다 대부분 두세 마리씩 무리를 지어 활동했다. 심지어 이레가 지나자 암수들은 대여섯 마리 혹은 열댓 마리씩 떼 지어 몰려다녔다.
일행은 더욱 주의를 기울였고, 신묘한 둔술과 높은 수행으로 암수들에게 들키지 않고 이동할 수 있었다.
다행히 그들이 운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암수삼림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오는 내내 고계 삼안암수를 한마리도 마주치지 않았다. 앞으로 사나흘만 날아가면 암수삼림의 중심부를 지나 외곽으로 빠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립과 류수아 그리고 석곤까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간의 경험으로 비춰볼 때 한번의 실수로 공든 탑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게다가 암수삼림 깊숙이 들어왔는데도 고계 암수들이 보이지 않아 기쁘기는 커녕 오히려 마음이 서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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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유령처럼 조용하고 빠르게 이동했다. 분명 앞에 고동색 거목이 있는데도 그는 형체가 없는 것처럼 나무를 관통했다. 그러나 그는 미간을 좁히며 수시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들키지 않기 위해 의식을 멀리 퍼트릴 수 없었기에 오직 명청령안에 의지해 암수들을 포착하고 피해야 했다.
류수아와 석곤도 무슨 방법을 쓰고 있는지 멀리 암수가 출현하면 득달같이 알고 피해갔다. 명청령안을 지닌 그와 비교해도 느리지 않았다.
‘오감(五感)과 관련된 신통을 익힌 것인가? 아니면 보물에 의지해서?’
한립은 영목신통을 통해 류수아와 석곤이 변한 암수가 멀찍이 떨어져 매우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안심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 때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전방에서 금빛 그림자가 튀어나오더니 석곤이 변한 암수를 측면에서 들이받아 버렸다. 석곤이 기겁하며 피하려 했지만 금빛 그림자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모습을 숨기고 있던 노란 빛을 거두고 보호막으로 법력을 집중했다.
쿵!
굉음이 울렸다. 노란빛과 금빛이 교전하다 금빛 그림자가 비틀거리며 물러나 순식간에 다시 균형을 잡았다.
석곤으로 변한 암수도 뒤쪽으로 튕겨나가 엄청난 굵기의 거목에 부딪쳤다. 석곤은 거목을 부러트리고서야 겨우 멈춰 섰고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한 모습이었다.
이에 한립과 류수아의 안색이 달라졌다. 단단한 육체를 가진 석곤이 금색 그림자와 충돌하고 이 꼴이 날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한립은 남색빛을 번득이며 멀리있는 금색 그림자의 정체를 파악하고 화들짝 놀랐다!
금빛 그림자는 체구가 작고 새까만 눈에 금색 털을 가진 암수였다.
‘말로만 듣던 암수왕! 그럴 리가…….’
출반 전에도 상의했지만 이 넓은 암수삼림 속에서 우연히 암수왕을 만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런데 고계 삼안암수도 만나기 전에 우연히 암수왕과 부딪치고 말았다. 상대의 정확한 실력은 몰랐지만 진위로 볼 때 성계급 이상이 틀림없었다.
한립은 멀리서 금색 암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체내의 몇몇 보물들이 그의 감정에 반응해 윙윙거렸다. 류수아가 변한 암수도 굵은 나뭇가지에 서서 금색 암수를 주시하고 있었다.
암수왕도 이번 충돌이 의외였던지 황당한 얼굴을 했으나 곧 사나운 눈빛으로 석곤을 노려보았다. 암수는 두 발을 쉭쉭 휘두르며 그대로 석곤에게 달려들려 했다.
‘어쩐다.’
그것을 보고 한립은 구하러 가야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석곤만 운 나쁘게 암수왕에게 들켰으니 이대로 달아난다면 한립과 류수아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반대로 세 사람이 힘을 합쳐 암수왕을 죽인다고 해도 상대가 크게 울부짖어 수백 마리 암수 떼를 불러 모으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달아나면 석곤은 죽을 것이다. 원자체를 지닌 수사가 부족해 유적의 금제는 파훼할 수 없을 것이고 임무는 실패로 돌아간다.
시킨 일도 하지 못하고 석곤마저 잃고 돌아가면 채류앵과 단천인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골치 아픈 일이 생기겠지만 어쨌든 나중 일이었다. 지금은 일던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찰나의 순간 결단을 내린 한립이 재빨리 여인 쪽을 살폈다. 그러나 류수아는 하얀빛을 반짝이며 튀어나갈 태세를 하고 있었다.
그가 막 뒤쪽으로 달아나려 할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흉흉한 눈빛을 하고 있던 금색 암수가 두 귀를 쫑긋거리더니 안색이 달라져 뜬금없이 분노한 것이다. 짐승은 낮게 으르렁거리며 다시 금빛 그림자로 변해 수풀 어딘가로 빠르게 달아나버렸다.
‘이게 무슨…….’
그것을 본 한립과 류수아가 어안이 벙벙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제야 석곤이 완전히 몸을 일으키고 열받은 얼굴로 그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어찌 암수왕이 홀로 이런 곳에 나타난단 말입니까! 아무리 운이 없어도 그렇지 은신을 하고 있었는데 날아가던 암수왕과 우연히 부딪치다니요!”
“석 형, 몸은 괜찮으십니까?”
류수아가 마치 꽤나 걱정했다는 듯 전음을 보냈다.
“괜찮습니다. 처음에는 몸이 저릿했는데 지금은 괜찮아졌어요.”
목소리를 들어 보니 크게 다치지는 않은 듯했다. 한립도 무어라 입을 열려고 하는데 전방에서 또 다른 일이 터졌다.
아우우우! 크아앙!
짐승 떼의 포효소리가 몰려들고 있었다. 수천마리의 짐승들이 동시에 울부짖는 소리에 귀청이 울려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류수아가 깜짝 놀라 소리를 높였고 한립과 석곤도 놀란 얼굴을 했다. 다음 순간 포효소리가 뚝 끊기고 전방에서 무수히 많은 요수들이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잠시 후에는 두 귀로도 대규모의 짐승 떼가 이동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서 피해야 합니다!”
얼굴이 창백해진 한립이 류수아와 석곤에게 전음을 보내고 주변 거목으로 뛰어들어 사라졌고, 석곤과 류수아도 한립의 전음을 듣고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파앗.
석곤은 명렬히 노란빛을 반짝이며 땅속으로 사라졌고 류수아는 입에서 남색 기운을 뿜어 점차 투명하게 변하더니 허공에서 소실되었다.
그들이 흩어져 달아난 후에도 멀리 어둠 속에서 암수들이 끊임없이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암수삼림에 서식하는 모든 암수를 모아 놓은 것 같았다.
한립은 전력으로 달아나면서 슬쩍 뒤를 돌아보았는데 대부분 이마에 회색 눈이 하나 더 달려있었다. 이제까지 나타나지 않던 삼안암수들이었다!
어쩐지 오는 동안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는다 했더니 전부 한 곳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암수 떼에서 무수히 많은 의식이 퍼져 나와 사방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한립은 더는 요행을 바라지 않고 검은빛의 천을 방출해 온몸을 둘러쌌다. 오라왕족에게서 얻은 신비한 검은 손수건이었다. 그리고 입을 벌려 보라색 부적도 분출했다.
파앗.
부적이 몸에 달라붙자 보라색 기운이 수많은 은색 주술문자를 머금고 그를 감쌌다. 한립이 변한 암수는 무형의 허상화가 되는 대신 속도가 한결 느려졌다.
그는 재빨리 석곤과 류수아가 달아난 방향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들은 속도를 전혀 늦추지 않고 미약한 기운을 발산하며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 은신술을 펼친 한립과 달리 일단 최대한 빨리 달아나려는 듯했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일지는 두고 봐야 알 것이다.
고계 암수들이 석곤과 류수아의 은신술을 꿰뚫어보지 못한다면 빠르게 이곳을 떠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빨리 날아가도 암수들에게 들키면 훨씬 위험한 상황에 처할 것이다.
반면 태일화청부를 붙이고 검은 손수건까지 뒤집어쓴 한립은 이동 속도가 느리지만 쉽게 발각될 리 없었다.
삼안암수들이 수많은 의식을 발산해 한립은 물론이고 멀리 날아가고 있는 석곤과 류수아를 훑었다. 그러나 의식은 멈추지 않고 그냥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이에 한립과 나머지 두 사람은 그제야 안심했다. 그런데 그들은 짐승 떼를 자세히 살펴보다 놀랄만한 발견을 했다. 무리 속에 갑자기 금빛 암수왕이 나타난 것이다. 분명 아까 마주친 암수왕과는 달리 몸집이 조금 더 크고 주위에 고계 삼안암수 여러 마리를 대동하고 있었다.
암수왕 곁의 삼안암수들은 제 3의 요목이 회색이 아니라 은은한 은색이었다. 금색 암수가 모습을 드러내자 곁의 은안(銀眼)의 삼안암수를 제외한 다른 짐승들은 꼬리를 말고 멀찍이 물러나 공간을 내주었다.
짐승 떼가 멈춰 서서 경외감 어린 시선으로 금색 암수왕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냉랭한 시선으로 주변을 훑은 암수왕은 강력한 기운을 발산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강력한 의식이었다.
이에 흠칫 놀란 한립은 아예 움직임을 멈추고 곁의 나무속으로 몸을 숨겼다. 멀리 류수아와 석곤도 거대한 의식 파동을 느끼고 분분히 기운을 감추고 기다렸다.
강력한 의식 파동에 한립의 허상화는 걸리지 않았지만, 류수아와 석곤을 훑고는 의식이 멈칫했다. 그러자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달아납시다!”
의식의 힘이 음산한 기운을 띄자 석곤이 속삭이며 노란 빛줄기로 변해 허공을 갈랐다. 은신술이고 뭐고 포기한 듯했다. 류수아도 발각된 것을 눈치챘는지 옥 생쥐를 불러내 빛덩이로 변해 날아갔다.
이제 금색 암수 뿐만 아니라 다른 고계 암수들도 그들을 발견했고 짐승 떼가 요동쳤다. 금색 암수왕은 검은 눈동자에 잔인한 기운이 어리며 살기를 드러내고 입술을 달싹였다.
아우우우우.
그런데 다음 순간 암수왕이 표정이 급변하더니 고개를 쳐들고 다른 금색 암수가 달아난 방향을 향해 길게 포효했다. 포효소리는 맑고 아름다우면서도 기이한 위력을 지녔다.
주변의 평범한 암수들은 네 다리를 후들거리고 주저앉아 버렸고, 삼안암수들도 몸을 떨었다.
아우우우우.
긴 포효소리가 숲을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멀리서 비슷한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비슷하지만 엄청난 분노가 서린 울부짖음이었다.
크앙.
그것을 들은 암수왕이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낮게 울부짖자 멈춰있던 암수 떼가 다시 미친 듯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분명 앞서간 금색 암수를 쫓는 것이다.
하지만 암수왕은 류수아와 석곤도 이대로 보내줄 마음이 없는 듯 고개를 돌려 주변의 은안 암수들에게 무어라 으르렁거렸다.
명령을 받은 은안 암수들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은색 빛줄기로 변해 류수아와 석곤을 추격했다. 그리고 암수왕은 펄쩍 도약해 짐승 떼들과 함께 금색 암수 추적에 합류했다.
별안간 짐승 떼와 삼안 암수들 그리고 류수아와 석곤이 전부 시야에서 사라졌다.
한립은 거목 속에서 한 시진을 더 잠자코 숨어 있다가 태일화청부와 검은 손수건을 거두었다. 계속 태일화청부와 검은 손수건을 동시에 발동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태일화청부는 시간제한이 있었고 검은 손수건은 소모하는 법력이 만만치 않았다.
그는 류수아와 석곤이 날아간 방향을 살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립은 방향을 정해 날아올랐다. 눈부신 푸른빛이 점차 어두워지더니 결국에는 희미한 푸른 그림자로 변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출발 전 각자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보물을 나눠 갖지 않았으면 그들을 쫓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보아하니 류수아와 석곤은 추격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전력을 다해 날아가고 있었다.
한립의 속도로도 거리를 좁히기가 쉽지 않았다. 문제는 은안 암수들도 엄청난 속도로 아직 그들을 쫓고 있다는 점이었다. 한립은 머리를 굴리다 은빛을 반짝이고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꽈광!
그가 암수 가죽을 회수하고 수결을 맺자 천둥소리와 함께 등 뒤로 수정 날개가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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